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2] 다문화 인물 열전1(석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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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2] 다문화 인물 열전1(석탈해)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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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37편부터는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다문화 인물들에 대한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려고 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토종 성씨라고 이야기하는 김씨조차 이주민이었다는 것을 말했다. 어찌보면 고구려의 주몽도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이주한 이주민이었고, 백제의 소서노와 비류 온조로 이주민출신의 왕이었다. 또한 신라의 원형을 이루는 진한의 6부족 역시 중국 진나라 북방에서 살고 있었던 진나라 이주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주민으로 들어왔던 사람들 중심으로 다문화 인물 열전 시리즈를 진행해보려고 한다. 그 첫번째 인물로 신라의 4대 임금 석탈해와 가야 김수로왕비인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신라의 4대 임금인 석탈해와 관련한 일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다. 그는 신라 2대 임금인 남해 차차웅의 사위로 3대 임금 유리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와 관련한 일화는 대략 4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신라에 도착하게 된 과정과 다른 하나는 신라에 자리잡는 과정, 그리고 수로왕과 왕위를 다투는 과정, 그리고 왕위에 오르고 죽은 뒤 관련한 일화이다. 

먼저 그가 태어나서 신라에 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리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을 맞이해 처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이 이를 버려야한다."라고 말했다.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고 바다에 띄워 가는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국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구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시조 박혁거세가 즉위한 지 39년 되는 해였다. 이때 해변의 노모가 줄을 가지고 해안으로 당겨 함을 열어 살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할미가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9척이고 풍채가 훤하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이가 말했다.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가 없는데, 처음 함이 도착했을 때 까지 한마리가 날아 울면서 이를 따랐으니, 마땅히 작(鵲)자에서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아야 한다. 그리고 둘러싼 함을 열고 나왔으니, 탈해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아 어미를 공양했는데,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미가 말했다.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이하니 배움에 정진해 공명을 세워라." 이에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바라보고 길지라고 여겨 속임수를 내어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다. 이곳은 뒤에 월성(신라초기 왕성)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왕은)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탈해 이사금은 남해왕 때 가락국 바다에 닿았다. 수로왕과 신민들이 함께 큰 북을 치며 마중하려 했으나, 배가 곧바로 달아나 계림의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이는 탈해가 가야에 도착해 수로왕과 왕위를 다투다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진포에는 혁거세의 고기잡이 어미인 노파 '아진의선'이 살고 있었는데, 마침 탈해의 배를 발견하였다.

배를 기슭으로 끌어올려 안을 보니, 길이 20척에 너비 13척이나 되는 궤짝이 한 개 실려있었다. 아진의선이 그 배를 끌어다 수림밑에 두고 궤의 길흉을 점쳐본 뒤 뚜껑을 열었다. 그 궤짝안에는 용모가 단정한 동자 하나와 7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했다. 그 동자를 집으로 데려와 후히 대접했는데, 7일간 대접을 받은 동자가 노파에게 말했다.

"나는 용성국, 또는 정명국, 완하국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8명의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인간의 태내에서 태어나 5-6세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 함달파왕은 적녀국의 왕녀를 맞이했는데,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지요." 

