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30] 한반도 이주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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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30] 한반도 이주민의 역사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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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앞서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첫번째에서 우리 나라의 최대 성씨인 김씨마저 이주민 출신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결국 전세계 어느나라도 마찬가지듯이 원래부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이방인에서 주인으로 변한 셈이다. 원래 한반도에 거주했던 신석기 시대 남방계 아시아인을 지배하면서 들어온 북방계 유목민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인 셈이다. 

그 이후 한반도에서는 이방인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없는 이방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하고, 또 섞여서 역사를 만들고,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원 주인은 누구고, 이방인은 누구냐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이방인이었고, 모두가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25"에서는 우리나라 이주민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앞서 김씨조차 이방인으로 한반도에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말했듯이, 토착세력이라던 신라의 6부족 조차 "중국의 진나라 변방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주해왔더니, 마한에서 동쪽 땅을 떼어줘 살게 되었는데, 말이 진나라와 비슷해서 진한이라 불렀다"는  후한서의 기록으로 볼 때, 북방에서 이주한 집단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김씨는 물론 박혁거세를 왕에 추대한 6부족마저 실제는 한반도로 이주한 집단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신라의 또 다른 왕족인 석씨도 역시 이주민 집단이었다. 삼국사기 석탈해전으로 보면, 석탈해는 신라 동북에서 천리가 떨어진(경주에서 동북쪽 천리밖이면 일본 훗카이도나 사할린, 또는 연해주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다파나국 출신으로 나온다. 처음엔 김해의 금관국에 도달했으나, 사람들이 외면하고 진한의 아진포에 다다라 한 노파가 건져서 키웠더니 9척 장신으로 자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후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유리왕에 이어 신라의 4대왕으로 등극한다.  

그러고 보면, 신라의 토착세력이라는 6부족도, 시조인 박혁거세와 박씨도, 석씨도, 심지어 통일신라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대성씨를 형성하고 있는 김씨조차 처음엔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신라만 그런가 백제는 아예 졸본부여 출신의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만든 나라가 아닌가 그러고보면 백제도 결국 남쪽으로 내려온 북방 유목민 출신의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던 셈이다. 고구려 역시 북부여, 동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이 세운 나라였다. 결국 한반도 역사의 원류인 3국뿐 아니라, 금관 가야마저 모두 북방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인 셈이다.   

그렇게 한반도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3국, 아니 가야까지 더해 4국체제를 형성한 뒤, 통일전쟁을 통해 또 한차례 큰 변화를 맞는다. 신라에 의한 한반도 통일전쟁은 사실상 유럽의 국제전쟁에 버금가는 동북아의 국제전쟁이었다. 당나라와 신라가 횡적 연대를 형성하고,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일본(왜)가 종적 연대를 형성해서 맞붙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때 전쟁에 참여한 당나라에는 아랍에서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쪽 유민까지 더해져 있었다. 

이 국제전쟁에서 긴밀한 연대를 형성한 나당연합군이 느슨한 종적 연대를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를 각개격파하면서 승리를 했다. 왜와 백제부흥군의 연합군대를 금강 하구 전투(기벌포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백제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마저 무너뜨림으로써 나당연합군의 완전한 승리로 굳어졌다. 
하지만, 전승에 따른 이해관계충돌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평양 이남의 한반도에서 신라가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일대 국제전이 벌어진 한반도에서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현실화되었다. 전쟁에 투입된 군대만해도 양측 모두 합쳐 50만이 넘는 군대가 투입되었고, 백제와 고구려에서 당나라로 끌려간 유민만 20만이 넘었다. 그리고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에 투입된 군대가 20만을 넘었다.  또 수많은 고구려인,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총 100만 수준의 인원이 한반도 국제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던져진 셈이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살았던 총 인구가 250~300만 수준이었음을 볼 때, 얼마나 심각한 국제전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의 남쪽인 귀주성쪽의 소수민족에서는 한국의 된장과 비슷한 형태의 음식이 존재하는데, 이때 당나라로 끌려간 유민들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고구려에서 간 보장왕의 아들 약광과 그 후손들이 집단거주하는 고려군과 고마씨가 있고, 백제 성씨인 구다라씨가 존재한다. 특히 백제는 한반도와 일본, 발해연안, 해남도 근처에 걸친 국제연맹체였기 때문에, 백제 이주민은 역사적 밝혀진 사료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해외로 당나라로 이주한 이주민들에 대해 역사적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선지와 흑치상지의 경우가 그렇다. 고선지는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으로 진격하고 있는 아랍제국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천산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너무도 먼 변방에, 고산지대와 추위까지 겹쳐 큰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구려 유민에 고선지가 있다면, 백제 유민에서는 흑치상지가 있었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지만, 부여풍과 복신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죽이는 것을 보며 백제부흥의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돌궐 군대 등을 무찌르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동료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한다.   

