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4]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3(글로벌코리아의 원조 광종의 개혁정치와 쌍기, 채인범 등 귀화관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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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4]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3(글로벌코리아의 원조 광종의 개혁정치와 쌍기, 채인범 등 귀화관료들)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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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조선을 건국한 것은 태조 이성계이지만, 조선의 국가적 기틀을 잡은 것은 3대 태종 이방원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신권을 중심으로 조선의 국정이 펼쳐지기를 원했던 정도전에 맞서 2차례의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 권력을 움켜쥔 태종 이방원은 집권 초기 각종 개혁정치를 펼치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정도전 중심의 신권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왕조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신권에 대한 지나친 경계의식으로 외척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해 자신의 처가인 원경왕후의 친정 오누이뿐 아니라, 며느리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친정집의 뿌리까지 파헤치는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하지만, 태종의 잔인한 피의 숙청으로 인해 왕권의 기반이 확고해졌고, 그 이후 등장했던 세종의 인덕(仁德)정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평가가 있다. 

이러한 태종 이방원과 닮은 사람이 고려에 있다. 바로 고려의 4대 임금 광종이었다. 광종은 태조 왕건의 3남으로 3대 정종의 동생이자,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이다. 태조 사후 나주 오씨의 소생인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정종(왕요)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이에 측근 박술희와 왕규 등이 정종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지만 시행치 않고 있다가, 정종이 종친호족으로 서경에 근거지를 갖고 있던 왕식렴의 도움으로 박술희를 처형하고, 왕규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정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서경천도 실패 등으로 병을 얻어 죽게 되자 광종(왕소)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광종은 군사적 기반이 없이 집권한 혜종과 종친 왕식렴의 도움으로 집권한 정종과 달리, 충주에 확고한 기반을 둔 외가와 황해도에 기반을 둔 대목황후 황보씨를 처가로 두어 확고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정치적 기반을 근거로 왕권강화와 호족세력을 억누르는 개혁 전제정치를 펼쳤다. 

광종의 대표적 개혁정치로 "노비 안건법"과 "과거제도 시행"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분야가 또 하나 있다. 과거제도 시행과 맞물려진 이야기인데, "쌍기"와 "채인범"등 외국인 관료를 적극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쳤다는 것이며, 이러한 해외 인재 영입으로 고려가 송나라 등의 문물과 대등할 정도로 고려의 문물을 한 단계 높여놨다는 사실이다. 

광종은 즉위후 곧바로 연호를 "광덕(光德)"이라고 짓고, 7년 후엔 노비해방에 가까운 "노비 안건법"을 시행하였다. 노비안건법은 양민이었던 사람이 각종 난과 전쟁으로 인해 노비로 추락한 양민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고려 개국 공신들과 정면충돌이 불가피한 조치였다. 따라서 광종의 조치에 대한 호족들의 반발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부인인 대목황후 집안을 비롯해 호족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광종은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어 후주에서 사신으로 들어온 설문우를 따라 들어온 쌍기(雙冀)를 한림학사로 중용하고, 문한에 대한 직권을 맡겼다. 그 후 쌍기는 과거제도 시행을 건의하자, 이를 시행하며 쌍기를 지공거(과거제도 시험관)에 임명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귀족집안 자제면 당연히 보장되는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이고, 전쟁과 파벌투쟁으로 밀려난 재야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호족(귀족)들에겐 노비 안건법보다 더 치명적인 조치였다. 

쌍기 이후에도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는 고려 중기까지 귀화 외국인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권문세족 출신들이 독차지하던 벼슬길이 막히고, 시, 부, 송 및 시무책을 시험하여 관료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고려의 문치주의가 강화되고, 학문의 발달이 급속히 이뤄졌다. 이후 문종 대에는 과거시험 응시자에 대해 "성씨"를 가지고 있는 자로 한정하게 되어, 성씨제도의 발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료들이 광종의 친위세력이 되었고, 권문세족의 권세를 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과거제도는 고려는 물론,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고, 일제시대에는 고등문관시험(고등고시)으로, 현재는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등의 고시제도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광종의 개혁정치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쌍기와 같이 송나라와 발해, 거란 등에서 고려에 귀화한 귀화 외국인들이었다. 이에 대해 충선왕 때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충선왕이 "우리나라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은 "광종 이후 문교를 닦아 서울에 국학(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글 읽은 소리가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물론, 이제현 등은 쌍기의 벼락출세에 대해 좋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즉, 쌍기의 문향이 그리 높지 않았고, 또 광종에게 직언보다는 참소를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는 쌍기 등 귀화 외국인이 중용되었던 것에 대한 권문세족으로서의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쌍기를 등용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한 것은 호족을 억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려는 광종의 개혁정치로 보면 '신의 한 수'에 가까운 절묘한 수였다. 

