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장....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격 등 수많은 '전광석화 개혁'으로 선진국 기틀 다져

금융실명제와 군부숙청, 공직자재산공개 등 혁신적인 개혁을 통해 선진국 진입의 기초를 다진 한국 선진한국화의 국부 14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로 서거했습니다. 22일은 18년 전인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에 대한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한 날이어서 단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벽 서거했습니다. 사인은 무엇입니까.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이날 0시22분쯤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이 병원에 입원했으며, 21일 오후부터 갑자기 상태가 악화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에도 건강검진 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17일까지 머물다 퇴원했으나 다시 입원한 바 있고 2013년 4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중증 뇌줄중과 폐렴 등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은 이날 오전 2시 브리핑에서 “고인은 과거 반복적인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며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쇠약한 전신 상태에서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이 겹친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습니다.

-정치권을 비롯해 많은 조문객이 찾았겠군요.

=네. 서거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 22일 새벽 2시경부터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셨던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많은 분들이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김 전 대통령 부인인 손명순 여사와 차남 현철 씨 등 유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았고 87세로 고령인 손 여사는 안색이 급격히 나빠져 유족의 부축을 받아 휴게실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참석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방문 중인 박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다.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드리며 거듭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23일 새벽 귀국하는 대로 빈소를 찾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빈소를 찾았죠.

=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날 빈소를 찾아 "이 나라에 마지막 남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떠나셨다”며 “남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선진화된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잘 이뤄나가는 게 김 전 대통령이 꿈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거 전 병문안을 갔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 꼭 완쾌해 자주 뵙자고 했는데…”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고인은) 민주주의 발전과 대한민국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라며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23일중 문상을 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함께 ‘3김 시대(YS·DJ·JP)’를 열었던 김종필 전 총리도 조문을 했죠.

=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한 세월을 떠올리는 듯 영전에서 깍지를 낀 채 묵념했습니다. 김 전 총리는 유족인 현철씨를 만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을 언급하며 “보통 사람은 생각지 못하는 얘기다.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어떤 것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못하고,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생각이 난다”고 회고했습니다.

김 전 총리는 퇴임 후 김 전 대통령을 보좌한 김기수 전 청와대 비서관을 보고 “끝까지 (김 전 대통령을) 모시던 충신은 어디 갔느냐”며 끝내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조문 메시지를 보냈죠.

=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비보를 접하고 슬픔을 금치 못하겠다”며 “과감한 개혁을 이룩한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UN 한국대표부를 통해 보내왔습니다. 반 총장은 김 대통령 시절 청와대 의전수석과 외교안보수석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여야 현역 정치인들도 빈소를 많이 찾았죠.

=네. YS KID중의 하나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날 아침 일찍 빈소를 찾아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다. 고인이 가시는 길을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며 상주를 자처했습니다. 김 대표는 차남인 현철씨와 함께 장례 절차를 논의했고, 하루 종일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김 대표는 “(고인은) 최초의 문민정부를 여신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위대한 개혁 업적을 이루신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당 지도부와 함께 빈소를 찾아 “지금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 속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끄셨던 김 전 대통령이 떠나신 것이 안타깝다”며 “이 땅에 민주화의 역사를 만드신 아주 큰 별이셨다. 민주의의 정신 계승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문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1970년 대통령선거 경선 승복 연설을 하면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이고 국민의 승리’라고 말했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한국 야당사에서 상당히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떠올렸습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국무위원들과 함께 빈소를 조문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헌신하고 평생 노력하신 분이므로 의미 있는 국가장이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 형식으로 치르기로 의결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발인은 26일이다. 정부는 22일 새벽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유족과 국가장에 합의하고 이날 오후 1시께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장례 절차를 심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며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됩니다. 

장례명칭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으로, 장례 기간은 26일까지 5일장으로 정해졌으며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고 위원장은 황 총리가 맡게 됩니다. 장례집행위원장은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맡아 주관합니다.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9일 시행된 국가장법이 규정한 국가장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국가장의 내용을 규정한 국가장법은 기존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것이다. 국장(國葬)과 국민장(國民葬)을 국가장(國家葬)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면서 법 이름도 바뀐 것입니다.

-이낙연 전남도지사도 애도의 뜻을 표했죠.

이낙연 전라남도지사는200만 도민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지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님 서거를 애도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김 전 대통령님께서는 일생을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셨고,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 등 숱한 고초에도 굴하지 않으셨다”며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셨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다.

