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18] 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2(칭기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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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18] 다문화적 관점에서 본 영웅들의 이면 2(칭기즈칸)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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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인류문명의 선구적 지역인 중동에서 최초의 대제국을 형성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와 비교되는 인물이 바로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이다. 키루스 2세와 칭기즈칸은 태어나고 자라던 환경이 거의 비슷했다. 

다만, 칭기즈칸보다는 키루스 2세가 조금 더 나은 환경이었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목동과 함께 도망쳐 자라다가 아버지가 지배하던 변방 제후국의 왕을 계승한 뒤, 메디아를 장악해 나갔기 때문이다. 

키루스 2세의 성장과정과 칭기즈칸의 성장과정은 매우 닮긴 했지만, 칭기즈칸의 성장과정은 키루스 2세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그가 태어난 몽골은 여러 부족과 씨족들이 난립하며 서로 싸우고 죽이는 동물들의 왕국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것은 몽골 부족들을 분열시키고 지배하려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거란의 요나라는 몽같은 유목민족인 몽골 부족이 하나로 단결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여 부족과 씨족들을 분열시키고 반목하도록 했다. 금나라 역시 이를 계승해서 똑같은 지배방식을 답습했다. 

그래서 칭기즈칸이 태어났을 때, 몽골 부족끼리는 약탈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칭기즈칸, 즉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부족장들의 모임의 우두머리를 꿈꾸었지만, 테무친을 부르테와 약혼 시키고 돌아오다가 숙적인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이 때가 테무친의 나이 겨우 9세 때였고, 그 이후 테무친 가족은 보호해주는 씨족도 없이 목숨을 위협하는 추격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숨어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테무친에게 두 명의 중요한 여인이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 후엘린이었다. 그녀는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딸이었지만, 예수게이에 의해 납치당하고 난 뒤 테무친을 낳았다.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뒤 쫓겨다니면서도 엄격한 교육을 통해 테무친을 양육했다고 한다. 테무친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굳세게 살아남은 데는 어머니 후엘린의 엄격한 교육의 영향이 컷다. 

두번째는 테무친의 아내인 보르테였다. 그녀는 시집오면서 지참금으로 검은 담비 가죽옷을 가져왔다. 이 담비 가죽옷은 당시 몽골족에서는 귀중품 취급을 받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명품 취급을 받는 셈이었다.

테무친은 이 옷을 입지 않고, 케레이트 부의 족장인 토오릴 칸에게 선물로 주었다. 자기 성장의 밑천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례로 토오릴 칼은 "흩어진 너의 씨족을 모아주마"라고 하며, 보호자를 자처함으로써 테무친의 성장에 결정적 기반을 제공했다. 

칭기즈칸은 성장하면서 끊임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고난을 겪을 때마나, 이를 역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첫번째는 예수게이에게 테무친의 어머니를 빼앗긴 메르키트족이 그의 부인인 보르테를 납치하였을 때이다. 그는 보르테가 납치당했을 때, 친구인 자무카와 메르키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옹 칸에게 부탁을 해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리고 메르키트를 습격하여 아내를 되찾아 왔다. 이 때, 칭기즈칸은 처음으로 연합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자신의 맏아들 주치(주치는 보르테가 납치당했다 돌아온 뒤 바로 나은 자식으로 칭기즈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름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로 정했다고 한다)와 옹 칸의 딸을 결혼시키려 했을 때이다. 

주치와 결혼에 대해 내켜하지 않던 옹 칸이 거짓말 결혼식을 하면서 칭기즈칸을 초청한 뒤 습격했다. 엉겹결에 습격을 당한 칭기즈칸은 정신없이 도망치고, 겨우 살아남은 부하는 본인 포함하여 19명에 불과했다. 

이들 19명에는 칭기즈칸의 부족도 아니고, 여러 부족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목숨을 함께 하기로 결의한 뒤 재기했다. 흩어지고 싸우던 몽골 부족들이 함께 연합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게 엄혹한 시련과 패배속에서 더 크게 재기할 수 있는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초로 더 크게 재기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럼으로써 몽골의 각 부족들을 통합하며 "칭기즈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칭기즈칸에서 사람들은 역동적인 리더십의 전형을 배운다.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패배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칭기즈칸의 포용의 리더십이다. 

칭기즈칸의 포용의 리더십을 이야기하며 첫번째로 거론되는 것이 맏아들 주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부인인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하고, 이들 다시 빼앗아왔을 때 보르테는 만삭이었다. 그리고 난 뒤 곧바로 맏아들 주치를 낳았다. 그렇게 낳은 주치에 대해 칭기즈칸은 아들로 받아들이고 차별없이 함께 키웠다. 다만, 후계 계승에서는 제외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칭기즈칸의 두번째 리더십은 평등의 리더십이다. 그는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을 철저히 분배했다. 얼마나 평등하고 철저히 분배했는지, 전쟁중에 사망한 자의 부인(미망인)이나 고아에게도 노획물에 대해 동등하게 분배했다고 한다. 평등은 노획물에서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법률(칙령)을 제정하고 반포하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자는 법령 아래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이라는 근대의 법치주의"를 확립한 것이다. 

세번째는 관용의 리더십이었다. 그 관용의 리더십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적 자유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를 선택하고 믿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였으며, 또 자신의 종교로 타인의 억압하거나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사제들은 종교행사를 진행할 의무를 가지고 종사하도록 했다. 이렇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칭기즈칸 자신은 종교를 갖지 않았다. 

이같은 "법 앞에 평등이라는 법치주의 정신"과 "종교적 자유"의 정신은 근대 유럽은 물론 미국의 독립정신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국교나 하나의 공동체에 하나의 종교를 당연시하던 유럽과 미국에서 종교적 자유를 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몽골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확립된 역참제도와 교역의 발달로 동양의 선진문물이 서양으로 흘러들어가 "잠자는 유럽을 깨우고" "근대 유럽"이 태동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침판과 종이, 화약과 인쇄술 등 4대 발명품뿐 아니라, 동양의 유학사상까지 흘러들어가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계몽주의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중세 잠자는 유럽을 깨워, 근대 유럽을 태동시킨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초라한 유목민의 아들 칭기즈칸은 "잔인한 정복자"에 그친 것이 아니라, 포용과 관용, 그리고 평등 정신은 근대 유럽과 미국의 독립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쳐 법치주의와 종교적 자유라는 근대적이고 다문화적 세계관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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