"그러나 7년 뒤에 알을 하나 낳으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인간이 알을 낳는다는 일은 고금에 없던 일로서 불길한 징조라고 화를 내고, 궤짝을 짜서 그 안에 알을 넣고 일곱가지 보석과 노비를 배에 실어 정처없이 흘러가게 했습니다. 그 알에서 나온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인연이 있는 곳에 도착하거든 나라를 세워달라고 빌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수호해주면서 여기까지 끌고 와 주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을 만들고 7일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이 있어 오래살만한 지세였다. 내려와 찾으니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고 이튿날 아침에 그 집에 가서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이에 호공은 그럴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다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동자에게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땅을 파보면 알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이 탈해의 지혜가 뛰어남을 알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하니, 이가 아니부인이었다. 그리고 탈해는 궤짝 뚜껑을 열고 나왔기에 이름을 탈해라고 지었으며, 또한 까치에 의해서 아진의선에게 배가 발견되었기에 까치작(鵲)에서 새조(鳥)자를 빼고 석(昔)을 성으로 삼았다. 그가 3대 유리왕에 이어 임금에 오르니, 4대임금 탈해 또는 토해임금이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이 때(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운 후) 갑자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아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9척이고 머리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탈해가)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 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이렇듯 신라의 4대 왕 석탈해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역사학자들은 새로운 석씨 왕조를 연 석탈해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른 지역은 일본으로부터 동북쪽 1천리라고 했으니, 그곳은 지금의 훗가이도나 사할린과 연해주, 캄차카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지역에 거주했던 인종은 아이누인이었기 때문에 석탈해가 아이누출신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문화인류학자인 김화경교수의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캄차카 반도의 카멘스코예라는 해변마을에 석탈해 신화와 비슷한 설화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안가에서 어로작업을 하며 생활하는 미티는 남편인 쿠이키나쿠(큰까마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정부(情夫)인 바크팀티란(까치)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티와 바크림티란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쿠이키나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쿠이키나쿠가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미티가 나오지 않자, 불을 지펴 침실로 연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외간남자인 바크팀티란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미티는 두 개의 알을 임신했고, 그것이 두명의 인간으로 바뀌었다. 쿠이키나쿠의 집에서 바크팀티란의 두 아이를 양육하던 미티는 쿠이키나쿠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두 아이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그 집을 떠나버렸다." 

또 일부에서는 석탈해와 관련한 불교 일화들로 인해 석탈해가 허황옥과 같은 인도 드라비다 출신이 아닌가 하는 추론도 하고 있다. 즉, 다파나국이라든지 석탈해라는 이름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인도나 불교와 연관된 국명들이고, 배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를 지나 한반도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타밀어에서 석자를 쓰는 경우가 대장장이를 의미하고, 또 이사금 등이 왕을 뜻하는 말로 석탈해의 신화는 인도 타밀지역의 언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불교 관련은 불교가 도입된 후 각색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기 때문에, 석탈해의 출신지역을 인도와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즉, 석탈해 신화가 신라의 불교 전래 이후 원래의 신화에 불교관련 용어들이 첨부되어 각색됨으로서 인도지역의 언어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 외에 석탈해는 지금의 산동반도 위쪽인 발해만 서쪽에 위치한 예족(예맥족의 한 종족)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곳에 있는 예성현이 용성국이며, 석탈해의 성씨인 옛석(昔)은 사실 예족의 예라는 글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석탈해가 경주 아진포에 도달하기 전에 김해지역을 먼저 도달했다는 것은 삼국사기 대로 동북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남쪽 해안에서 올라온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 외 소수이긴 하지만 석탈해의 석씨가 페르시아의 속주였던 소그디아왕국의 성씨 또는 갈족의 성씨이기 때문에 소그드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석탈해가 대장장이 출신이라고 하고 호공의 집을 빼앗은 것과 석씨가 갈족의 성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도 소그드나 갈족의 석씨는 돌석(石)자를 쓰는 석씨이고, 석탈해의 석씨는 옛석(昔)자를 쓰는 석씨이기 때문에 억지 주장이라는 비판이다. 

또 다른 해석은 석탈해는 경주에서 먼 곳이 아니라, 울산지역에 근거지를 둔, 철기로 무장한 해양세력이었으며, 해상 무역을 가지고 김해지역과 경쟁을 하다 밀린 세력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 근거로 신라의 당시 철이 생산되었던 곳이 김해와 울산지역이었고, 또 울산이 해양 진출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성장한 석씨세력이 김해쪽으로 진출해 가락국과 경쟁을 하다가 신라쪽에서 거점을 확보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어쨌든 석탈해는 신라가 박씨 중심의 세력에서 새로운 철기 세력이 결합됨으로써 다시 한단계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석탈해의 재위시절 백제나 가야 등 서쪽에 대한 신라의 군사공격이 많았고, 또 석탈해 사후에도 여러 일화를 통해 신라의 수호신으로 역할을 자처했던 일화들이 그것을 증빙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로 증명될 수 있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64년 백제군이 와산, 구양의 두 성을 비롯해 이후 4∼5회 공격해왔다.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의 인척으로서 주,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군주라 이름하였다.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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