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과 허위(虛僞)

진실(眞實)과 허위(虛僞)
“필요하면 거짓말을 하라. 천 번을 계속해서 하라. 그러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중국의 모택동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혁명의 이상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권력을 동원하여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했던가.

나아가 초기 공산혁명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공산당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굳게 신봉했다. 공산당이라는 조직이 내린 결정은 완벽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되면 후일 잘못이 발견되어도 그 결정을 수정할 길이 없다. 또 잘못된 결정이 재앙을 몰고 와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의 상식은 이러한 논리를 거부한다. 진실은 거짓을 이길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잘못을 발견하면 이를 수정해야 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하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혁명을 팽창시키던 공산당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도 ‘거짓은 진실이 될 수 없고’ ‘아무도 완벽한 존재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 환영을 쫓던 사람들과 나라들이 파멸의 과정을 거쳐 이제 냉엄한 현실로 돌아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1. 28은 내 사건에 관한 항소심 판결을 선고하는 날이었다. 나와 함께 많은 분들이 용기 있는 사법부의 판결을 기다렸지만, 재판장은 선뜻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남기고 변론을 재개하였다. 이제 재판부도 바뀌고 재판은 지연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더러운 누명(陋名)을 쓰고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인권은 신성한 법정 안에서도 서있을 곳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 그들은 권력의 힘으로 거짓을 말해 왔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닭의 목을 비틀 듯 거짓을 뱉게 한 다음, 그 거짓말을 온 세상에 퍼트려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로 알게 되었다. 나의 진실을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잘못하면 나 자신의 머리까지도 혼동에 빠질 것만 같다.

하지만 진실은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힘이 있다. 그들이 그토록 밝히지 않으려 노력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건 직후 나의 집에 가져왔다는 돈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거액의 현금을 숨겨놓은 구좌(口座)가 나온 것이다.

1심에서 당연히 법원에 회보되었어야 할 이 구좌를 그 은행이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졌다. 누가 어떤 작용을 하였기에 기계적으로 사무를 보는 은행이 이 결정적 증거를 법원에 보내지 않은 것일까. 그 진실도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나는 하늘에 감사한다. 하늘은 결국 그 증거를 드러내어 진실이 거짓을 이기도록 도와주셨다. 얼마나 힘든 고비를 넘기며 그 구좌가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주었다는 돈의 행방을 밝힌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요, 증거법상 그럴 필요도 없는 법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 우리 사법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닐까. 나에게 무죄를 받고 싶으면 전달자가 그 돈을 다 썼다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1심 판결문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전달자가 한나라당의 돈 5억원 전부를 횡령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왜 법을 공부하였던가를 오늘처럼 고통스러워 한 일이 없다. 사법부는 패자와 소수자의 진실을 지켜주기 위한 권력으로 설계된 것이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의문을 배제하고 확신을 줄 수 있는 증거에 의해서만 유죄가 인정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을 때에는 무죄가 선고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형사사법의 원칙을 공부하고 법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나만이 겪는 고통이겠는가. 검찰도, 법원도 결국 인간이 운영하고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검찰도 법원도 자신들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를 도무지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조직인 것 같다. 천하의 명의(名醫)도 자기의 오진율이 너무 높다는 사실을 고백한다는데, 나는 검찰과 법원이 스스로의 판단에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스스로를 완전무결한 조직이라고 믿는 것일까.

내 사건의 수사, 재판 과정에서 나는 검사나 판사도 사람이니까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 하는 선의로 대처해 왔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이 스스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치 않으려는 조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점점 깊어만 간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도 없다. 이 땅의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그 조직도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오류를 수정하지 못하는 조직에 미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오늘도 진실이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정직한 사람이 뜻을 펴는 그 날을 그린다. 나는 금년 새해 아침을 제주도 서귀포에서 맞았다. 가족과 함께 찾은 천재화가 이중섭 미술관에서 나는 뜻 밖에도 그가 쓴 시(詩) 한 편을 만났다. 소(牛)를 즐겨 그린 화가 이중섭이 소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쓴 시이다. 소는 정직과 희생의 화신이다. 잔꾀를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살다가 가죽까지도 인간을 위해 베풀고 떠난다.

나는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다가 나도 모르게 수첩을 꺼내 첫 장에 그 시를 베꼈다. 그가 그림을 그리던 초가집 작은 골방 벽의 누런 종이 위에 쓰인 그 시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제 거짓과 허위가 힘을 쓰는 사회를 밀어내고 진실과 정직이 힘을 얻는 그 날을 위하여 그 시를 여기에 옮긴다.


소의 말

이 중 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2005. 2. 1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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