[뉴스캔=손영남 칼럼니스트] 가히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나라를 보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덕분에 치솟은 어깨가 좀처럼 내려앉질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근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저출산과 고령화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인구감소세다. 여러 해외언론들이 한국의 소멸까지 논할 정도로 유례없는 이 사태는 현재 별 해법 없이 진행 중인 상황. 다소 과장된 감은 있지만 해외언론들의 우려가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4분기 0.65명, 연간 기준으론 0.72명으로
[뉴스캔=손영남 칼럼니스트] 최근 들어 무미건조하기만 하던 출퇴근길 풍경이 달라졌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로부터 받는 인사 덕이다. 출근을 위해 들어선 지하철 역사에서 오늘 하루도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가 하면 퇴근길에는 수고하셨다고 악수를 청하는 중년남성의 손길이 더해지기까지 한다. 힘내라는데 기분 나쁠 턱이 없지만 그래도 딱히 반갑지는 않다. 한 달여 남짓이면 사라질 풍경이기 때문이다. 4·10 총선 출마자들의 얼굴 도장 찍기 모습이다.4년 마다 반복되는 이 모습이 못내 마뜩찮은 이유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에이, 그냥 똥 한 번 밟았다 치지 뭐.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그런 심정이었다. 지난번 쿠팡에서의 극한 체험 이후 필자가 느낀 진솔한 심정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불쾌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그거니까.이는 바꿔 말하면 필자가 앞으로는 절대로 쿠팡 사업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정말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많은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는 '배부른 자'의 입장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힘든 군대
그리 좁지도 않은 집인데 날이 갈수록 비좁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잡다한 물품들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사들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소멸하게 되고 그럼에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다 보니 집안의 공간들을 야금야금 잠식하게 되는 것.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그에 깃든 추억이 안타깝다는 이유로 차마 내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래도 적당한 때가 오면 하나둘 버리기 마련이다. 입지 않는 옷은 집 근처 의류함에 버리고 읽지 않는 책은 쓰레기 분리수거일에 집 앞에 놓아
언제부터인가 본래 명칭보다 '기레기'라는 유쾌하지 않은 수식어에 더 익숙해져온 이들이 있다. 필자를 위시한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이 그 장본인이다. 누구보다 앞장 서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사명감으로 업을 이어온 입장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상당수 대중들은 그 표현이 크게 잘못 된 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는 모양이다.왜 그렇게 된 걸까. 이유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언론매체가 급격히 늘면서부터 제대로 트레이닝 되지 않은 기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가장
짜장면 가격도 오르고 소주값도 오르는 이 와중에도 내 월급만은 요지부동인 현실을 살아가는 게 우리 같은 샐러리맨들의 운명이다. 이는 30년 전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다. 아마 30년 후에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과는 다르게 샐러리맨들에게도 소정의 발언 기회가 주어진 정도 아닐까. 예전엔 회사가 인심을 베푸는 척 월급을 올려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하며 쥐꼬리만큼의 월급 인상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그래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세상이다. 매해 말이면 거치게 되는 연봉 협상이 그것이다. 한 해
1988년은 대한민국 역사에 아로새겨질 기념비적인 해로 기억된다. 올림픽 개최가 이루어진 해인 동시에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출이 이어진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 세계에 알린 올림픽 개최도 뜻깊었지만 서민들의 입장에선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정치적 수사가 더 의미 깊게 다가온 시절이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위대하다는 데 혹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냉정하게 보면 보통 사람들이 위대하다는 말은 역설에 가깝다. ‘보통’과 ‘위대’는 한 바구니에 담기기 어려운 성질을 띤 가치인 탓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하나
지난 주말, 습관처럼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한 프로를 보게 되었다. 웃고 떠드는 폼이 왠지 낯익다 싶어 주의를 기울이고 보니 그 유명한 개그콘서트였다. 처음엔 예전 것을 재방송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확인해보니 몇 년 전 폐지되었던 개그콘서트가 새롭게 방송을 한다고. 반가운 일이다.많은 개그 지망생들과 개그맨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무대가 다시 생긴 것이니 웬들 안 그럴까. 그럼에도 못내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다.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래 개그콘서
평범한 어느 식당, 벽면에 ‘추가반찬은 셀프’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었지만 미처 그를 보지 못한 한 남성이 반찬 추가를 위해 종업원을 부른다.“아줌마, 여기 반찬 좀 더 줘(요).”결과는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는 퇴짜를 맞았을 확률이 크다. 반찬 추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그의 무신경한 화법이 종업원이던 여성의 심기를 해쳤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가 바로 ‘아줌마’다. 나이든 중년 여성을 호칭하는 단어인 아줌마는 국립국어연구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대화 중에 시답잖은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을 꽤나 싫어한다. 맑고 고운 우리 말이 버젓이 있음에도 일부러 영어를 쓰는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엔 좀 덜하지만 한때 정치인이나 학자들 사이에서 ‘워딩’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그걸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말 내지는 표현법 정도로 해석되는 그 단어를 쓰면 있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나없이 그 단어를 차용한 것이었는데 그 덕에 일반인들조차 워딩이라는 단어를 대화 중에 수시로 사용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그게 큰 잘못은 아
선뜻 대답을 못하는 그 이는 내 오랜 지인이다. 이혼 후 아들 하나를 키우며 부지런히 삶을 꾸려가는 그녀는 모든 일에 똑 부러지는 모습을 선보이던 당찬 사람이었지만 유독 그 질문에서만큼은 갈피를 못 잡고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저임금 이야기다.뷰티 산업 쪽에서 일하는, 정확히 말하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는 그녀는 일이 있을 때만 수입이 발생하는 자신의 직업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서울 모처에서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생계에 보탬을 주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지만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가 아니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요즘,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K팝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K컬쳐의 매력에 푹 빠진 이들이 진정한 한국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 발걸음을 늘린 탓이다.그 과정에서 유튜브나 여타 인터넷 커뮤니티에 한국을 소개하는 컨텐츠들이 늘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장점들이 소개되고 그를 본 외국인들이 또 다시 우리나라를 찾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은 우리로서는 어깨가 으쓱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요즘 흔히 이야기되어지는 ‘국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근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의아한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어!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임마! 어저께도 어! 같이 밥 묵고 어! 사우나도 같이 가고 어~”이 대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2012년 개봉해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에서 주인공이던 최민식이 내뱉은 이 대사는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을 만큼 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죽하면 영화는 몰라도 이 대사만큼은 안다고 그럴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장면이었다. 불과 1분 남짓의 짧은 대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역시 최민식이란
어제, 누군가의 부모이던 한 이가 자식들의 곁을 떠났다. 오늘, 누군가의 형제이던 한 사람이 형제들의 옆자리를 비우려 한다. 그리고 내일, 누군가의 자식이던 한 젊음이 부모들의 절규를 뒤로 한 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그렇게 매일매일 누군가가 원치 않는 이별을 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묵묵히 일을 하던 대한민국 노동자의 허망한 죽음은 그렇게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건 인지상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로 인한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
‘A 기업, 파업 노동자들 상대로 4700억 원 손해배상소송 제기.’다가올 2030년, 각종 언론매체의 헤드라인을 화려하게 장식할 문장이다. 예언가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저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이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소리가 아니다. 엄연히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증거 1.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47억 원 손해배상 판결#증거 2.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을 상대로 470억 원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이미 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