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 베트남과 관련된 성씨는 두개의 본이 있다. 하나는 베트남 리왕조를 창건한 이공온을 시조로 하고, 이용상을 중시조로 하는 화산이씨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양혼을 시조로 하는 정선이씨가 있다. 그 중 화산이씨와 중시조 이용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경우는 역사적 사료가 분명하지만, 정선이씨의 정착과정은 역사적 사료와 조금 달라 논란이 있다. 

먼저, 논란이 있는 정선이씨 이양혼에 대해 알아보자. 정선이씨 세보에 따르면, 시조 이양혼은 베트남 리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5대 이인종의 아들로 6대 왕인 이신종의 동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내부적인 권력 싸움이 일어났고, 이를 피해 송나라로 건너와 중서문화성 평장사를 역임하다가, 금나라와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경주에 와서 세거하면서 한반도에 정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양혼의 6대 후손이 바로 무신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이의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베트남 역사를 기록한 사료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 이양혼의 부친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인종은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이신종이 보위를 이었다. 또한 보위를 이은 이신종도 형제가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양혼의 6대 손인 이의민의 생몰연대로 따져보면, 베트남의 역사적 시기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원나라 말기에 기록된 "송사"에는 이인종의 아들이 이신종으로 나오고 있어, 정선이씨 쪽에서 이를 본따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선이씨 측에서 굳이 송나라가 아니라, 베트남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할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 성씨들의 유래를 보면, 중국 사료에 이어붙이기를 해서 자기 가문을 더욱 돋보이려고 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중국에서 남만(남쪽 오랑캐)으로 여겨지는 베트남쪽 가계를 이어붙이며 주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선이씨 이양혼의 경우 베트남 리왕조와의 직접적인 연관을 찾기는 힘들다 하더라고, 그 방계적인 연관을 갖고 있는 성씨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정선이씨 측에선 이양혼이 이신종과 왕위다툼에서 패해 송나라로 넘어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선이씨와 달리, 화산이씨는 그 세보가 보다 분명한 경우다. 화산이씨 중시조인 이용상은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의 6대왕인 이천조의 7번째 아들이자,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으로 군의 총수였다. 하지만, 왕조의 척신인 진씨가 왕위를 찬탈하고 진 왕조를 세운 뒤, 리씨 왕족을 몰살시켜 버렸다. 이에 이용상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송나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풍랑을 잘못만나 그 배가 한반도의 황해도 옹진반도인 화산으로 흘러오게 되었다. 
이용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화산이씨와 이용상>

이용상은 중국의 책봉을 받지 않는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 6대 임금인 영종(이천조)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황후 여씨이다. 9대 황제로 조카인 혜종이 즉위하자 평해공 이군필, 진일조 등과 함께 삼공으로 국정을 위임받아 운영하였다. 하지만, 혜종의 외척인 진수도(쩐투도-베트남어)가 정계에 진출해서 혜종을 협박하여 딸인 소성공주에게 양위를 시킨 다음, 소성공주를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킨 후 다시 남편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빌어 왕조교체를 단행했다. 그렇게 되어 베트남은 리왕조에서 쩐왕조(진왕조)로 바뀌게 되었다. 

쩐 왕조로 바뀐 다음, 진수도(쩐투도)는 통국대사가 되어 전권을 장악한 뒤 정적들과 리왕조의 왕족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이때 이용상은 진수도의 계략을 미리 눈치채고(진수도는 혜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리왕족들을 모조리 척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채 배를 타고 피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를 타고 피신하게 되어, 조류를 따라 황해도 옹진반도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옹진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해적들이 옹진 사람들을 나포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에 이용상이 해적들로부터 옹진사람들을 구해주게 되었고, 이로써 옹진 현령이 이용상 일행을 극진히 환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난민으로 흘러오다, 우연히 해적들과 싸움이 붙어 옹진사람들을 구해준 은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옹진 현령을 통해 고려 조정에 보고가 되고, 고종도 이를 안타깝게 여겨 화산지역에 식읍을 주고 정착게 한 것이다.   

