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계산은 달랐다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았다. 정치적 손해가 가는 일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초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선언한 뒤 ´왜 한미FTA인가´라는 의문이 그치질 않자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우군과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집요하게 한미FTA를 밀어붙이는 모습은 언제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훌쩍 뛰어넘던 ‘바보 노무현’ 모습 그대로였다. 정치적 결단이 요구될 때마다 노 대통령의 셈법은 달랐다.

그리고 2일 한미FTA가 타결됐다. 숱한 난관을 뚫고 세계 최대 미국시장을 뚫기 위한 지난 400일 동안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 비준.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아 한국경제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다


◆ “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일류로 가자”

지난해 2월 3일, 미국 워싱턴DC 의회 건물.
이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로버트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한미FTA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다. 미국 의회가 행정부에 위임한 신속협상권한(TPA) 시한인 2007년 3월까지 계속될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같은달 16일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FTA의 목표는 한마디로 경쟁력 강화이다. 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일류로 가는 길이다”며 한국경제의 한단계 도약을 위해 한미FTA를 주도적으로 제안했음을 밝혔다.

한미FTA가 처음으로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2003년 8월 정부가 마련한 ‘FTA추진 로드맵’을 통해서였다. 중장기 과제로 미국 등 거대경제권과 FTA를 추진하겠다는 구상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까지 막연한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한미FTA는 1년 뒤인 2004년 5월 말 한·미 양국 통상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미국측이 한국과의 FTA에 관심을 보이면서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이듬해인 2005년 2∼4월까지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3차례에 걸쳐 실무점검회의가 열린데 이어 같은해 7∼9월 김현종 본부장이 직접 미국을 방문, 의회 지도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분위기를 띄웠다. 곧이어 9월 미국 정부가 한국 등 4개국(이집트, 말레이시아, 스위스)을 FTA 우선협상 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한미FTA 협상 개시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미FTA를 위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던 지난해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조율이 되는대로 미국과의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밝힌다. 미국과의 한바탕 접전을 위한 몸만들기가 이미 끝났음을 시사한 것이다.




◆ 험난한 협상의 연속

한미FTA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한 지 넉달 뒤인 지난해 6월, 미국 워싱턴DC에서 1차 협상이 열렸다. 탐색전인 첫 협상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달 전 교환한 협정문 초안을 바탕으로 통합협정문 작성을 시도했지만 농업, 섬유, 무역구제 등에서 끝내 접점을 찾지 못했다. 향후 험난한 협상을 예고하는 듯했다.

태평양을 넘어온 반FTA 시위대의 꽹과리 소리도 협상기간 내내 협상장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밖으로는 미국측 협상단을, 안으로는 국내 반대파를 상대해야 하는 고난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2차 협상에서는 미국측이 우리측의 ‘약제비 적정화방안’ 시행 방침에 반발, 갑자기 협상을 중단시키는 파행이 일어났다.

국내 반대여론도 갈수록 거세지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7월 MBC PD수첩이 캐나다와 멕시코의 빈곤층 증가와 양극화 등 부정적 현실을 모두 1994년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탓으로 돌리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왜곡한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정부가 미국과 FTA를 맺기 위해 쇠고기, 스크린쿼터, 자동차, 의약품 등 4개 분야에서 모종의 양보를 했다는 이른바 ‘4대 선결과제’ 논란이 사실인 양 유포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이는 사실관계에 근거하지 않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가 얼마나 큰 해악을 미치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이처럼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청와대는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를 위원장을 하는 FTA체결지원위원회를 꾸려 한미FTA의 의미와 진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대국민 홍보를 강화했다. 협상이 성공하려면 대국민 홍보가 협상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한미 양국에서 번갈아 열린 협상은 ‘어디 곳을 협상장으로 정하느냐’는 것까지 상대방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4차 협상에서 우리측이 감귤의 민감성을 알리기 위해 협상장을 제주도로 정하자, 다음 5차 협상에서 미국측은 주요 쇠고기 생산지인 궁벽한 산간지방인 몬타나로 우리측을 초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국의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특히 5차 협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난해 11월 말, 3년 여만에 수입재개된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이 발견되면서 협상은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양국간 합의한 위생조건에 따라 우리측이 뼛조각 쇠고기 전량을 반송폐기하고, 이에 대해 미국측이 물고 늘어지면서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다.

또 5차 협상에서 우리측이 무역구제 요구사항을 따내기 위해 미국측의 주요관심분야인 자동차와 의약품 협상을 전격 중단하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협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 국익 수호 위한 막판 진통

실타래처럼 꼬인 협상의 매듭을 풀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핵심 쟁점사항을 중심으로 고위급 회담이 진행됐다. 협상 횟수도 당초 계획보다 늘어났다.

