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31] 우리사회 집시 유대인이었던 "백정"에 대한 조선의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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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31] 우리사회 집시 유대인이었던 "백정"에 대한 조선의 정책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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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지난 시간에 한반도 이주민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며, 한반도는 끊임없이 이주민이 밀려들어와 정착한 곳이고, 지금의 우리들은 그 후예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좀 특이한 존재를 이야기했다. 바로 농경민족화된 한반도에 전혀 이질적인 집단으로 "백정"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말했다. 그 숫자는 전국적으로 3-40만에 달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초기 인구는 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중 1/10일이 이방인인 "백정"이었던 셈이다. 지금 한국에 거주하는 다문화 관련 인구가 21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 정도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를 가면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백정이라는 이질적 집단은 지금의 외국인들보다 두배가 넘었던 셈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이들 백정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심지어 남정네들이 운동회를 보러 온 백정의 아내를 희롱하는 "백정각시놀이"에 대해 말하면서 우스게하는 소리도 나온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때는 이들이 반란의 한축을 형성하며, 백정에 대한 차별금지를 내세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시집을 갈 때 가마를 탈 수 있게 해달라든지, 장례를 치를 때 꽃상여를 멜 수 있도록 해달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렇듯, 백정이라는 집단은 조선사회에서 천민 중에 천민으로, 인도식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불가촉 천민'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혼인을 하면서도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장례를 치를 때도 상여를 멜 수 없었다. 또한 그들 중에서 양민들의 주거지를 돌아다니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고, 백정각시놀이는 그 중 하나였다. 또한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호적상에 붉은 글씨로 "백정"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들이 오랫동안 조선에 거주하면서 일반 백성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꺽정에 대한 그림에서도 많은 수염과 커다란 덩치 등은 일반 조선인과를 사뭇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조선 말 인천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자기 짐을 들어주려는 백정들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여러면에서 일본, 중국인과 다르다는 기록을 남겨놓기도 했다. 

그들의 기록에는 "조선 아이의 눈은 파랗고 머리색은 적갈색이며 상류층의 경우 서양인종과 비슷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다른 동양인들에 비해 수염이 많고,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며 "한국은 유난히 다인종성이 많은 나라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제물포에서 이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모습은 하나의 민족이 아닌 다양한 인종이 섞인 나라였던 것이다. 

그렇게 서양인들이 "다양한 인종의 나라"로 보게 된 것은 바닷가에서 일하던 백정들과 일반 백성들을 보고서 나온 평가인 것 같다. 요즘도 사람들은 덮수룩한 수염을 보면 "산적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토록 조선시대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말을 타고 도적질을 일삼던 "산적"이나 "백정"들에 대해선 일반인들도 전혀 다른 이질적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엔 틀림없다. 이들로 인해 골치를 썩었던 조선초기(세종, 성종 등) 역사적 사료를 살펴보자. 

먼저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세종 10년 윤4월 3일 기록). 황해도 감사가 강음현에서 도적질을 하는 신백정(백정은 고려시대까지 양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이질적인 집단인 화척, 양수척 등을 백정으로 부르드록 배려하고, 일반 백성과 어울려 농사짓도록 장려했는데, 그러다보니 이들을 신백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일반 양민은 백성으로 되고, 백정은 화척, 양수척이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을 물리칠 방도를 아뢰었다. 

"강음현 천신사의 탑재에 신백정 20여명이 있는데, 말을 타고 불을 지르며 도둑질을 하므로, 고을 수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여 잡으러가서 적과 만났는데, 남녀 10인이 다 활과 화살을 차고 활을 쏘며 항거하였다. 도적의 남자 1인을 죽이고, 또 남녀 7인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 한 여자는 남자의 옷차림이었다. 또 남자 2인은 개성 왕흥산으로 도주하여 따라갔으나 잡지 못하였다."

"또 평산 원적동 산봉우리에 말탄 도적 8인이 있었는데, 다 활과 화살을 차고 있었으며, 횃불 한 개를 들면 배천 호국산 동쪽 봉우리에서 또 횃불을 들어 호응을 합니다. 이들을 추격하면 모두 개성쪽으로 달아납니다. 이것은 개성에 사는 백정과 재인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품위가 올라와 병조에 내리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세종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세종 17년 8월 2일). 
신백정이 도적질하는 것은 경기도뿐만 아니라 다른 도에도 그러한데, 그것은 오로지 말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패에 속한 사람들의 말은 낙인을 하도록 하고, 강제로 내팔도록 하여 도적이 되는 시초의 경로를 근절시키도록 하라"고 형조에 명했다. 

그러자, "신백정이 모두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고, 생업에 안정되어 살기를 평민과 같이하는 사람도 자못 있으니, 말을 다 팔도록 하면 억울함이 클 것입니다, 향후 도적질이나 거지질을 하는 사람은 시위패에 속하거나 말거나 모두 상정소에서 처리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는 구절이 나온다. 

어찌되었든 조선 초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사일에 종사하지 않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도적질을 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이질적인 집단이 존재했음엔 틀림없다. 그들이 전국적으로 3-40만에 이르렀으니, 인구 비중에서 절대 무시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이 어디에서 온 존재인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중 고려시대 중, 후반 거란과 금나라, 그리고 몽골(원)이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들 이주민 집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꽤나 골치를 썩이며, 노력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첫번째 일환으로 한 것이 일반 양민과 같은 호칭인 "백정"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했고, 그들에게 일정한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지어 생업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의 내용을 보자(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0월 8일).
"재인과 화척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데 칭호를 백정이라고 하고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주어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사냥하는 부역과 유기와 피물과 말갈기와 말총 등의 공물을 면제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고, 이리저리 유이하는(돌아다니는) 자는 호적을 상고하여 본거지로 돌아가게 하며..."

