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는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 두개의 수레바퀴 역할을 했다. 인종주의는 식민지와 노예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한 이데올로기였다면, 민족주의는 내부 국민들의 역량을 동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즉 국민들의 민족의식, 주권의식, 자부심을 갖도록 해서 국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이를 밑바탕으로 식민지를 개척해 나갔던 것이다. 

서구에서 민족주의의 탄생과정은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과정과 일치한다. 기업으로 비교하자면, 개인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인기업에서 불특정 대다수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식회사"를 만드는 것처럼, 국가도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절대왕정에서 국민주권으로 확장하면서 국민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렸던 것이다. 절대왕정이나 왕조국가가 개인기업이라면,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는 국민이라는 주주가 형성된 주식회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구 중세를 이끌어왔던 보편적인 종교적 세계관이 몽골의 침략을 받고, 십자군 전쟁으로 서서히 몰락을 하는 시점에, 독립된 왕권들이 탄생했다. 특히 아비뇽 유수라든지 성공회 파문이라든지 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로마 카톨릭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제각각 왕권이 확립되면서 절대왕정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각 왕조는 시민들의 주권혁명 시대로 옮겨갔다.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청교도 혁명을 거치며 왕권을 제한하고 입헌 민주국가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국민주권이 강조되고, 국민들의 역량을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도 프랑스 혁명에 의해 절대왕정이 타도되면서 국민주권의식이 확립되고, 이로써 프랑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이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왕조를 타도하면서 국민주권시대를 열고, 그 밑바탕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주권시대를 열며 그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독일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개척의 현장에서는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국민국가로 발전한 만큼, 민족주의는 국민역량 동원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국민역량 동원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확장과 식민지 개척에 적극 활용되었다.  즉, 국가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갖게 된 국민(민족) 국가의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식민지를 침략하고, 착취하고, 노예를 부리는 일에 적극 나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즉, 민족주의 = 국가주의 = 인종주의적 성격을 갖는 괴물로 성장한 것이다.

이것이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쟁탈전,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7년 전쟁,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였던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민족주의는 처음 탄생한 것과 다른 천의 얼굴을 가진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식민지 쟁탈전 뿐 아니라, 7년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이라는 국제전쟁이  끊이지 않는 전쟁과 격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제국주의 후반기에 들어서며 민족주의는 또 한번 변신한다.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했던 민족주의는 이제 식민지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형태로 식민지 독립운동의 중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식민지의 자주독립 움직임에 기름을 붇는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피압박 식민지에서 민족주의에 의거한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서구에서는 제국주의적 침략이 마감되며 서서히 민족주의는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민 다문화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부활을 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며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국가와 인종주의에 대한 향수와 이주민에 대한 저주를 담아 끔찍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다른 한편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흥국가에서는 다시한번 민족주의가 부흥을 한다. 신생 독립국 지도자들이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국가주의 차원에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생국가의 엘리트들은 국가발전에 국민을 동원하고, 자신의 독재정권 유지의 정당화를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하고 있다. 

그렇게 서구를 지배하던 보편적 세계관인 카톨릭의 권능이 무너지고, 절대왕정으로 부터 시민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탄생했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인종주의로 변질되며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국가간의 전쟁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 독립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신생 독립국가의 독재정권 유지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의 또다른 얼굴이다. 시민주권과 자주독립의 논리뿐 아니라, 식민지 착취와 노예 지배, 그리고 독재탄압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렇게 천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는 침략과 전쟁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인 것이다.  

식민지와 분단국가라는 운명을 함께 진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는 굉장히 뿌리깊은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치하의 독립운동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해서 전개되었고, 남한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났고,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거기에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까지 더해져 민족주의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뒤덮고 있는 괴물이 되어 있다. 

특히 최근의 대한민국에서 민족주의는 정치투쟁의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주의를 국가 발전과 독재유지를 위한 국가적 국민동원에 활용하였으며, 그 반대로 김영삼, 김대중의 야당은 민족주의를 민주화투쟁의 수단으로, 북한의 김일성 당국은 민족주의를 반미투쟁과 주민결속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주로 "반일 반미 민족주의" 또는 "반중 민족주의" 형태로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가 처음 탄생했던 시민주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국가주의를 정당화하거나" 또는 "상대 공격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다양성을 질식시키고,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압박과 지배,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며, 정치세력들이 대중의 증오를 동원하는 파시즘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민족주의는 천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이상과 달리, 그 본질은 반평화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침략, 제국주의간 전쟁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대중적 증오를 동원한 정치수단으로 활용되며 국가주의, 지배체제 유지, 소수와 약자에 대한 증오와 공격을 정당화하는 "파시스트들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인 것이다. 

"정치세력과 대중에 의해, 폭력적 파시즘의 수단으로 변질된 민족주의". 이것이 현재 우리가 마주선 민족주의의 얼굴인 것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대중 증오의 정치화" 앞에서, 이성적인 개인의 창의와 정치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질식되고 무력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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