삼국의 통일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잠잠했던 이주민은 통일 신라 말기에 또 한번 요동을 친다. 바로 당나라 중 후반기와 말기에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황소의 난으로 중국의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황소의 난은 동방기독교에 대한 당나라 황실의 편애와 동방 기독교의 부정부패에 분개하여 소금상단을 이끌던 왕선지, 황소 등이 난을 일으켰다. 

황소의 난은 본래 성격자체가 이주민들에게 분개하여 일으킨 농민반란이었기에 당나라에 가 있는 이주민 집단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신라방, 그 옆의 페르시아인 집단 거주지였던 파사방 등이 황소의 난에 직격탄을 맞았다. 실제, 황소의 난을 격퇴한 이극용도 투르크 계통의 이주민이 주축이된 군대였다. 이처럼 반 이주민 반란의 성격을 띈 황소의 난으로 이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에 이주했던 이주민들은 주변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신라에도 페르시아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또한 당나라에 진출했던 동방기독교도 발해, 몽골, 신라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발해 왕실의 사찰이나 경주 불국사 등지에서는 동방기독교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렇게 신라로 페르시아 상인들과 동방기독교도들이 몰려든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 처용설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페르시아가 종주국인 격구(말타고 하는 폴로경기나 도보로 하는 하키)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기마 격구는 고려시대 크게 유행했고, 무신들의 과거시험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격구놀이는 대폭 줄어, 명맥만 유지되었다. 또한 아랍 상인들도 이때부터 한반도에 밀려와 고려시대에 개성의 벽란도 등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수없는 이주민과 유민이 한반도로 밀려든 시기였다. 제일 먼저 밀려들어온 것은 발해 유민들이었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된 후, 발해 왕족을 비롯한 유민 3-5만 정도가 밀려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에 대해 고려에서는 발해의 "대(大)씨" 성을 써서 정착하게 했는데, 이들이 오늘 날 태(太)씨의 원류이다. 또한 신라말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아랍상인들이 개성 근방의 벽란도 등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살았는데, 이들이 대략 5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거란이 금나라에 멸망한 뒤 거란의 유민들이 대거 쏟아져들어왔다. 기록을 보면 거란의 유민들이 3-4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어 금나라와 몽골(원)이 무너지고, 이들 유민들도 고려로 몰려들었다. 조선시대 초 3-40만 정도포 파악된 백정(양수척, 화척)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 북방 유목민들은 한반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각종 문제를 일으켜 조정에서 큰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원래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 일반 양민을 두고 쓰는 말이었다.  조선 초기 세종 때, 정착하여 농사짓고 살지 못하는 양수척, 화척, 갓바치 등을 정착하고 살도록 주거지역도 마련하고, 백정이라는 명칭도 주며 거주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정주하지 못하고, 농사일도 못했다. 그들이 잘하는 것은 칼 쓰는 것과 가축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들 중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임꺽정의 난"이 그것이다. 

