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중앙홀과 국회도서관에서 기념식 진행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최초로 천명한 대한민국 국회의 모태 임시의정원이 탄생한 지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를 기념해 대한민국 국회(국회의장 문희상)는 오는 10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중앙홀과 국회도서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합니다.

이번 행사에는 문희상 의장을 비롯한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5부요인과 정당 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전직 국회의장 등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 헌정회·제헌국회유족회 등 유관단체 관계자, 홍진 선생의 손주며느리 홍창휴 여사, 임시의정원 관련 독립유공자 후손 등 약 500명이 참석합니다.

기념식은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되는 '홍진 선생 흉상 제막식'을 시작으로 막을 올립니다. 흉상 건립은 지난해 11월 23일 제364회 국회(정기회) 제12차 본회의에서 '의회지도자(홍진)상 건립의 건'이 의결된 데 따른 것입니다. 해당 안건은 원내 1·2당의 홍영표·김성태 원내대표 외 69인이 공동발의에 참여했습니다. 

문희상 의장과 홍창휴 여사 등 주요 인사들은 흉상 제막식을 마친 후 국회의사당 중앙홀로 자리를 옮겨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합니다. 

100주년 기념식에 앞서 문희상 의장과 홍창휴 여사, 5부 요인, 정당 대표 및 원내대표,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지낸 이동녕 선생의 후손 등이 참여하는 '임시의정원 기념작품 제막식'이 열립니다. 

100주년 기념식 말미에 홍창휴 여사가 문희상 의장에게 임시의정원 관인 등 홍진 선생 유품을 전달하고, 문희상 의장은 홍 여사에게 감사패를 증정할 예정입니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으로서 해방 후 환국할 때 '임시의정원문서'를 가지고 들어왔고, 그의 손자인 홍석주 씨가 이를 보관하고 있다가 1967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여타 임시의정원문서가 6·25 전쟁 등으로 유실돼 거의 남아있지 않아 홍진 선생이 보관했던 임시의정원문서는 국내외 역사학자에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홍창휴 여사가 기념식 참석차 귀국해 홍진 선생 흉상 제막식에 참석하고, 역사적 기념물이자 주요 사료인 임시의정원 '관인(官印)'을 기증한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임시의정원 관인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사용된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의정원 및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상징합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식 경축행사와 함께 다양한 전시·광고, 특집방송, 학술세미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헌정기념관 지하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임시의정원, 미래를 품다'는 주제로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임시의정원 관련 기록물·사료를 특별 전시합니다. 

3일 오전 11시 헌정기념관 1층 중앙홀 및 소중앙홀에서는 문희상 의장과 국회부의장, 정당 대표 및 원내대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 임시의정원 관련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전 개막식이 개최됩니다.

여의도 봄꽃축제 기간인 5일(금)부터 11일(목)까지 여의도 윤중로에서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홍보관'이 설치됩니다. 

홍보관에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 영상과 임시의정원 최초 회의 내용 및 임시헌장, 임시의정원 사람들 등이 전시됩니다. 임시헌장 탁본 체험, 폴라로이드 사진·액자 제작, 특별전시 방문 스탬프 이벤트가 함께 진행됩니다. 

6일(토)부터 7일(일) 이틀간 국회 잔디마당에서는 2019년 국회개방행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국회 100년의 봄'>이 개최됩니다. 

첫째 날에는 가수 폴킴과 울랄라세션이 출연하는 축하공연 <임시의정원의 봄을 잇다>, 
둘째 날에는 역사강사 최태성이 진행하는 특별 토크쇼 <임시의정원 100년, 내일을 열다>가 열린다. 

국회 잔디마당에서는 '임시의정원 백주년 떡 나눔', '도전! 임시의정원 골든벨', '1919년 의복 체험', '독립운동 VR체험', '3·1독립선언서 캘리그라피' 등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펼쳐집니다.

국회방송(NATV)은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행사를 생중계하는 것을 비롯해 특집 다큐멘터리 <국민의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다>를 2부작으로 4월 10일(수)과 17일(수) 각각 방영합니다. 

문희상 의장은 이 프로그램에서 임시의정원의 의의 및 역할, 홍진 선생 유품의 의미, 대한민국 국회의 나아갈 길 등을 탤런트 박상원 씨와 함께 질의응답 형식으로 인터뷰합니다. 

또한 국회방송은 <생방송 NATV 오늘> 프로그램에서 전직 의장단 및 헌정회 의장을 초청한 특별 대담프로그램, <NATV 독립운동 영화관> 등을 편성했습니다.

