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안을 지닌 지도자, 아데나워(1)

혜안을 지닌 지도자, 아데나워(1)
역사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가 추구했던 소망이 작금에 이르러 모두 실현되었다.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이 꼭 이뤄질 것이다”라는 그의 소망이 담긴 꿈은 이젠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렸다.

독일은 “통일과 유럽통합”이라는 힘든 고개를 거의 동시에 넘어야 했다. 통일이란 내부적 변화와 유럽통합이라는 외부적 변화는 세계와 유럽정치의 지형을 뒤흔든 사건이지만, 그 배경에 큰 정치인 아데나워의 강한 신념과 미래지향적 청사진 그리고 정치적 지도력이 자리했다는 평가에 독일의 정치권은 물론 언론 및 학계에서도 동의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패전국가의 지도자로서 정치적·외교적으로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통일과 유럽통합”에 관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책 추진력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물론 정책결정 및 수행과정에서 펼쳐진 아데나워의 공과에 대한 명암도 남아있고, 전쟁의 상흔을 떨쳐버리고 정치적·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이룩한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P1L@두차례 걸쳐 소개하는 본고에서는 패전과 분단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아데나워의 자존심 강한 소신과 리더십, 통일정책 그리고 유럽통합에 관한 정치적 행위를 위주로 살펴 보고자 한다.

1부에서는 아데나워 삶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2부에서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통한 통일정책 수립과 유럽통합 구상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분단과 이념적 갈등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의 서글픈 현실과, 국민적 추앙을 받는 정치지도자 조차 배출·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정치권에 시사하는 바를 Epilogue 형태로 정리하고자 한다.


경륜의 노정치인 아데나워

젊은 시절의 아데나워는 프로이센제국에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1917년 41세의 나이로 라인란트(Rheinland) 주정부가 자리한 쾰른의 시장에 부임하였지만, 바이마르공화국 탄생 직전까지 라인란드주가 프로이센제국으로 부터 분리된 공화국(Rheinische Republik)으로 출발하기를 원했다.

반히틀러운동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1944년 7월 쾰른에 있는 집단수용소에서 수감되었다가, 당시에 나찌 장교였던 그의 아들의 도움으로 그해 9월에 극적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종전후 쾰른은 영국의 수중에 들어가고, 아데나워는 영국측의 권고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1948년 9월 1일 서독 기본법 제정을 위한 국가평의회(Parlamentarischer Rat)가 구성되어 최고연장자인 아데나워가 의장으로 추대되었고, 기본법이 1949년 5월 23일 국가평의회에서 선포됨으로서 서독 정부의 출범이 이뤄졌으며, 동년 9월 15일 초대 총리로 아데나워가 취임한다

@P2L@취임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연로한다는 것과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발휘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히려 자긍심을 갖고 경륜과 세공된 지혜를 더 내세웠다. 처칠도 비슷한 연배다. 여기서 정치인의 나이에 관한 일화 하나. 처칠이 말타섬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아데나워에게 엽서를 보냈다. “우리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은퇴하면 이곳에서 같이 휴가를 즐기자”는 내용이다. 그 때 두 사람의 나이가 80대 중반이었으니, 나이와 정치는 무관한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 간다고 경륜이 그냥 쌓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명확한 목적을 세워놓고 오히려 희망과 기대감을 잃지 않으려고 열심했다. 그래서일까 야당의 공세가 강해지거나 국민의 지지가 하락하면, 두둑한 배짱을 내세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독일과 국민은) 날 활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죽고나면 “독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Mein Gott, was soll aus Deutschland werden!)는 푸념을 자주 내뱉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신이 이 자리에 없으면, 이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는 우려섞인 표현이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식의 독선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노정치인의 맹목적인 국가사랑에 대한 열정과 진심을 헤아리는 국민은 독선적 투정과 푸념도 너그럽게 수용했다. 이처럼 아데나워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고 국정에 임했고, 국민은 그를 변함없이 지지했다.

@P3L@그 자신이 나치에 체포되어 쾰른 근처 브라우바일러(Brauweiler) 감옥에 수감 중일 때의 일이다. 담당 교도관이 그가 나이가 많아 수감 중에 삶의 절망을 느낀 나머지 자살할까봐 걱정하자, 자신은 희망을 갖고 있어 자살하지 않을거라고 오히려 교도관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당시에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목표달성을 위해선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강한 소신을 갖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아데나워도 처복은 없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부인은 쾰른시장 부임 직전에 죽었고, 두 번째 부인도 총리취임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온 열정과 에너지를 나라살림 챙기기에 쏟아 부었다. 부인과 가족에 대한 배려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독일의 국부, 아데나워