그 후 조선에서는 또 한번의 국제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찌기 서양과 교류를 하며 조총을 받아들이고 무장한 일본군과 명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맞붙은 것이다. 7년동안 한반도에 진주한 일본군만 30만이 넘었다. 명나라 군대도 1차 4만 6천명, 2차 10만명이 투입되었다. 거기에 조선군과 의병 등이 50만이 넘는 군대가 7년동안 조선의 땅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은 포르투칼과 네덜란드 등과 교류가 빈번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포르투칼 선교사가 왜군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와 살펴보기도 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조선인 포로중에서 이들이 서양으로 데려가 이탈리아에 정착한 조선인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처음으로 카톨릭 신자가 된 조선인 여성도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곧이어 조선에도 하멜 등이 표류하면서 한반도쪽으로 그 영향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어 벌어진 병자호란에서 많게는 10만에서 적게는 5만의 청나라군대가 진격했고, 조선의 항복으로 50만명 정도가 포로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앞서 서술한 백정들을 제외하면 거의 돌아왔으나, 일본으로 끌려간 10만명은 다시 돌아온 숫자가 6-7000명에 불과했다. 

특히,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은 일본의 도자기기술을 원조가 되었고, 극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되돌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당시 쇄환사로 갔던 이경직이 쓴 보고에 의하면, "왜경에 도착하니, 조선에서 끌려온 자들이 많았으나, 돌아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창원에서 온 김개금이란자에게 환국할 것을 간곡히 설득했으나, 조금도 마음이 없었고, 옆에 있는 왜인이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또한 청나라에 끌려간 백정(양수척, 화척)들도 조선으로 환국하길 원치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도망간 서울의 궁궐을 불태운 것이 노비와 백성들이고, 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하나같이 환국을 꺼렸던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이 평민들과 노비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임진 왜란 후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셈이다. 

두번에 걸친 큰 전쟁을 치르고서도 조선의 양반 지배체제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장자 상속제과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양반들의 지배체제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조정은 사색당파와 탁상공론으로 끊임없는 사화의 연속이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가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서양문물과 중국 혼란이라는 근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조선 말, 진주민란부터 홍경래란,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까지 민란의 연속이었고, 일본과 서양의 진출과 개항, 그리고 중국 청나라의 혼란으로 엄청난 이주민들이 또 밀려들었다. 

구한말과 일제 시대, 그리고 50년 6.25국제전쟁으로 한반도는 또 한번의 격동의 시기를 맞는다. 구한말에 중국의 혼란으로 인해 산둥반도 근처의 중국인들이 대거 밀려들어왔다. 쿨리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중국 화교의 원조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즐겨먹던 짜장면 등이 중국음식 아닌 중국음식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나라를 잃고 만주와 하와이 등지로 이주하였다. 또한 거꾸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진출한 일본인들도 많았다.    

특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또한번의 국제전쟁인 6.25는 전쟁에 투입된 양측의 군대만 200만 이상이 참전했고, 전사자만도 85만명(한국군 14만 7천, 미군포함 유엔군 3만 8천,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14만 8천)이고, 그 외 부상자, 포로, 민간인 희생자까지 더하면 350만이 넘는 인명피해을 입어야 했다. 이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피해규모로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3000만 중 1/10이 피해를 입은 셈이다. 

이렇게 전쟁참화 속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구이동이 현실화되었다.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고, 남에서 북으로 이주하고, 전쟁의 참화속에 생활은 쑥대밭으로 변해 각종 기록이나 제도가 무의미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구한말과 일제시대,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며, 한반도를 지탱해온 각종 사회제도와 신분제도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병자호란까지 거쳤음에도 더 강화되었던 조선의 신분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고도성장기를 거쳐 글로벌 경제시스템이 본격화되면서 90년대부터 새로운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이주노동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어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등으로 결혼이주여성들이 대거 입국하였다. 이렇게 밀려든 외국인, 외국출신 다문화 관련 인구가 전체 인구의 4%인 216만(2018년 말)을 넘어서고 있다. 이같은 이주민 수는 초 저출산 고령화 시대로 인해 더욱더 급속히 팽창해갈 것이며, 2030년엔 인구의 10%(500만)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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