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3] 다문화 역사 인물 열전 2(허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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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3] 다문화 역사 인물 열전 2(허황옥)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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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우리나라에서 다문화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사람이 바로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다문화 활동과 연구가 주로 결혼이주여성이 본격화된 19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역사적 사료에 의해 최초의 결혼이주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빠짐없이 하게 된 것이다. ​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허황옥 외에 결혼이주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들은 수없이 많다.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던 원나라 공주들도 따지고 보면 결혼이주여성들이고, 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도 그렇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략결혼에 의해 국가간 결혼을 하게 된 경우도 따지고 보면 결혼이주여성이었던 셈이다. 

그럼에서 김수로왕비인 허황옥이 거론되는 것은 머나먼 이국땅으로 시집을 오게 된 과정이나 정착과정이 결혼이주여성들이나 내국인들에게 친근하게 알려줄 수 있는 컨텐츠일뿐 아니라, 정착과정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다문화 관련 많은 글들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나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 보다는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된 것 같다.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최초로 전하고 있는 사료는 고려시대 때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기이편 2에는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락국기 문종조 대강 연간에 금관지주사로 있던 문인이 찬술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건무 24년 무신년(기원후 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조알할 때에 아뢰어 말하기를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궁중에 드려 배필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김해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수레하래의 나라이다)로 가게 하였다. (그러자)홀연히 바다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진홍빛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에 불을 피우고 곧 물을 건너 유지에 내려와 앞 다투어 달려왔다. 

신귀간이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구간 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노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갖추어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고 들어가려 하였다. 이에 왕후가 말하기를 "나와 너희들은 평생 알지 못한 터인데, 어찌 경솔이 따라가겠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유천간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였다. 이에 왕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관리들을 거느리고 궁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의 주변에 가서 장막으로 된 임시궁궐을 설치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너머의 별포의 나루터에 배를 매어두고 육지로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나라로부터 시종하여 온 신하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와 조광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아내 두사람은 모정과 모량이라 불렀다. 혹은 노비가 도합 20여명이 있었고, 가지고 온 각종 비단과 의복, 금, 은, 주옥과 각종 구슬과 보배로운 기물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차 왕이 있는 행재소에 가까이오자 왕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으로 들어왔다. 따라온 신하와 그 아래 물리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관원에게 명하여 따라온 신하 부부들을 인도하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는 한방에 대여섯명씩 안치시키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하며 의복과 비단과 보물들까지 주고 많은 군인들을 내어 보호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 왕과 왕후가 침전에 들었는데, 왕후가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본래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고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중에 부왕이 황후와 더불어 말씀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제 밤 꿈에 똑같은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황천상제가 가락국 원군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고 하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이제 너는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서 멀리 증조를 찾아가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 아득히 반도로도 가 보았습니다. 이제 보잘 것 없는 얼굴로 외람되게 용안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왕비를 맞이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듣지 않았다. 지금 현숙한 그대가 저절로 왔으니, 이 몸에게는 다행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동침하여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내었다. 이에 드디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 때, 뱃사공 15인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수레를 돌릴 때 왕후와 한 수레를 탓으며 따르는 신하와 부부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수레를 탓으며, 중국의 여러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때를 알리는 물시계가 오정을 가리키려고 했다. 왕후는 궁중에 거처하게 하고 따라온 신하 부부와 그들의 사속들에게는 빈 집 두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종자들은 이십여칸 되는 빈관 한 채에 사람 수를 적당히 배정하여 안치하고, 매일 풍부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또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품들은 내고에 두어 왕후가 사시로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간들은 모두 일반 관료들의 우두머리지만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미천한 촌 사람들의 이름이요 고귀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칭호가 될 수 없으니, 만일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마침내 아도를 아궁으로, 여도를 여해로, 피도를 피장으로, 오도를 오상으로 고쳤다.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글자를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 유공과 유덕으로 하고 신천은 신도로 오천은 오능으로 고쳤다. 신귀의 음은 그대로 두고 훈을 고쳐 신귀(臣貴)라 하였다. 그리고 계림의 직제를 휘하여 각간, 아질간, 급간의 등급을 두고 그 아래의 관료들은 주와 한의 제도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옛 것을 고쳐 새 것을 세우고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도리이다. 

이로부터 나라와 집안이 질서가 있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아니하여도 잘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마치 하늘이 땅을, 해가 달을, 양이 음을 가진 것과 같았으니, 그 공은 도산씨가 하를 돕고 도당씨의 딸들이 요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해마다 용맹한 아들을 나을 길조의 꿈이 있어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니 나이가 157세였다. 국인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과 같이 통탄하면서 구지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하여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멋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하며, 진홍빛 깃발을 달고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하였다. 

