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링컨에 대해선 수많은 전기와 책들이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링컨 관련한 책이 1만 6천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 정도로 링컨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추앙받고, 칭송받는 정치인이다. 우리 나라 정치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 달라면, 둘 중 하나는 김구선생이고, 또 다른 한명은 링컨을 꼽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전세계 정치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주장도 없지 않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가난과 역경을 뚫고 성장하지도 않았으며, 노예해방을 지지했기 하지만, 인권주의적 측면에서의 지지가 아니라, 정치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는 연방주의자였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강력한 억압정책을 시행한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주장이 있음에도, 일반적으로 링컨에 대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추앙을 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책들이 그를 미화하고 있으며, 그 미화된 일화들에 의해 존경받고 있음엔 틀림없다. 심지어 그가 숨을 거둔 금요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금요일과 같은 날이라며 그를 성자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극과 극을 달리는 링컨의 진실에 대해 추적해보도록 하자. 

링컨은 1809년 캔터키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이 비가 샐 정도로 보잘 것 없는 통나무집이었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은 그의 아버지 토머스는 날품팔이 농부도 아니었고, 지독히 가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실제 링컨의 아버지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위 15%에 준하는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링컨의 조상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링컨의 증조 할아버지는 영국에서 메사추세추주로 이주한 섬유노동자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에이브라함(링컨의 할아버지)은 버지니아 로킹햄에서 81만 평방미터를 소유한 건장한 지주였고, 그 지역 민병대장이었다고 한다. 그 후 캔터키로 이주한 그의 조부는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세 아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하고 만다. 

링컨의 조부에게는 세아들이 있었는데, 링컨의 아버지는 그중 막내였다. 따라서 장자인 큰 아버지가 전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아버지는 형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 농장을 사고 파는 일을 하며, 어느정도 평가받는 시민의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납세자 기준으로 상위 15%정도를 차지했을 것이고, 링컨의 어머니가 우유병으로 사망한 뒤, 다시 재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일푼 날품팔이 농부였다면 15%정도의 납세도, 재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링컨은 지독한 가난과는 다른 여느 평범한 중산층 정도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학력이 없고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것은 당시 학교가 거의 지어지지 않았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이상했던 당시의 상황에 견주어 판단할 문제이지, 지금의 입장에서 바라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찌되었든, 새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링컨은 독서광에 이야기꾼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언변을 지닌 변호사로 성장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노예제를 폐지하였지만,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에 의존하는 미국에서는 노예문제가 숙제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된 북부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었지만, 남부 주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어, 노예제 존속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런 상태에서 링컨의 집안이 다니던 침례교회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민주당 더글라스와의 논쟁에서 "노예제 폐지"의 입장을 피력한 것 때문에 노예해방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실제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열렬한 인권주의자는 아니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그의 처가집은 여전히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집안이었고, 그 역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를 변론하는 변호를 했지만, 흑인 노예의 편에 서서 변호를 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은 공화당은 북부 산업지대를 중심 근거지로 한 정당이었다. 그리고 그는 남부 주들의 자치권 강화에  반대하여 연방정부 강화와 관세율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특히 관세율 인상은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이 첨예한 갈등을 빗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방정부에서 남부가 부담하는 높은 관세를 통해 얻는 국고로 북부 산업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부와 남부는 노예제는 물론 관세, 횡단철도 건설, 외국 제조선박 불허 등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연방주의자들(공화당)은 관세율 인상, 횡단철도 건설, 외국 제조선박 불허 등을 밀어붙였고, 이에 남부지역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자치권을 확대하자는 입장에 서 있었다. 
즉, 남부지역에서는 "왜 우리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너희들이 쓰냐"며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에 당선 될 것 같지 않던 링컨이 상대편 두 후보의 표나눔으로 인해 당선이 되자, 남부지역의 8개 주가 봉기하게 됨으로써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4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1,2차 세계대전 때 죽은 미국인보다 많은 75만명 정도의 희생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특히 우세에 있던 남군이 밀리면서 남부지역은 초토화 되었다. 이에 대해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영화에서 자세히 나온다. 

전쟁 초기에는 남군이 우세를 보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의 지원을 이끌어낸 북군의 우세로 전환되었다. 북군의 우세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었다. 그런데, 이 노예해방 선언을 두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링컨을 추앙하는 즉에서는 노예해방선언이 인권의 역사에 기리남을 금자탑이라는 것이다. 반면 다른 주장으로 링컨의 정치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뿐, 숭고한 인권적 차원과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즉,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이 남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북군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언적 차원에서 "노예해방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북군과 연방정부로서 정책 시행이 가능한 북부와 남부의 경계지역 주는 제외하고 연방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남부의 주들에 한해서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는 점이다. 즉, 효력조차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는 것은 정치 전략적 "쇼"였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은 북군에게 중요한 두가지 힘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있던 영국 등 유럽국가들이 북군의 편에 서도록 했고, 또 다른 하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흑인들을 탈출시켜 남군의 힘을 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북군이 전세의 우위를 차지하고,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남북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북군은 남군과의 전투는 물론, 서쪽으로 진격하여 인디언들과의 전투를 진행했다. 특히 대륙횡단철도를 진행시키며 걸림돌이었던 중서부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추방시켜 나갔다. 북군들은 남부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그대로 인디언들에게 적용했다. 그 와중에 미국의 인디언 3대 학살사건의 하나인 샌드 크리크 학살사건이 터졌다. 

목사이기도 했던 키빙턴 대령은 다른 곳의 인디언들이 자신의 군대를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00명의 군대를 콜로라도 샌드크리크 인디언 야영지로 끌고 들어가 어린아이와 여자를 포함하여 16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또한 샌티 수족이라는 인디언들에게 2400만 에이커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하고 인수하기로 했지만, 연방정부가 부패해서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 사이 백인들이 지역에 들어와 거주하고, 그래서 샌티 수족 인디언들이 연방정부에 토지 대금을 달라고 했지만, 거부하자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링컨 정부는 잔인하게 진압하고 300여명에 달하는 인디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사형선고자가 최종적으로 39명으로 줄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이들에 대해 처형을 명령했다.   

또한 링컨은 재임중에 흑인들의 식민지 개척을 적극 추진했다. 즉, 링컨은 "흑인은 백인과 동등한 지역에서 동등한 직업을 갖고, 결혼하며 살 수는 없다"는 신념이 확고했으며, 따라서 최고의 정책은 흑인들만 살아갈 수 있는 외딴 섬 지역을 식민지로 개척해서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중남미 아이티 등의 지역을 식민지로 개척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링컨의 재임기간 동안 13000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이 투옥되고 탄압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위대한 미국의 초석을 닦은 링컨에 대해서는 노예해방선언을 한 인권주의자, 성자로 여기는 주류적 입장과 달리, "링컨은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는 연방주의자였으며, 노예해방선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정치전략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며, "링컨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언행을 서슴치 않았던 인종주의자였으며, 연방권력을 강화하려던 독재자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존재한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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