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9]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7 -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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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49]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7 -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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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역사를 보면 외국인에 대한 배척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고조선의 기자와 위만, 그리고 신라의 석탈해, 김알지, 그리고 가야의 김수로, 백제의 비류와 온조, 심지어 고구려의 주몽까지 한반도에서는 이주민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배층을 형성하며 정착한 지역이었다. 즉,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 정착했던 남방 아시아계의 원주민 지역을 북방계 이주민들이 속속 들어와 자리잡으며 한반도의 역사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런 흐름 때문인지, 한반도에서 이주민에 대한 배척분위기는 조선조 성종 이후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적극적인 이주민 유입정책을 펼쳤다. 즉, 이주민들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생활하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으며, 그들에게 일정한 거처와 벼슬까지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 초기에도 계속 이어져 이주민들에게 평민의 지위를 주고, 결혼을 시켜주며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런 고려의 이주민 정책을 "래자불거(來者不拒)"라고 한다. 즉, 오는 자를 막지 않는다는 정책이다. 그렇게 고려시대 총 인구 200여만 중에서 17만(실증자료에 근거, 실제는 2배 정도 추정)이 외국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그들 중에서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후주에서 이주한 쌍기, 송나라에서 이주한 호종단, 발해에서 이주하고 거란전쟁에서 공을 세운 대도수, 베트남에서 이주한 이용상(화산이씨)과 이양혼(정선이씨) 등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위구르쪽에서 이주해온 설손과 설장수, 노국대장공주의 호위병으로 따라들어온 덕수장씨의 시조 장순룡 등의 아랍과 이슬람계통의 이주민도 보인다. 그리고 거란과 여진족, 원나라 등에서 이주해온 북방 유목민의 경우 그들의 장점인 말총 기술 등을 이용하여 갓이나 신발 등의 제작에 참여함으로써 의복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조선조에서는 "백정"의 무리가 되어 육류가공뿐 아니라, 각종 피혁제품 제작(갓바치), 놀이꾼(재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내국인 노비가 이주민과 결혼할 경우 면천시켜주기도 했고, 또 그 자식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여겨지는 "장영실"이었다. 장영실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는 만주출신 이주민들이 국왕의 시위(경호원)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으며, 그외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에게도 그 기술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는 직책을 배려하기도 하였다. 

 그 중 조선의 대표적인 과학자인 장영실을 살펴보자. 

 장영실의 아버지의 이름은 "장성휘"로 송나라 소주와 항주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세종실록에 장영실의 면천과 벼슬을 주는 문제를 가지고 세종이 조말생 등과 상의하면서 나온 기록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 송나라에서 귀화한 외국인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동래현 관노비(관기)였다. 그래서 장영실로 어머니를 따라 천민인 노비출신이었다. 

 이에 대해 아산장씨 종친회 등에서는 다른 일화를 전하고 있다. 즉, 장영실의 아버지가 송나라 출신이라면, 이는 장영실의 출생연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산장씨의 시조는 송나라때 고려에 와서 귀화하고,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라는 것이다. 장영실이 동래현 관노비 신분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조선의 역성혁명에 동참하지 않는 반역으로 신분이 관노로 떨어졌다는 것과 아버지 장성휘와 장성휘의 첩실로 관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장영실이 동래현 관노비 신분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세종실록에 그의 아버지에 대해 "송나라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원나라 중에서 남송지역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송나라시대 살았던 사람이라는 시대적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장영실의 아버지가 중국출신으로 고려 말에 궁궐기술자로 들어왔다가 관아에 출장 등으로 외지를 돌다가 동래현 관기였던 어머니와 관계를 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관노비였던 장영실이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손재주와 기술을 가졌음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동래현 무기나 창고 등을 뜯어고쳐 태종에게 천거될 정도였으니, 그의 손재주를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장영실의 손재주는 과학과 문물의 발전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의 눈에 띄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세종은 그를 면천시켜주고 벼슬까지 주었다. 

 태종 때 궁궐기술자로 있던 장영실을 눈여겨보던 세종은 자신이 즉위하자,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등과 함께 명나라로 파견하여 각종 천문 기술을 눈여겨보고 기술서적을 가져올 것을 명한다.  이는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기상관측을 하는 천문기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영실 등에게 명나라의 천문기술을 눈여겨보고 모방한 기계를 만들 것을 주문한 것이다. 