이 지사는 특히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셨고, 광주 유혈진압의 책임을 물어 신군부 세력을 단죄해 과거사를 정리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전국 지자체도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설치한다죠.

=네. 서울시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설치해 23일 낮부터 운영합니다.

김 전 대통령 고향인 경남도는 23일 오전부터 조문을 받기 위해 도청 현관 앞 광장에 300명이 동시에 분향할 수 있는 규모로 분향소를 마련키로 했습니다.

경남도는 도청 이외에도 김 전 대통령 고향 마을인 거제시 장목면 대계마을과 실내체육관 등 2곳에 분향소가 설치키로 했습니다. 진주시 등 다른 시·군도 자율적으로 분향소를 설치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충북도 역시 도청 대회의실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23일 오전 9시부터 조문을 받기로 했으며 옛 대통령 별장인 청주시 소재 청남대 대통령기념관에도 추모공간이 마련됩니다.

충북도는 장례 기간에 조기를 달고, 축제 등 행사를 자제하는 한편 불가피한 경우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습니다.

경기도는 도청 신관 4층 제1회의실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은 23일 오전 9시부터 가능하고, 26일 자정까지 하루 24시간 운영됩니다.

전북도는 도청 강당 1층에 합동분향소를 마련하고 23일 오전 7시 30분부터 일반 시민이 자율적으로 조문할 수 있도록 24시간 분향소를 개방할 예정입니다.

경북도는 대구 산격동 도청 강당에 분향소를 설치했으며 23일 오전 9시 김관용 경북지사가 조문하고 나서 직원들이 돌아가며 분향토록 하고, 시민이 언제든 분향소를 찾을 수 있도록 개방키로 했습니다.

제주도는 도청 본관 4층 대강당과 서귀포시청 2층 대강당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23일 오전 9시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조문을 시작으로 일반 시민 조문을 받을 예정입니다.

전남도는 도청 1층 윤선도홀 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설치하고 23일 오전부터, 광주시는 청사 1층 시민숲에 합동 분향소를 설치하고, 23일부터 영결식이 거행되는 26일 자정까지 운영할 예정입니다.

강원도는 합동 분향소를 도청 별관 4층 회의실에 설치하고 23일 오전 9시부터 최문순 강원도지사를 시작으로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을 예정입니다.

인천시·대전시·울산시 역시 시·도청에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설치하고 23일 오전부터 일반 조문객을 받는다.

-간략하게라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애를 살펴보죠.

=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장목소학교, 통영중,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된 이후 9선 의원을 지냈습니다.

25세로 의정 사상 최연소 의원 기록을 세웠고 대변인 2회, 원내총무 5회, 야당 당수 4회, 여당 총재 1회 경력으로 최다선, 최장수 원내총무, 최연소 당수 등 화려한 정치 신기록을 가진 정치인이면서 유신반대, 11~12대 정치규제, 2년간의 가택연금, 1983년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23일간의 단식 등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한 현대사의 거목 그 자체였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에게 진 뒤 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그의 통일민주당이 김대중 후보의 평민당에 밀려 원내 3당으로 물러난 이후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는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金大中) 후보를 제치고 14대 대통령을 당선돼 ‘문민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인은 재임 중 역사바로세우기를 내걸고 12·12군사쿠데타 혐의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군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등 숙정 작업을 시행했고, 부동산 및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하는 등 놀라운 공적을 남겼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용인술, 수많은 정치인재를 남겼죠. 인사가 만사다...정치도 9단이지만 용인술 역시 역대 대통령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죠.

=네. 고인은 선 굵은 리더십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상도동계를 중심으로 민주화와 대통령당선, 선진국의 기초를 다지는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거물급 정치인들을 배출했는데요. ‘YS 문하생’'YS KID', '상도동계' 으로 불리는 거물급 정치인이 수두룩합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회창 전 국무총리 등도 김 전 대통령이 발탁한 인사들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1988년 4월 당시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 국회의원이 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총선 때 민자당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으며 이회창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이 1993년 대법관이던 이 전 총리를 감사원장에 임명한 데 이어 총리에 중용해 정치권에 입문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1997년 대선에 출마했던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김영삼 정부에서 최연소 노동부 장관을 거쳐 경기지사에 당선되며 대선 주자로 부상했습니다.

-측근, 가신 그룹으로 상도동계가 있죠.

