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인류의 역사를 다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과 대제국 건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진행된 300년간의 헬레니즘 시대였다. 물론, 이외에도 다문화가 꽃핀 시기는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와 세계제국 로마,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세민의 정관의 치)와 미국이 주도한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로마와 당나라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다문화 융합을 적극 권장하고 이끈 반면, 현대의 미국은 끊임없이 다른 집단에 대해 전쟁하고 배격하며 백인 중심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했던 사회였다. 그래서 앞의 시대는 적극적 다문화정책을 통해 문화를 융성시킨 시대였다면, 미국은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다문화 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알렉산더의 제국건설과 헬레니즘은 인류 역사에서 다문화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알렉산더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정책이 다문화에 열린 생각과 컨텐츠 융합적 사고를 했었고, 그의 생각이 이후 300여년간 헬레니즘을 꽃피우며, 서쪽으로는 로마시대를 열었고, 이집트 등의 아랍에서는 수학과 과학 천문학 등 각종 학문이 꽃피우고, 동쪽으로는 간다라 불상 등 찬란한 문화유산이 남겨졌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변방인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립포스 2세에 의해 그리스의 맹주로 등장하기 전의 마케도니아는 아테네 등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야만인들이나 사는 변방의 시골구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테베에서 인질로 생활하고 절치부심하며 선진적인 군사전략과 군비확충에 관한 연마를 한 필립포스 2세가 등장하면서 마케도니아는 일약 그리스의 맹주로 등장했다. 

그런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알렉산더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필립포스 2세가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를 버려두고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는 동명이인)에게 새장가를 들면서 알렉산더는 왕위계승조차 희망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출전했지만 패전장수가 되었으며, 아버지의 결혼에 반대했던 알렉산더 어머니와 함께 알렉산더를 유배시켜 버린 것이다.

하지만, 간신히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가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떠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올림피아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도 있고, 필립포스 2세가 새 장가를 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강렬한 도움으로 그는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 후 어머니는 필립포스 2세의 두번째 부인과 아들을 죽여버리고 섭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섭정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려던 어머니마저 죽여버렸다. 그토록 알렉산더는 권력과 전쟁에서는 잔혹했다. 그 이후에도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부하마저도 참수를 했을 정도로 "권력의 상대"에게는 결코 용서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그러나, 그는 항복한 자나 문화적인 분야에서는 대단한 포용력을 발휘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다리우스 대왕이 패한 후 가족마저 팽개치고 도망갔을 때, 그의 가족을 극진히 보살폈다. 그리고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도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또한 키루스 2세의 무덤을 복원해주었고, 저항하지 않는 정복민들에겐 한없이 인자했다. 
그러한 모습은 당나라의 정관의 치를 연 이세민이나 몽골제국을 연 칭기즈칸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는 그리스 맹주의 지위를 굳힌 후 동방원정을 떠나면서 명분으로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다. 또한 그리스 동맹군이 기나긴 원정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는 "세계가 다 우리의 고향"이라며, "세계시민국가"를 주창했다. 그는 원정하는 곳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함으로써 세계제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헬레니즘 시대를 주도하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가 그리스를 터나 페니키아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다리우스 대왕과의 수차례 결전을 치르며 바빌론과 페르시아 전역을 정벌했다. 그때마다 그는 선두에 서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수차례에 걸쳐 목숨까지 위태로운 부상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원정을 멈추지 않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펀잡지방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동성애 상대이자 사랑하는 부하였던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난 뒤 갑작스레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원인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난무한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고, 헤파이스티온에 대한 연민이 너무 심해 폭음을 하면서 열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 중 두번째 설이 유력하다. 

어쨌든 그는 죽기 전에도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적극적인 동서 문화융합 정책을 펼쳤다.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외지인과의 결혼을 장려했고, 그도 본보기로 페르시아 제후국 왕의 공주인 록산느와 결혼했다.  또한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를 출발하며 "헬레니즘의 세계화"를 주장했지만, 동방의 각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동서양의 문화에 대한 우열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또한 그리스 변방의 시골출신이었고, 아테네 등 그리스 본류들을 그다지 좋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그리스 동맹군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동서융합정책에서 그리스의 위치는 그다지 우위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푸대접한다고 생각해서 반란을 일으키기고 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 제국에서 그리스 어는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알렉산더가 죽은 뒤 장수들에 의해 건설된 4개국에서도 동서융합정책이 계승되었다. 그중 이집트를 차지한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가장 빛나는 문화를 창출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수많은 도서들이 집결되어 있었고, 각종 과학과 학문이 꽃피웠던 글로벌 도시였다. 알렉산더의 동방정벌에서부터 시작된 이 헬레니즘 시대는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1세기 전후까지 300여년간 지속되었다.

알렉산더의 영향으로 조그만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고, 주변지역을 야만인으로 생각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들은 주변 야만지역에 대한 배타적 생각을 버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세계시민주의적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폴리스 국가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개인중심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개인주의적 사고를 반영한 철학조류가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르스 학파"였다. 

스토아 학파는 개인의 행복은 이성적 절제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반면 에피쿠르스 학파는 개인의 행복은 쾌락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헬레니즘 시대에는 자연과학이 매우 발전하였다. 지구둘레를 정확히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 물에 뜨는 부력, 즉 비중의 원리를 밝힌 아르키메데스, 평면기하학의 에우클레이데스, 인체해부학의 헤로필로스 등이 이 시대 과학자들이었다.

또한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은 매우 역동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띄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오콘 군상"이라든지 "밀로의 비너스"는 이 시대 잘 알려진 조각들이다.  또한 헬레니즘 미술은 동양으로 건네져 불교 최고의 미술로 극찬되고 있는 간다라 불상들이 제작되었고, 한반도와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건축양식에서는 도리아, 이오니아식을 넘어 코린토스 양식이 유행하였다.    

이처럼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동서양의 양대문화가 혼합된 시대였다. 그래서 혼합문화의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즉, 알렉산더와 그 부하들이 동방원정을 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가져왔고, 점령지인 페르시아의 각종 물품과 제도가 그리스로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학문, 문화 예술의 수많은 원형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개인은 도시국가적 공동체 단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늘어나고, 더 많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 자유에는 내적이고 정신적인 자유뿐 아니라, 쾌락적인 자유도 포함되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고, 각종 공산주의적이고 몽상적인 사회개조설이 등장했다. 여성들의 지위도 매우 상승했다. 법률적인 보장은 없었지만, 여성 통치자들도 생겨났고, 남편과 별도의 재산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에서는 여사제들이 집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두 파트너의 간단한 서약으로 결혼과 이혼이 자유롭게 이뤄졌다. 

이처럼 알렉산더에 의해 열린 헬레니즘 시대는 다문화 융합의 시대였다. 그 다문화 융합을 통해 더 많은 자유와 창의가 발양되었다. 개인은 국가 공동체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으며, 노예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평민보다 더 많은 부를 누리기도 했다. 남녀의 평등권은 신장되었으며, 학문이 발전하고, 문화예술이 그 어느때보다 발달하였다. 알렉산더는 일찍 죽었지만, 그의 다문화 세계시민주의 국가 건설의 꿈은 인류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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