함께 왔던 신하 천부경 신보와 종정감 조광 등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으며, 부부가 모두 일이년을 지나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노비들은 온지 칠팔년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다만,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서 모두 고향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었다. 그들이 살던 빈관은 한 사람도 없이 텅비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세간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예를 들면 허황옥의 오빠로 알려진 장유화상에 대한 이야기다.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빠로 허황옥과 함께 들어왔는데, 가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해준 인물이다. 그는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낳은 일곱  아들을 데리고 가야산에서 도를 닦고 신선이 되었으며, 일곱아들은 지리산 칠불암을 짓고 수행한 수 성불하였다고 이야기한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는데, 첫번째 아들 거등은 김씨 성으로 대를 잇게 하여 태자가 되게 하고, 두 아들에게는 허씨 성을 주어 허황옥의 후손을 잇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또 딸 하나는 신라 석탈해에게 시집을 보내고, 또 다른 딸은 왜로 가서 여왕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리고 허황옥 무덤의 비문에는 "보주태후"라는 시호가 쓰여져있다. 또한 허황옥이 들어올 때 배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전하고 있으며, 쌍어문양에 관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여기서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두고 대표적으로는 두가지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즉, 허황옥이 김해가 아니라 중국이나 동남쪽에서 가야로 온 세력이나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그녀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는가에 대해선 "신빙성이 없다"는 견해와 "충분이 근거있는 이야기"라는 두가지 견해로 나뉘는 것이다. 

먼저, 근거가 없다는 견해를 보자. 
허황옥의 인도 아유타국 유래설이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가지 근거를 든다. 먼저, 당시든 그 이후든 인도에는 아유타국이라는 나라이름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요디아라는 지명도 국가가 아니라, 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 겐지스강 중상류 지역인 아요디아에서 1달 정도 배를 타고 김해에 도착한다는 것은 당시 항해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가야 불교의 전래과정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장유화상 등 삼국유사에 없는 이야기가 김해김씨 세보 등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수없는 각색과정을 통해 지어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일이고, 백제는 침류왕 때 전진의 아라난타에 의해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는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전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 신라 백제보다 훨씬 뒤쳐진 가야에 이들보다 300년이나 앞서 48년경에 허황옥과 함께 들어온 장유화상에 의해 불교가 전해지고, 또 허황옥의 일곱아들이 모두 지리산으로 들어가 성불했다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불교 사찰이 산으로 들어간 것도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정책에 의해서 산으로 들어갔을 뿐, 그 전에는 평지와 도시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국 지어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반면, 허황옥의 유래가 역사적으로 어느정도는 실제적 진실에 입각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이다. 김병모 교수 등이 주로 주장을 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허황옥이 왔다는 아유타국은 겐지스 상류의 아요디아를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 아요디아는 기원 전후로 매우 흥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황옥의 상징문양인 쌍어문양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앗시라아의 상징문양이지만, 지금도 겐지스 중상류 지방인 아요디아를 가면, 쌍어문양이 대표적인 상징문양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파사석탑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기를, 허황옥이 금관국으로 가려고 배를 탓지만 바다의 신이 노여워해서 되돌아갔다. 그래서 허황옥의 아버지가 이 탑을 싣고 가면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해서 배에 싣고 왔다. 그랬더니, 배가 안전하게 금관국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황옥의 무덤 비문에 "보주태후"라는 시호가 있는데, 이는 중국 사천성의 안악현의 옛이름으로 주나라시대 보주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추정해 볼 때, 허황옥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을 다스리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의 쿠샨왕조(또는 월지국)의 침입으로 그 집안이 중국 사천성 보주라는 곳으로 이주해오고(사천성에는 보주허씨를 쓰는 직책과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거기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양자강 하류(무한)쪽으로 강제이주 당하게 된 후, 김해의 금관가야쪽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아요디아에서 사용된 쌍어문양이 사천성 보주에서도 쓰이고, 김해와 일본 규슈지방에서도 상징문양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파사석탑도 실제 한반도에서는 나오지 않는 돌의 재질을 가지고 있어, 페르시아나 인도쪽에서 전해온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실제 파사석탑의 "파사"라는 용어가 페르시아를 가르키는 일반용어이기 때문에 인도 페르시아쪽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삼국유사에 전하는 허황옥의 신화에 대해 지금까지 대립되는 두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 허황옥이 중국이나 동남지방에서 한반도 남부로 진출해온 세력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장유화상 등에 의한 불교의 전래와 일곱아들의 성불 등은 심각하게 각색되고 덧붙여진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해김씨 세보에 전하고 있다니,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족보와 세보는 조선의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각 문중에서 족보만들기가 성행하면서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지어낸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황옥의 불교 관련 일화에 대해선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되나, 허황옥이 중국이나 동남지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세력임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당시에도 김해가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허황옥은 중국 해상 무역세력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이다. 그것은 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은 뒤 관직 등을 주나라의 관직에 맞추어 개혁했던 것과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중국의 보물들을 볼 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양자강 하류지역에 근거지를 둔 허황옥의 해상무역세력의 원 주거지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인도 상인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중남쪽에 위치했던 참파국 등의 출신이었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파사 석탑 등에 대해선 신라에 불교가 받아들여진 법흥왕 이후에도 얼마든지 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전해졌을 수 있기 때문에, 파사석탑을 근거로 허황옥의 실재를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주장일 수 있다.   

따라서 허황옥이 [한반도 최초의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주장은 불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덧칠된 각색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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