아데나워는 심사숙고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현실을 냉철히 꿰뚫어보는 정치가였다. 그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이후 최고의 인기있는 독일 정치가였으며 제2의 비스마르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1949-1963년까지 14년 동안 총리직에 있으면서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룩했으며 국제무대에서 펼친 그의 외교활동을 일컬어 “아데나워의 전설“이라고 역사학자 크레켈러(L. Krekeler)는 평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정치와 외교분야에 치중한 반면에 경제분야는 정치적 파트너이자 동지인 에르하르트(Erhard)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라인강의 기적은 패전국의 설움을 털어내고 주권국가로의 발돋움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이런 기적은 아데나워의 정치적 활동과 에르하르트의 경제부흥 노력이 맞아 떨어진 결과다. 정치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민족의 자긍심을 챙겨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아데나워는 철저하게 일깨워 준 것이다. 이 때문에 아데나워는 국부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있다.

@P4L@화려한 외교활동을 펼쳤던 아데나워는 독일민족에게 희망을 그리고 유럽의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의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4월 미국 조지타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1963년 총리직을 사임한 후 91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면서, 라인강이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언덕 동네 뢴도르프(Röhndorf)에서 4권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주된 집필 자료로 그의 메모와 일기 형식의 글이 사용되었지만, 집필을 도왔던 사람들이 놀라워 할 정도로 그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실 전달에 충실할 정도로 그의 회고록은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 전후 독일사와 유럽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P5R@역사학자이며 아데나워연구의 권위자인 자유베를린대학 교수 바링(Arnulf Baring)은 서독의 출범은 곧 “아데나워의 출발”이고, 서독의 민주주의는 아데나워에 의한 민주주의 즉 “총리민주주의” (Kanzlerdemokratie)라고 지적했다. 바링의 이런 지적은 ‘총리민주주의’는 정책결정 과정과 수행에서 보여준 아데나워의 강한 고집과 독선을 내포하고 있으나, 결코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 서독의 초창기는 아데나워로 시작해서 아데나워로 끝났다는 것을 “총리민주주의”로 비유하여, 그만큼 비중이 무거운 큰 정치인의 노회하고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평가한 것이다.

바링은 아데나워의 강력한 통치력의 일례로 독일통일을 지연 또는 분단고착을 야기할 것이라는 야당과 국민들의 강한 반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방국가들과 손잡았으며 그 과정에서 재무장을 통한 주권회복을 이루었던 점을 꼽고 있다.


양탄자 위에서 시작된 주권 되찾기
아데나워에게 히틀러가 남겨준 역사적 유산은 패전국의 설움 이외에도 당장에 난국을 헤쳐나갈 돌파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름아닌 주권문제다. 1949년에 서독정부가 출범했지만 한동안 주권행사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데나워는 자나 깨나 주권회복에 온 힘을 기울였다.

주권회복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과정에서도 그의 고집어린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자존심이 너무 강해 오히려 연합국 고등판무관들 조차 경외심을 챙겨야 할 정도였다. 패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고 할 말을 다하는 그의 소신과 추진력을 고등판무관들도 높이 평가했다. 고등판무관들이 펴낸 자서전을 보면 “고집쟁이 노인, 독일병정식 추진력, 합리적인 사고력과 지구력이 돋보이는 설득력” 등이 아데나워의 지칭하는 대명사로 등장하고 있다.

패전으로 인해 독일역사는 “휘어졌으나 결코 부러진 것은 아니다”(tief gebeugt, aber nicht gebrchen). 아데나워의 이런 역사인식은 승전국들과의 정치적·외교적 협상과정에서도 굽힘이 없었다. 1949년 서독정부가 출범하면서 내각구성이 이뤄지자. 연합국(미영불) 고등판무관들은 내각을 이끌고 인사하러 오라고 하면서 굴욕적인 의전요구를 함께 요구해왔다.

@P6L@고등판무관들은 양탄자 위에서 인사를 받을테니, 아데나워 내각의 각료들은 양탄자 위로 올라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에 화가난 아데나워는 소수의 각료들만 데리고 가서 총리임명장을 수여받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양탄자 위로 한걸음을 옮겨 놓는다. 훗날 자서전에서 ”양탄자 위로 옮겨 놓은 그의 첫 걸음이 서독정부의 주권회복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아데나워는 총리 임명장을 비서에게 건네주곤 한번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임명장이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나라의 주권을 잃은 서러움을 속으로 삼키면서 강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정치인의 고뇌에 숙연할 뿐이다.