=네. 김 전 대통령의 거주했던 서울 상도동 집을 말하는데 이는 동지이자 영원한 라이벌이기도 한 김대중 전 대통령 집이 동교동이었던 것과 대별되어 정치권에서 그렇게 나눠 불렀던 것입니다.

수많은 상도동계 거물 정치인이 많지만 현역 중에서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들 수 있습니다. 김 대표는 1987년 김 전 대통령이 창당한 통일민주당(당시 야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 당 총무국장 등을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또 새누리당 내 친박근혜계 좌장 격인 서청원 최고위원도 상도동계이고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는 ‘좌(左)동영, 우(右)형우’로 불린 고 김동영 전 의원과 최형우 전 의원이 있습니다.
14대 국회에 입문한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  홍준표 경남지사, 김문수 전 경기지사, 정의화 국회의장, 이완구 전 총리,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등 ‘15대 총선 동기’들도 대표적인 상도동계입니다.

홍 지사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 “15대 총선 때 당선된 우리들은 다 YS 키즈(kids)”라며 큰절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진한국의 기초를 다진 대통령, 현대정부의 국부, 무혈혁명의 정수 등 김 전 대통령의 치적은 사실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입니다.

=가장 큰 업적으로 취임 6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를 들 수 있습니다.
금융실명제는 경제는 물론 한국 사회의 관행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파장이 큰 정책으로 김영삼 정부 초대 경제수석으로 김 전 대통령의 ‘경제 교사’였던 박재윤 전 통상산업부 장관조차 추진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극비에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습니다.

금융실명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95년 단행된 부동산 거래 실명제 도입도 큰 업적입니다.

부동산 실명제는 부동산 거래를 반드시 매매 당사자의 실제 이름으로 하도록 한 것으로, 자신이 보유한 부동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해도 법적 보호를 해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차명을 통해 탈세와 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을 막겠다는 김영삼정부 경제정책의 두 번째 '승부수'였습니다.

-세계화 경제도 상당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죠.

=네.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호주를 방문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11월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금융자율화, 외환자유화, 자본시장 개방 정책 등을 밀어붙였습니다. 1996년 말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는데 OECD 가입은 우리 경제 체질을 선진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금융실명제가 우리 경제의 현대화, 선진화의 기초를 다졌다면 공직자 재산공개는 정부의 현대화. 투명화를 실천한 계기가 됐죠.

=네. 공직자 재산공개를 선언한 날은 1993년 2월27일 국무회의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며 자신의 일가 재산 17억7천822만6천70원을 공개했습니다. 이날 김 전 대통령의 재산공개는 현재까지 입법·사법·행정부 고위공직자들의 재산변동 내역이 매년 공개되는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군부독재의 잔재이자 근원을 소멸시킨 하나회 숙청도 큰 업적이죠.

=김 전 대통령 자신도 퇴임 후 회고록과 기자회견 등 공식, 비공식 자리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은 것이 하나회 척결입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단순히 하나회 뿐만 아니라 군 비리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해 12·12사태와 하나회 연루, 인사비리, 율곡비리 등과 관련해 전역 조치되거나 해임, 전보된 장성만도 50여 명에 이르며 김 전 대통령 취임 첫해 군단장급 62%, 사단장급 39%가 각각 교체했습니다.

하나회는 3공에서부터 5공, 6공에 이르기까지 군내 막강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군부내 사조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 군부내 실세들이 포함되어 있어 언제든지 군사력을 통해 정권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회 좌장격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긴 것도 사실 '하나회'가 있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리고 실제 여러차례 '쿠데타'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회 척결 작업은 1993년 취임 10여 일 만인 3월 8일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3개월여 동안 하나회 척결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습니다.

두 사람의 경질은 하나회 인맥 뿌리 뽑기로 인식됐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4월 2일 6공 군부의 실세였던 안병호(육사 20기) 수도방위사령관과 김형선(육사 19기) 특전사령관이 전격 해임됐으며 엿새 뒤에는 2군, 3군사령관이 줄줄이 경질됐습니다.

4월 2일 서울 동빙고동 군인아파트 일대에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각 기수 대표를 비롯한 기수 7~10명씩 134명의 하나회 명단이 '유인물'이 살포됐습니다. 

