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전남인터넷신문/이지폴뉴스】일제 강점기에 일어 났던 보성 향교 제주조난사건을 이끌었던 박남현 등을 비롯한 10인의 항일투사 업적이 그늘에 가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보성향교 유림들은 조선이 망한 뒤 1921년 8. 11일 보성향교 석전제에서 성인을 높이고 도리를 지키기 위해 전통 관례인 문묘에서 행하는 의식에 따라 제례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일제치하의 보성군청 재무주임(택전일중)이 제조한 사실을 정탐하고 대제일을 기해 갑짜기 습격하여 주세령을 위반한 밀주라고 거짓으로 꾸며 봉인하고 압수를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횡포에 격분한 유림대표 박남현을 위시한 박태익.박기용 등 100여명의 유림이 일제히 나서 왜인의 아전을 결박해 놓고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조선은 동방의 예의지국으로 성현을 숭배하고 제주를 주조하는것은 마땅한 일이다."

"너희같은 섬나라 오랑케들은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만 일삼고 온갖 만행과 무례를 자행하고 있어 짐승과 같이 용납하기 어려운 죄를 범하였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고 꾸짖은 후 유지뱅이를 씌워 장작더미 위에 올려 화형에 처하려 하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왜인 경찰서장(편산자랑)과 사법주임 송포롱이 혼비백산 달려와 백배사죄하고 너그러히 용서해 줄 것을 호소하자 후덕한 모든 선비들이 차마 형을 집행하지 못하고 방면하였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그 이튿날 왜인 서장은 모든 부서원을 동원하고 화순.장흥.고흥경찰서의 응원 부대와 합세하여 보성향교를 불시에 침입하여 공무집행방해와 주세령 위반의 죄목으로 유림 전원을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하여 죄를 자인하라고 하였으나 유림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저항하였다.

당시에는 1919년 3. 1. 운동의 열기가 남아 있어 매우 인심이 험악하였기에 혹 중대한 사건이 돌발할까 고심한 왜인 정부는 내각회의를 급히 열고 논란을 거듭 민심 무마책으로 10인의 주동 수감자 전원을 1년 10개월만인 1923년 6.30일 기소유예로 훈방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왜정만행에 대한규탄이 계속 되었고 보성향교에서도 연일 성토를 하였다. 이에 놀란 왜인 정부는 긴급히 내각회의를 열고 각료를 경질하고 조선 총독을 소환하여 우원일성으로 교체하고 1933년 6. 20일 주세령을 개정 칙령 제 8호 긴급 훈령으로 조선총독에게 향교의 제수에 쓰이는 주조는 임의대로 양조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는 보성향교 유림들의 장거가 결실을 맺었을 뿐아니라 전국 향교 역사상 커다란 획을 그을수 있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그후 보성향교는 성균관과 전국 유림들의 성금과 1988. 도.군의 지원하에 향교 명륜당 옆에 사적비를 건립하여 항일 정신을 가일층 고취하였다.

또한 10인의 후손들인 현 보성향교 전교 박해철.유도회보성군지부장 손동일.청년유도회장 김종표 등은 항일운동의 표본을 삼고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항일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으나 막대한 예산의 부족으로 정부의 지원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특히. 이들은 항일기념관이 완공되면 추모와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활용 할수 있으며 조상들의 유물보전 기틀을 마련하고 밀폐형 진열장 등을 이용한 항구적 보전환경을 구축 향교를 찿는 내.외국인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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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폴뉴스]   전남인터넷신문 김승룡기자   ksy0767@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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