이렇게 조선 조정에서는 백정들이 일정한 주거지를 갖고 농사를 짓고, 생업에 안정적으로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럼에도 백정들은 농사짓기보다는 어울려다니며 사냥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곤 했다. 이렇게 조정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별 실효가 없자, 다시금 고을 수령들을 독려하며 백정이 생업에 정착할 수 있도록 감시 감독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종실록의 내용이다(세종 19년 7월 28일).
"삼가 원육전과 속육전에 신백정을 구처하는 법을 보니, 지극히 자세하게 되어있는데도 각 고을 수령들이 예사 글로만 보고 살펴서 행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유이하기도(돌아다니기도) 하고, 떼를 지어 도둑이 되기도 하여 옛 습속을 고치지 못하는 자가 종종 있습니다. 비옵건데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신백정을 추쇄하여 각 동리에 나누어 배치하고, 매달마다 돌아다니면서 규찰하여 매년 감사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소서."

그럼에도 백정의 무리들은 일반 평민과 섞여 살지 못하고, 농사일에 종사하지 않고, 집단으로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래서 문종, 세조 때도 골치를 썩이다가 성종 때 이르러서는 백정은 한양에 살 수 없게하고, 교화의 방법으로 군역에 종사토록 노력했다. 

성종실록 252권, 첨지중추부사 김영유의 상소와 허락을 기록한 내용이다. 
".....우리나라 재인과 백정은 그 선조가 오랑캐 종족입니다. 그래서 비단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쏠뿐 아니라 천성이 모두 사납고 용맹스러워 짐승을 잡는데 익숙합니다. .... 삼가 원하건데, 조관을 나누어 자세하게 추쇄하여 재주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성명과 장부에 기록하여 군정으로 보충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지만, 이들에게 군역을 담당케 한 것도 별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정규군대라는 것이 비적떼와 달라서 규율이 엄격해야 하고, 질서있는 전진과 후퇴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의 성격은 정규군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 사이 평민들과 백정들은 섞일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경원시하고 싸움이 빈번했다. 

그런데 이번엔 조정에서 농사에 필요한 소를 잡는 행위를 금하였다. 즉 ,도축을 불법화한 것이다. 그러니 양민들은 도축에 종사하지 않았는데, 이들 백정들이 집단으로 모여살며 불법화된 도축을 통해 부를 축척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따로 분리 거주하며 도축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백정"이라는 말이 통용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차별이 계속되면서 백정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명종때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이었다. 

그럼에도 백정에 대한 조선 조정의 정착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100여년이 지난 16세기에 와서는 도적질과 살인 방화 등 백정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전쟁과정에서 백정이 많이 사라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불법적인 도축일을 하면서 양민들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는 백정들도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에 의해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도 늘어났다. 구 한말과 일제초기에 벌어진 형평사 운동이 그것이다. 

이런 조선시대 백정의 모습은 서구 유럽의 집시나 유대인과 종종 비교되곤 한다. 집시나 유대인들의 유럽생활은 조선시대 백정의 삶보다는 훨씬 더 비참했다. 조선에서는 토지도 주고 농사에 대한 생업도 장려한 반면, 유럽의 집시나 유대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권리도, 직업을 가질 권리도 박탈당한 채,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탄압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중세시대 영주들은 마을에서 사건 사고만 나면, 정치적 궁지에 몰리면 유대인과 집시들에게 책임을 물어 탄압했다. 예를 들어 마녀사냥이 그것이다. 즉, 자신의 영주지에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유대인과 집시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유대교, 집시들은 그들의 정령)를 고집한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어 그들을 마녀로 몰아 불에 태워 죽였다. 특히 집시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히틀러 역시 유대인만 탄압한 것이 아니라, 집시들도 유대인에 끼워넣어 탄압했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때 죽은 집시의 숫자는 100만에 육박한다고 한다. 즉, 홀로코스트의 전체 희생자 600만 중에서 100만 정도가 집시였던 것이다. 최근에 와서 유럽의 국가들은 집시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이들에 대한 민간의 차별은 여전하다. 

따라서 유랑집단인 "백정"과 "집시"에 대한 정책에서 유럽보다는 조선이 훨씬 더 선진적이며 인권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살인, 강도, 도적질 등으로 잡아들인 범죄자 370여명 중 백정이 그 절반을 차지했다"는 기록을 볼 때, 조선의 이주민 집단 "백정"은 결코 유럽의 집시보다 훨씬 못돼먹은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정은 근 100년에 걸쳐 동화노력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고, 후기에 들어서는 "백정" 관련 보고가 사라지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결과로 백정출신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제중원을 만든 최초의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서양 박사"도 배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조선말과 일제시대를 경과하며 이주민 집단으로서의 "백정"의 모습보다는 법에서 금지한 불법적 도축을 하는 특정 직업군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백정들이 불법 도축으로 돈을 벌자 양민들 중에서도 "백정"으로 신분을 속여 가축을 도축하는 이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이주민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백정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으로 판단된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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