국회도서관은 5일 <대한민국 의회정치의 시작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 목록집: 한국·미국·일본·대만> 자료집을 발간해 배포합니다. 

자료집에는 국내외 유관기관의 임시의정관 관련 자료조사 경과 및 목록, 임시의정원 관련 수집기록물 화보 이미지 및 임시의정원 연표 등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국회도서관은 임시의정원의 역사적 의의와 헌법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9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20분까지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합니다. 

세미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부터 국회까지의 역사적 변천 과정과 의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정통성 고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헌정사적 의미와 헌법적 평가', '개헌 과정으로 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주제로 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집니다.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식 참고자료

홍진 의장

(1977~1946)

 

주요 공적

 

대한제국 법관양성소 출신인 홍진 선생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에서 이규갑과 함께 13도대표자대회와 국민대회의 형식을 거쳐 한성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품에 안고 상해로 망명함. 1919년 9월 상해·연해주·국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룰 때,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통합의 중심이 됐던 것이 한성정부였음.

 

홍진 선생은 세 번(제3·17·20대)에 걸쳐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 가장 오랫동안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의회정치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함.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으로서 해방 후 환국할 때까지 다당체제로 운영된 임시의정원을 이끌었음.

 

1919년부터 1945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법무총장·내무총장·외무총장 등을 맡음. 1926년에는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는 등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 환국 시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임시의정원문서'를 가지고 들어왔으며 그의 후손이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바 있음. 홍진 선생의 유족은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식에서 보관 중인 '관인(官印)'을 비롯한 중요 문서를 기증할 예정임.

 

임시정부 27년 동안의 문서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망실됨.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 경찰에 의해 모든 문건을 압수당함.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임시정부는 문건들을 소중하게 보관하였고, 환국할 때도 비행기 탑승 인원을 제한하면서까지 13개 상자를 먼저 들여옴. 그러나 임시정부 문서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됨.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활동하였지만, 현재 임시정부 문건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

 

홍진 선생이 갖고 들어온 임시의정원 문서는 다행히 그대로 보존됨. 홍진 선생이 서거한 후 그의 손자인 홍석주 씨가 이를 보관하고 있다가 1967년 국회도서관에 기증. 이를 기초로 국회도서관에서는 1974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라는 자료집을 간행함. 임시정부와 광복군 문서는 모두 없어지고, 이 자료집이 임시정부가 27년 동안 활동하면서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음.

 

 

 

임시정부의 모태,

 

임시의정원 탄생과정

임시의정원은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중국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성립. 임시의정원은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 원류임.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때, 임시의정원은 보통 국가의 대의기관이나 입법기구만 의미하지는 않음. 왜냐하면 임시의정원은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모태이며, 임시정부와 더불어 입법부와 행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던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었기 때문임.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모든 한국민의 열망을 모아 독립국임과 자주민을 선언. 독립을 선언한 후 독립국가를 성립시키기 위해 국내외의 독립운동가 29명이 중국 상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설립해 임시정부를 탄생. 역사적으로 볼 때,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음. 중국이나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동녕·이시영·조완구·조성환·김동삼·조소앙,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였던 이광수·최근우 등 많은 인사들이 상해에 집결.

 

3·1운동을 전후해 상해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중, 독립임시사무소 총무 현순이 1919년 3월 29일 전보로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안 조직안'을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에 알림. 이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임시정부안이지만, '노령정부안'으로 잘못 알려졌고 미주에서는 '대한공화국 정부조직안'이라고 불림.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 30명 정도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를 진행. 이날 모인 인사들은 서로 의견이 엇갈렸음. 상해를 떠나겠다는 사람도 있었음. 그러자 3·1운동 당시 학생 대표였던 한위건이 "못 나갑니다. 정부 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한 걸음도 이 방에서 못 나가십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수많은 남녀 동포들이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밤이 아홉이라도 이 자리에서 정부를 조직하시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요구.

 

4월 10일 밤 10시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서 국내외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여 회의가 열림. 개회 벽두에 회의의 명칭을 정함. 조소앙의 동의와 신석우의 재청으로,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결정.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백남칠을 선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가장 먼저 국호와 관제를 결정하고 국무원의 구성원을 선출. 국호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으로 정함. 임시정부의 조직체계는 총리제로 하고, 국무원의 수반인 국무총리로는 이승만을 선출. 각부 총장과 차장을 선거하고, 10개조로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가결. 다음 날 4월 11일 오전 10시 임시정부의 조직을 완료하고 감격적인 만세를 부르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끝이 남.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에 성립돼, 1945년 8월22일까지 총 39회의 회의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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