 장영실도 1년간 명나라에 머물면서 중국의 역대 천문지를 비롯해 명나라의 각종 천문지식 자료와 아랍의 기술서까지 손에 넣고 귀국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이 가지고 들어온 자료들을 모아 "양각혼의성상도감"이라는 천문관청을 설치하여 왕립천문대를 추진하게 되었다. 장영실도 중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자료를 바탕으로 물시계인 경점기를 만들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장영실의 벼슬도 종5품인 별좌에서 호군, 대호군이라는 종 3품의 벼슬에 올랐고, 세종의 명에 따라 각종 기계를 제작하였다. 이에 대해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세종은 자격루, 간의대, 흠경각, 앙부일구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세밀하고 정밀하였다.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지만, 임금의 뜻에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장영실이 세종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이에 세종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또 세종은 명나라의 역법이 부정확함을 인식하고, 보다 정확한 아랍의 계산법을 활용하여 조선의 역법을 창안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이천이 총괄하고, 이순지가 역법을 계산하고, 장영실이 혼천의 등 역법 계산기구들을 발명하였다. 이로서 만들어진 것이 "칠정산 내외편"인데, 이는 이순지가 편찬하긴 했지만, 이천, 장영실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칠정산"에서는 명나라의 역법과 달리 독자적으로 한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잡았는데, 이는 당시 아랍에서 한 달을 "29.530588일"로 잡은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한 달 계산과 거의 일치하며, 당시 지구상에선 이슬람의 아랍과 조선이 유일하였다. 또한 이때 주장한 지동설 등은 서양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세종 말년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파직당하고 더이상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즉, 장영실이 종묘에 행차하는 임금의 가마를 제작하는 감독을 맡았는데, 가마가 부실하게 제작된 것을 보고 우려하였지만, 제작 책임자의 "괜찮다"는 말을 믿고 내버려두었다가, 가마가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여 탄핵된 것이다. 이에 관련자들이 처벌되고 파직되었는데, 장영실도 이때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된 것이다. 이 때 장영실을 총애하던 세종이 내린 온정은 곤장 100대를 80대로 감형해준 것 외엔 없다. 

 그 이후 장영실에 대한 행적은 어느 사료에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아산장씨 종친회 기록에는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실의 기술자로 재직했다는 기록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토록 장영실을 총애하던 세종이 어찌하여 곤장 100대를 80대로 줄이는 정도로만 은덕을 베푼 것인지, 또 장영실의 이후 행적이 어떠했고, 언제까지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조차 없는 것인지.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받던 장영실이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너무도 허망한 뒤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몇가지 추론이 있다. 그 추론은 다음과 같다. 세종의 총기가 다하는 말년에 중책을 맡고 있던 문벌집단이 미천한 가문 출신의 장영실을 시기하여 벌인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중국을 숭배하고 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관료집단이 독자적인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명나라의 추궁을 두려워한 나머지 장영실을 실각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종 또한 명나라와의 대립이나 불화를 꺼리면서, 그렇다고 장영실을 처형할 수 없어 적당히 혼내주고 살아가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장영실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실각하고 어떠한 자료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는 그가 생전에 만들어 전해진 기계들에 비추어보면 참으로 허망한 일생이었던 셈이다. 그가 만든 기계는 조선 최초의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대간의, 소간의, 규표, 알부일구,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갑인자 등 셀 수 없이 많다. 한 사람의 업적으로는 실로 엄청난 발명들인 셈이다. 이러한 발명들이 장영실의 허망한 사라짐과 함께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암흑속에 덮여진 것이다. 

 따라서, 장영실의 미천한 신분과 그에 의해 이룩된 과학적 성과가 명나라에 발각되는 것이 두려운 사대주의적 관료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탄핵되고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장영실을 총애한 세종이 곤장 20대만 감형시켜주는 것으로 끝맺은 것은 아무래도 위와 같은 음모론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영실이 갑작스레 실각하고 사라짐에 따라, 조선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장영실처럼 한글창제, 각종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육진 개척 등 세종 시대의 눈부신 발전이 세조와 성종 시대의 조선 왕실 안정시대를 구현한 것 외에 조선이라는 국가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세종 말년과 세조 성종시대에 들어오며, 조선사회에서 적서차별 등 성리학의 신분질서가 확립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종식되고, 억불숭유정책이 펼쳐지고, 이주민에 대한 개방정책이 종식되며, 여성의 권익이 격하되는 성리학 중심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다시말해 세종 말년부터  강화된 유교 신분질서에 따라 세조와 성종 때부터 대내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쟁을 일삼았을 뿐, 더 이상의 국가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정쟁만 일삼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외적의 침략에 의해 국가 존망이 위태로워지는 국가재난사태를 초래한 셈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단일 이념(성리학)으로 일색화된 폐쇄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던 세종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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