지난 1월 서울에서 열린 6차 협상부터는 핵심쟁점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주고받기에 나서면서 서서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국회에서 우리측 협상전략을 담은 대외비 문건이 통째로 유출된 것이다.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가 “잘 봤다”고 할 정도였다. 가장 중요한 고비에 상대방 앞에서 벌거벗은 꼴이 된 것이다. 협상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워싱턴(2월, 7차 협상)과 서울(3월, 8차)을 오가는 협상과 별개로 지난 2월 김현종 본부장과 수전 슈와브 USTR대표가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는 등 막판 조율을 위한 고공플레이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3월 들어 주요 쟁점사항인 농업과 섬유분야 타결을 위한 고위급 협상도 잇따라 열렸지만 한치 양보없는 막판 힘겨루기만 계속됐다. 이른바 ‘딜 브레이커’(협상결렬요인)로 꼽혔던 쇠고기 등 농산물 문제와 자동차 관세 철폐 문제를 두고 양측은 막판까지 평행선을 달렸다.

미측의 예외없는 쇠고기 시장 개방 요구에 우리측은 ‘협상의제가 아니다’고 맞섰고, 우리측의 자동차 관세 조기철폐 요구에 미측은 자동차 관련 세제 개편 요구로 버텼다.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닫는 상황에서 드디어 3월 26일 끝장협상이 시작됐다. 최종 합의점을 찾기 위해 양측 최고위급 협상대표들이 서울 하얏트호텔에 모였다. ‘극적 타결이냐, 막판 결렬이냐’를 결정짓는 숨막히는 순간이 이어졌다.

◆ 대통령의 집념과 뚝심

협상 타결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노 대통령은 중동 순방 중에서도 관계장관, 청와대 참모들과 숙소에서 매일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협상팀을 독려했다. 국익을 위한 노 대통령의 뚝심과 집념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같은 달 29일 중동을 순방 중인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하면서 결국 ‘극적 타결’쪽으로 결론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30일 오전 9시 서울공항에 도착한 노 대통령은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김현종 본부장으로부터 협상경과를 보고받는 등 최일선에서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그동안 한미FTA협상은 단 한 번도 적극적인 지지자를 얻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협상기간 내내 반대에 목을 멨고, 보수진영은 정치적 이유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대통령의 몫이었고, 협상이 고비를 만날 때마다 노 대통령이 직접 돌파구를 마련했다.

진보진영을 향해 "우리나라가 진보진영만 사는 나라인가. 진보라면 미래의 문제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농민 대표들에게는 "식량안보를 얘기하지만 기름도 쌀보다 조금도 가볍지 않다. 농업도 시장의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원군도 없이, 때로는 지지세력으로부터 돌팔매를 맞으며 노 대통령은 묵묵히 한미FTA를 밀어붙였다. 협상의 원칙은 언제나 ´국익´과 ´국민을 위한 주도적 선택´이었다. 어째든 역사는 노 대통령을 ´한미FTA 대통령´으로 기록할 것이다.

협상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마치 협상 타결이 기정사실화 되는 것 같았던 지난 3월 13일 국무회의.
이날 노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실익 위주로 면밀히 따져서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체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날 언급은 시점과 내용에서 우리측 협상단의 협상력을 높이는 절묘한 전략이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우선 협상 상대국인 미국을 향한 것이었다. 경제적 실익이 없으면 결렬도 불사한다는 메시지였다.
이와함께 정치적 음모론 등 한미FTA을 둘러싼 각종 억측에 쐐기를 박는 동시에 협상을 타결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수도 있는 협상단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결국 ´일석삼조´였던 셈이다.




◆ 한마음으로 마지막 관문 넘어서자

긴 협상의 터널이 끝나고 있었다. 같은달 31일 새벽 1시가 시한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계속됐다. 그러나 곧 끝날 것 같던 협상은 막판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는데 양측이 동의하면서 48시간 연장됐다. 허탈할 틈도 없었다. “경제적 실익에 맞지 않는 한 협상타결은 없다”는 우리측 원칙에 따른 결정이었다.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순간이 계속됐다.

그리고 드디어 4월 2일 오전 협상이 타결됐다. 지난해 2월 협상 개시를 선언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시장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티켓’을 따낸 것이다.

그러나 이번 티켓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앞으로 국회 비준이라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분열된 국민여론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우리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지난 14개월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른 협상단의 노력이 빛을 발하려면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다시 한번 ‘뒷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신현기 (nollst@korea.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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