이후 몽골군의 침략이 있자, 이용상은 고을 수령과 위효관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대를 편성하여 성을 지키기 위한 수성전략을 세웠다. 그렇게 방비를 튼튼히 하며 몽골군의 공격을 5달동안이나 막아냈다. 또한 몽골이 자객을 보내 이용상을 척살하려고 했을 때도, 이를 눈치채고 거꾸로 자객을 죽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몽골군이 군대를 돌려 후퇴를 하게 되었고, 후퇴하는 몽골군을 뒤쫓아 크게 격파하고 수백명에 달하는 포로를 생포했다. 

이에 고종은 이용상을 포상하고, 그에게 웅진 화산지역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에 봉하였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를 봉하도록 했고, 수항문이라는 글자를 새긴 문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용상은 화산성에 망국단을 설치해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고려에서 크게 출세를 했는데, 맡아들 간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일청은 안동부사를 지내고 안동군 내성면에 정착했다.   

또한 화산이씨 이용상의 31대 손인 이창근씨는 2010년에 다시 베트남으로 귀화했고, 베트남 공산당 조국전선부 위원이자 베트남 관광대사에 임명되어 한-베트남 우호협력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정선이씨 이의민>

정선이씨 이양혼의 자손들은 한반도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한 뒤,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6대손인 소금장수 출신으로 유명한 이의민 대에 이르러 크게 일어났다. 이의민에 대해선 경주이씨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가 미천한 소금장수 출신이라는 것을 볼 때, 권문세도가였던 경주이씨였기 보다는 경주에 정착한 정선이씨라는 주장이 설득력있다. 

이의민은 소금장수이자 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이선과 옥령사 노비였던 연일현의 3남으로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에 올라가는 꿈을 꾼 뒤 그를 낳았기 때문에 그가 귀하게 될 줄 알았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키가 8척이나 되고, 형제들 모두 건장한 왈패들이어서 마을의 두통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안렴사 김자양이 3형제를 체포해 고문을 했는데 이로 이해 두형제는 죽고, 이의민만 끝까지 버티며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의민의 끈기를 높이 산 김자양이 그을 경군 들여보내 개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경군에 들어간 이의민은 건장할 뿐 아니라, 수박을 잘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벌어진 정중부의 무신란에 가담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공으로 중랑장에 임명되었다가 장군이 되었다. 이때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키고, 유인준과 장순석이 의종을 데리고 경주로 올라와 있었다. 이에 정중부와 이의방이 이의민을 경주로 내려보냈다.  

경주에 내려간 이의민은 유인준 장순석 일당을 모두 죽인 후 의종을 데리고 곤원사로 가서 연못 근처에서 술을 두어잔 마시게 한 후에 의종의 허리를 꺽어 살해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이의민은 대장군에 올랐다. 조위총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싸우다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결국 조위총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상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사이가 좋이 않은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을 하면서 경주로 내려가 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신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경대승마저 죽자 힘의 공백이 생겼다. 이에 위태로움을 느낀 명종이 경주에 내려가 있는 이의민을 불러들여 벼슬을 주면서, 모든 실권을 이의민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꿈을 꾸었는데, 겨드랑이에서 황금색 날개가 돋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고, 옛 이야기에 용이 12대로 끝나고, 십팔자(十八子=李)가 나타난다는 말을 믿고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또한 그의 부인과 아들, 딸 들의 몰상식한 행태도 도가 지나쳐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결국, 아들로 인해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원망을 샀고, 그들은 군사를 대동하여 미타사 별장에 가 있던 이의민을 찾아가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저항하던 그의 아들들을 모두 잡아 처형하였으며, 외지에 가 있던 아들 이지영마저 잡혀서 죽고 말았다. 이의민 부자를 처형한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의 가계와 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안 노비까지 찾아내어 죽였다. 이에 이의민의 4촌인 이희민의 며느리 여흥민씨가 아들 이연을 데리고 강원도 정선으로 가서 은신하였다. 그 후 이연의 아들 이우원이 사마시에 급제를 하면서 정선을 본으로 삼아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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