역시 아데나워가 옳았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갑자기 통일이 실현되었지만, 통일 직후에 정치권과 학계 및 언론에서는 역시 “아데나워가 옳았다”고 평가했다. 아데나워의 통일관을 재평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아데나워는 현재의 인식을 바탕으로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다.

반면에 그는 현실을 너무 꼼꼼하게 챙겨 의심이 많은 회의주의자(Skeptiker)임과 동시에 철저한 현실주의자(Realist)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런 성품은 대내외적인 정책수행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통일정책과 유럽관은 다음 회에 소개하겠지만, 당시엔 숱한 정적들과 언론 및 학계에서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데나워의 통일정책에 대한 재평가는 동독체제의 몰락에 따른 결과라기 보다는, 그가 당시의 상황을 얼마만큼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또 장기적인 차원에서 정책을 수립하였는지에 대한 평가에서 찾아져야 한다. 독일통일로 인하여 아데나워는 다시 살아났고, 유럽통합으로 인해 재평가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이 시대의 우연이 아니다.

그간에 아데나워의 독일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많은 학자와 정치인 언론인들마저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나섰고, 요즘들어 유럽의 청소년들이 아데나워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정계은퇴 이후 그가 머물었던 뢴도르프 본가의 옆뜰에는 드골과 마주보고 있는 작은 크기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를 잘 활용하세요(Nutz mich, solange Ich lebe!). 내가 죽고나면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1954년 9월 시사주간지 슈피겔지의 인터뷰에서 아데나워가 토로한 발언이다. 독선적이라 할 만큼 그의 강한 소신과 애국심이 배어있는 소신을 읽을 수 있는 유명한 말이다. 아데나워는 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감과 사명감을 동시에 내보였던 지도자였다.


[Epilogue]
1963년 아데나워는 정계은퇴 이후에 라인강이 내려다 보이는 뢴도르프(Röhndorf) 산등성이 본가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여비서와 함께 자서전을 집필했다. 본가는 전쟁 직후에 사둔 땅에 증개축한 것이다. 물론 소요경비는 자비로 들여 했지만, 거실과 파비용(정원의 집필실)의 난방과 심지어 수도관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그런가 하면 총리시절에 세계적 주요인사들이 건네준 각종 선물도 정부에 전부 기증했다. 그나마 뢴도르프 본가에서 볼 수 있었던 선물은 교황을 비롯하여 각국 지도층 인사들이 퇴임 이후에 건네준 것이다.

작년 11월에 필자가 찾은 본가는 아데나워의 절약정신과 검소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창문 틈새 하나도 치밀하게 처리하여 에너지 소비를 극소화 시킨 흔적이 역력했다. 아데나워가 직접 설계과정에 참여하고 거실 소파의 장식천까지 헌천으로 재활용했다고 한다. 건국초기 독일의 지도자가 이처럼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으니 국민이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은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실천에서 형성된 작품이다.

@P7R@본가 아래에 있는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와 박정희 전대통령이 교차되고 있었다. 동시대를 살아 온 인물이라 그럴까. 아니면, 유별날 정도로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있고, 강한 소신과 목적을 향한 추진력 및 인간적 체취에서도 흡사함이 작용한 탓일까. 필자에겐 착잡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밀려왔다.

경제적 어려움과 분단의 불행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두 지도자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뚜렷한 목적을 향해 매진했던 두 지도자들의 수단과 방법의 선택 차이일까? 한강의 기적은 라인강의 기적에서 인센티브를 제공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와 남겨진 정치현실은 너무나 간극이 크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날 활용하라”는 자신감을 갖고 국민 앞에서 소리쳤던 노정치인 아데나워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의 비장한 각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뚜렷한 목적을 향해 매진했던 두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어긋난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분단이라는 특수구조 하에서의 민주주의 수용 및 확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정치환경의 미숙함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 모두가 함께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박정희의 경우, 흉상진열과 기념관 건립은 커녕 광화문 한글 현판마저 내려질 처지에 있다.

부러지지 않은 채 단지 휘어진 역사임에도 우리 정치 현실은 단절과 부정의 역사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 시키고 있어 안타깝다.

국부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지난 날의 지도자들에 대한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져보는 것 조차 허용하려 들지 않는 우리 정치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참된 지도자를 배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목에선 정치권의 몫으로 치부하기 전에 언론과 학계의 분발과 자성이 요구된다.

앞서간 지도자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면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시성을 지닌 정권의 이념과 노선의 특성에 따라 평가의 잣대와 기준은 널을 뛸 것이다. 지도자에 대한 공과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역사는 다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항상 다시 쓰여져야 한다.

한시적 권력에 빌붙은 시대정신이라는 편협한 잣대로만 정리 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 정치의 불행이자 민족의 슬픔이다.

서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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