장군부터 영관급 장교까지 퍼져 있는 하나회 회원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하나회는 군 인사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 1998년 단행된 준장과 소장급 인사에서 육사 25기 하나회 출신들은 소장 진급조차 되지 않았고 4~5명의 명맥을 잇다가 지금은 완전히 청산된 상태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1979년 12월 12일 일어난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 관련자인 군내 서열 1위의 이필섭 합참의장 등 장성 4명의 옷을 벗겼고 뒤이어 조남풍 1군사령관도 해임했습니다.

이어 베일에 쌓였던 30조원 규모의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비리에도 칼을 들이댔다.

이종구, 이상훈 전 국방장관을 비롯한 김철우 전 해군참모총장, 한주섭 전 공군참모총장 등 전직 군 최고위 간부들이 방산업체 및 무기중개상 등으로부터 수억원에서 수천만원까지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습니다.

-신군부 세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정을 장악한 1979년 12·12 사태, 이듬해 쿠데타에 저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에 대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밑거름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네. 1979년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김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에도 올바른 역사적 좌표가 매겨져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2.12사태는 법조에서도 현행법 틀을 바꾸지 않는 이상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류가 지배적이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우 6공화국 때인 1988년 국회 청문회를 통해 진상규명이 시도됐지만 흐지부지된 상태였습니다.

1993년 5월 12·12 사태에 대한 고발 사건을 접수한 검찰은 이듬해 10월 이 사태를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관련자들을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 처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설'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검찰에는 재수사를 명령했다. 검찰은 같은 해 11월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고강도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수사 착수 22일 만인 1995년 12월21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군부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 기소됐으며 12·12와 5·18에 대한 책임 규명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 축재까지 밝혀졌습니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전직 대통령 두 명에 대한 재판은 1심에서 사형과 징역 22년6월을 각각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됐으며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항소심 형량대로 확정됐습니다.

12·12 사태는 명백한 내란이었으며 5·18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안에 대해서도 두 전직 대통령의 내란 목적 살인죄가 인정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2천억원이 넘는 뇌물을 챙긴 점도 인정돼 같은 액수의 추징금이 선고됐습니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권력형 부패를 단죄할 수 있었던 건 특별법 제정과 검찰 재수사라는 초강수를 둔 김 전 대통령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국민적 합의 없이 헌정을 문란하게 했다면 그 성공 여부를 떠나 처벌돼야 한다는 교훈을 온 국민의 뇌리에 각인시켰습니다.

-20년 전 민선 지방자치를 부활시켜 지방분권시대를 연 것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사회분야 주요 업적으로 꼽힙니다.

=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1952년 이승만 정부가 시·도의원과 시·읍·면의원을 선출해 지방의회를 구성, 시작됐는데 1961년 5·16쿠데타로 인해 1960년 선거를 끝으로 지방의회가 폐지됐습니다.

이를 1990년 3당 합당 후 여당 지도부가 된 YS는 야권과 협상을 벌여 민선 지방자치 부활 로드맵을 도출하는 데 성공해 당시 여야합의에 따라 1991년 3월과 6월에 지방의회선거가 실시돼 지방자치시대가 부활됐으나 노태우 대통령은 여야합의를 어기고 1992년 상반기까지로 시한을 정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당 총재 시절 약속대로 지방자치 전면 시행을 추진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6월 27일 지방선거 투표소를 찾아 "중단된 지방자치를 34년 만에 내손으로 부활시킨 데 대해 뿌듯하고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적에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가 포함되죠.

=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70년간 우리 땅에 버티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는 문민정부 주요 사업으로 강력히 추진돼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 철거까지 모두 완료됐습니다.


-남북관계도 획기적인 전환을 시도했죠.

=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라는 대북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을 암시하는 발언, 동맹국인 미국보다 같은 민족인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더 중시하겠다는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3월 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의 송환을 발표하는 등 대북유화책을 기조로 대북관계를 풀고자 했으나 북한은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고, 그해 3월 19일 남북 회담 과정에서 북측 대표로부터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해 경색국면을 자초했습니다.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며 북핵 불용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북핵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4년 6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고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의 북한 핵 시설 폭격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같은 긴장국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김 전 대통령이 수용해 곧 성사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그해 7월 8일 김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무산되어 남북관계는 더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을 제외한 미국과 북한이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합의한 것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했으며 결국 제네바합의는 폐기됐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일관성 없이 '온탕'(유화정책)과 '냉탕'(강경정책) 오락가락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받고 있으나 '비핵화' 평화통일 기조를 지키면서 북한의 반응에 따라 신축적인 대응을 유지했으며 특히 미국과 북한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고 한국중심의 대북정책을 지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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