그것은 2002년 월드컵을 앞 두고 대한축구협회에서 국가대표 감독에 '거스 히딩크'를 임명한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즉, 기존의 축구 명문대의 입김과 명성, 그리고 연고주의를 타파하고 오직 체력과 실력으로 선수를 선발함으로써 한국축구를 한단계 도약시키고, 월드컵 4강에 이르게 한 것이 '거스 히딩크 감독' 영입이었던 것이다. 또한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히딩크의 리더십을 배웠던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를 일대 혁신할 수 있었던 것도 베트남 축구에서의 연고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개혁군주였던 광종은 귀화 외국인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호족 중심의 고려를 일대 혁신할 수 있었으며, 쌍기의 중용을 보고 몰려오는 외국 인재들을 등용함으로써 문물의 선진국이었던 송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중 관료가 된 사람은 쌍철(쌍기 부친)과 채인범 등 주로 후주나 송나라 출신들 40여명이나 되었다. 반 이상은 문인 계통이었고, 절반 정도는 상인, 음악, 승려, 역관, 의술, 무예, 점성술, 등 특수직이엇다. 그리고 발해나 거란 출신들은 무인이나 기술자로 중용되었다. 

그 중 재상급으로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을 보더라도 거란 출신 위초, 발해출신 유충정, 쌍철, 호종단, 임완, 등 10여명이나 된다. 또한 거란출신 기술자들도 적극 받아들여 고려의 국력을 한단계 높이려 애썼다. 이에 대해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출신 수만명 가운데 1/10은 기술자들이다.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종의 외국 인재 영입과 과거제도 시행은 고려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발해 왕자인 대인선의 아들 대도수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압록강변의 안융진에서 군사 수천여명을 가지고 30만 거란 침략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서희의 담판"을 가능케 했다.  또한 채인범의 아들인 채충순은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반역을 제압하고 현종을 옹립한 후,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왕의 나주 몽진까지 수행하며 전선을 지휘하여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최종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공신이다. 

또한 권문세족을 누르며 시행한 광종의 개방적인 개혁정책은 세계국가로서의 고려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고하게 자리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종 이후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성종과 목종, 현종 등도 광종의 개방적 개혁정책을 지속시킴으로써 고려의 뛰어난 도자기 제조와 옷감 기술이 유지됨으로써 수많은 상인들이 고려를 드나들었으며, 벽란도 등이 세계적 무역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계속적인 과거제도와 문치주의는 고려의 학문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팔만대장경과 유학의 보급은 이러한 광종의 개방적 개혁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 이 때 들어온 쌍기와 채인범은 어떤 사람들인가? 

쌍기는 후주 사람으로 산둥지방 청주의 수령이었던 쌍철의 아들이었다. 후주에서는 절도순관과 장사랑, 대리평사의 벼슬을 지냈는데,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오는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을 얻어 눌러앉게 되었다. 병이 나은 후, 광종에 불려가 면담한 뒤 원보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과거제도 설치를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자신은 과저시험의 시험관이 되어 선발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 때 과거시험을 통해 뽑힌 인재가 최섬, 서희 등이었다. 이후 아버지도 아들 쌍기를 따라 고려에 귀화한 뒤 좌승벼슬을 얻었다. 

채인범은 송나라 복건성 천주출신으로 37세가 되던 해,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광종은 그가 들어오자마나 면담을 한 후 예빈성 낭중에 임명하여 곁에 있게 하였다. 그 역시 쌍기가 고려에서 중용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사신단으로 들어올 때부터 귀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도 그를 면담한 후 벼슬을 주고, 주택과 노비, 토지를 하사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주었다고 한다. 

예빈성은 지금의 외교부와 같이 국외 귀빈에 대한 접대가 중심이었던 기관이었다. 그 후 성종때는 상서예부시랑에 임명되고, 목종 때는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후손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는 쌍기와 달리 그는 후손들이 고위관리에 임용되었는데, 그 중 채충순이 고려사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채충순은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사통해 얻은 아들로 보위를 넘기려했을 때, 목종을 면담하고 대량원군 현종을 보위에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 후 7년이나 지속된 거란의 3차 침입 때, 현종의 나주 몽진을 수행하며 정사를 돌봐,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고려의 최종적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동북아의 강대국이었던 거란을 상대로 고려의 최종적 승리는 국격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어 고려가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강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사 절요에는 총 45회 158명에 달하는 중국인 등이 고려에 내투해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의 고려전에는 "고려 수도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있다. 민(천주를 포함한 복건성) 지역 사람이 많은데, 상선을 타고 왔는데, 고려에서 재능을 시험하고 회유하여 관리로 삼거나 강제로 평생 머물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에서 무턱대고 외국인을 우대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문종은 "고려에 온 귀화인 가운데 재주와 기예를 갖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 우대에 대해 고려내부의 반발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재상이었던 서필은 자신의 집을 반납하면서 귀화인 우대정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의 해외인재 영입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를 통해 권문세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며,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송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고, 송나라를 따라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적 선진국가로서의 고려의 위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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