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뭉수리한 정쟁NO,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논쟁YES』

『두루뭉수리한 정쟁NO,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논쟁YES』
드디어 대정부 질문이 속개 되었습니다. 2주 동안 국민들로부터 별의별 질책과 실망감의 표현을 다 듣고 열린 국회. 그 만큼 국민을 실망시켰으면 정신을 차렸을 만도 한데 속개된 국회에서 보여준 우리 정치권의 모습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대정부질문이 속개되자마자 한나라당은 정책질의는 제껴 놓고 정치공세 제2라운드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준비된(?) 정당의 모습인가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헐뜯기 흠집내기 막말이 총리와 대통령을 상대로 거침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아예 총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총리 상대의 질의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국회는 해산해야 한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뽑아주신 국회를 말입니다. 고함과 야유 삿대질이 난무합니다. 그도 모자라 속사포처럼 단상에 뛰쳐 올라갑니다. 의사진행발언을 달라고 협박성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나 금도(禁道)는 처음부터 없는 듯 보입니다.

저로서는 이번처럼 극심한 마음의 갈등을 한순간에 앓아야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처사를 태연하게 자행하는 저들을 막기 위해, 나도 저들처럼 똑같이 고함 치고 야유도 해야 하는 것인지, 더 나아가 단상에 뛰어올라가 멱살도 잡고 몸싸움이라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저들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둘 때까지 발언을 보장하고 묵묵히 앉아 있어야 하는 건지, 마음은 혼란이었습니다.

본회의장 앞자리에 제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바로 코앞에서 이런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도 저의 마음을 생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렵다고 솥단지를 깨부수며 시위를 벌이는 식당주인들, LPG 가격 인하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택시기사들, 생계 보장을 요구하며 아우성치는 집창촌 여성들, 이들의 얼굴이 순간 머릿속에서 겹쳐졌습니다. 그러자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졌습니다. 저는 나도 모르게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동료의원에게 내려오라는 외마디 고함을 치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사당을 뛰쳐나왔습니다.

왜 우리는 허구헌날 사사건건 비본질적인 문제로 싸워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봅니다. “국민이 뽑아주신 국회의원”이라는 것보다 ‘여’냐 ‘야’의 꼬리표가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것인지요? 때문에 “신행정수도 이전 찬성이냐 반대냐,” “국가보안법 찬성이냐 반대냐,” “언론개혁 찬성이냐 반대냐,” “사립학교법 개정 찬성이냐 반대냐,” 등등을 놓고 어떻게 건설적인 최종안을 낼 것이냐는 생산적 토론은 완전히 실종되고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식의 이분법적 정쟁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정치권도 모든 것을 싸잡는 “두리뭉수리한 정쟁” 대신 구체적인 정책의 문제점을 논하고 생각의 차이를 좁히는 논쟁을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현실적으로 여야가 갖는 커다란 인식 차이 때문일까요?

누가 옳건 그르건, 그것이 정략적·당리당략적 발상이건, 여와 야 사이에 현격한 입장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난마처럼 꼬인 현 정치상황에 대한 여야의 시각은 정반대입니다. 여당은 “야당이 처음부터 현정권을 인정하지 않아 정치상황이 이처럼 꼬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야당은 “여당의 일방통행식 정국운영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행정수도 이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은 “국가균형발전”이라고 하는 반면 다른 쪽은 “정략적 천도”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언론개혁도 한쪽은 아전인수격으로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반민주·반인권 악법”이라는 시각과 “안보 유지법”이라는 시각으로 갈립니다. 사립학교법 개정도 “학교의 공공성·투명성 제고법”이냐, “자율성을 해치는 반교육적 행위”이냐로 입장이 나뉩니다. 이런 절대적 시각 차이의 벽 앞에서 저는 “똘레랑스(‘관용’을 가리키는 ‘톨러런스(tolerance)´의 프랑스 말)” 정신을 떠올립니다.

“똘레랑스” 정신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산물입니다. 인류역사상 손꼽히는 이 대사건의 절대적 교훈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생존하지 못하고 공멸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결과 혁명주체들과 기득권층이 서로의 기본적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 정신, 곧 “똘레랑스” 속에서 현실을 헤쳐나갈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착상태에 빠진 답답한 우리 정국도 똘레랑스 정신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봅니다. “나는 백이요 상대는 무조건 흑”이라는 생각, “나의 주장은 진리이며 상대의 주장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생각,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패배”라는 생각, 이런 것들을 대승적으로 모두 접을 때가 왔습니다. “나와 네가 다르고, 다를 권리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상대방 주장에서 건설적인 타협의 씨앗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흑백논리는 다양성이 인정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는 정신적· 물질적인 선진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발목이 잡혀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있어, 흑백논리의 끈질기고 집요한 구태를 벗고 상대방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똘레랑스’ 정신을 실천하는 것만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은 아닌지요?

2004년 11월 15일


국회의원 노웅래



노웅래 기자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