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1)

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1)
평양에서 핵 보유 선언이 터지더니 서울의 국회에서는 충남 공주 연기에 인구 30~50만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이 소관 상임위원회를 통과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그 도시에 총리실을 비롯한 12부, 4처, 2청을 이전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안팎에서 계속 이어진다. 과연 그런 성격의 도시를 만들 수 있을까. 또 만들어야 하는가. 만들어진다면 나라에 도움이 될까, 충청도에 도움이 될까. 만드는 척 하다가 중도에 흐지부지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일까.

태산 같은 걱정이 밀려온다.

나는 충청도 사람이며 지역구가 충청도에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우리 고장으로 옮겨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도,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노 정권은 바로 이러한 충청도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정권을 잡고 지난 총선에서 충청권을 석권하였다.

그들이 수도 충청 이전 공약을 들고 나왔을 때부터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속임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실현 불가능한 사업이니까 말이다. 수도를 이전한다! 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15~20년이 걸리고 천문학적 돈(국가재정과 민간분야의 투자와 비용을 합하여)이 소요된다. 중단 없이 계속 추진하여도 정권이 3~4번 바뀌어야 완성되는 사업이 아닌가.

그런데 상식을 가지고 나라의 사정을 살펴보자. 그들이 공약을 내세우기 전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된다고 절박하게 생각하는 국민이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그런 여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고, 어떤 전문가도 그런 주장을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오히려 통일을 앞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통일 후의 수도 후보지를 놓고 간간히 이야기가 있었는데, 모두 한강 이북을 상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불쑥 들고 나온 것이 수도 충청 이전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공약 덕분에 정권을 잡고, 그 공약을 실천하는 것처럼 쇼를 하면서 총선 대승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도이전의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이 사업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리 만무하다.

국민적 합의 없는 수도이전 사업이 3~4번의 정권교체를 겪으면서도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녕 국민을 기만(欺瞞)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 정권은 그들이 던진 속임수의 덫이 스스로의 발목을 낚아채지 못하도록 계속 그 사업을 추진하는 모양새를 갖추기에 급급하였다. 속고 속이는 실랑이에 헌법재판소가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노 정권에게 수도이전사업을 추진하려면 국민의 동의를 얻어 하라는 것이 헌재 결정의 요체였다.

노 정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처음부터 국민을 설득하여 그들 표현대로 ‘목숨을 걸고’ 수도이전을 하려 했다면 이 당연한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국민을 설득할 ‘자신(自信)’도, 목숨을 걸 ‘진지함’도 없었다.

우선 정권을 잡고 보자는 ‘욕심’, 한 번 더 재미를 보자는 ‘배짱’, 우선 땅이나 사놓고 하는 척 하다 보면 정권 5년은 다 지나가고 그 뒤의 일은 알 바 없다는 ‘무책임’, 어떻게 해서든 다음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충청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계속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파렴치한 정략’이 그들 진심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들의 기만을 폭로한 헌재 결정으로 노 정권과 그 추종세력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이 비록 무모(無謀)하나 최소한의 진정성을 갖고 있었다면 국민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끝내 설득에 실패하여 그들의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 국민들이 어떤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보인 행동은 헌재를 불태우는 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야당, 신문사, 서울시장, 강남 귀족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웠다. 참으로 내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다! 그들은 최소한의 진정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속임수가 폭로되자 덮어씌우기로 위기를 탈출하려 몸부림친 것이었다.

하지만 덮어씌우기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충청민심은 그들 곁을 떠날 것이다. 당장 정권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이고, 다음 정권을 잡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속임수가 바로 이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기형아(畸形兒)이다. 이 기형아를 앞세워 그들은 또 한번 충청의 민심을 훔치려 한다.

수도란 국가경영의 수뇌부가 자리한 도시를 말한다. 그런데 수뇌부 가운데 행정부처를 따로 떼어 다른 도시에 갖다 놓는다는 것이다.

우선 물어 보자! 최고 수뇌부인 대통령, 국회, 대법원이 자리한 도시를 떠나 행정부처를 다른 지방 도시로 옮긴 나라가 동서고금에 있었는가?

무슨 독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분단 시절 서독의 수도는 ‘본(Bonn)’이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의 진정한 수도는 ‘베를린’이라는 전제 하에 ‘본’은 통일될 때까지의 임시 수도로 규정되었다. 독일이 재통일을 이룬 후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본’의 급작스런 공동화를 막기 위해 현재 몇 몇 부처의 이전을 뒤로 미루고 있을 뿐 수도기능을 나눈다는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동서고금에 없다고 우리가 못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며 우길 것이다. 동서고금에 없는 일이라도 창조적이며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국가 중앙권력의 머리를 둘로 만드는 일이 어디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 도움은커녕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능률, 비능률 이전의 어리석음 그 자체이다. 우리의 미래는 어두움에 덮여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노 정권은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 수도이전을 해야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이렇게 행정부처라도 지방에 이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한 꺼풀만 벗기면 허구임이 금방 드러난다.

보자. 지방분권이란 국가권력을 중앙에서 모두 장악하지 말고 지방자치단체에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노 정권은 중앙 권력을 행사하는 부처를 지방에 옮기면 지방분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나는 경기지사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의 지방분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솔직히 우리 지방자치는 아직 자치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자치 서비스는 교육, 치안, 경제이다. 그러나 도지사에게 이 부분에 대한 권력이 쥐꼬리만큼도 없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교육과 치안을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주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일이 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한 발짝도 진전이 없었다. 모두 헛소리였다.

나는 노 정권에 충고한다. 진실로 지방분권을 생각한다면 중앙권력을 지방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 국민의 정부가 약속한 것만이라도 실천한다면 후일 큰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무슨 행정부처나 행정기관을 지방에 이전한다고 하여 지방분권이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이런 허구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역균형발전도 그렇다. 모든 지역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것은 중요한 정책 목표일 수 있다. 그러나 중앙행정부처나 기관을 지방에 분산시켜 균형발전을 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이 또한 해괴한 논리이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하면서 도시집중이 가속화 되었다. 특히 중앙집권의 영향으로 수도권에 사람과 돈이 집중하게 된 것이다. 햇볕이 있는 곳에 성장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권력이 있는 곳에 사람과 돈이 몰려든다. 사회에서의 권력은 자연에서의 태양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고, 기회가 있는 곳으로 사람과 돈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지역균형발전의 근본적 해결도 중앙의 권력을 지방에 나누어주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앙행정부처나 기관을 지방에 분산시키는 것은 방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국가경영의 효율만 떨어뜨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것이다.

노 정권이 수도 충청 이전 공약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충청 사람들에게 대신 어떤 선물을 주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충청에게만 좋고 다른 지역에는 해롭거나 아무 이익이 없으면 안 될 일이다. 다른 지역에도 결국 도움이 되어야 그 사업이 추진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충청에도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충청의 중심에는 청주국제공항, 청주, 오송, 오창의 과학산업단지, 대전, 대덕연구단지, 그리고 그 일대의 유수한 대학들이 있다. 모두 21세기의 첨단과학기술 경제가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인프라이다. 특히 대덕연구단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중심이 아닌가.

따라서 위 지역을 첨단산업결집지역(New Industry Cluster)으로 육성해 나가는 거대 프로젝트를 만들어 실천하면 충청은 물론 나라 전체 발전의 기폭제가 된다고 확신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그 힘이 미 전역에 골고루 첨단산업 중심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상해, 포동 신도시, 말레이시아의 MSC (Multimedia Super Corridor), 인도의 STPI (Software Technology Parks of India) 등은 국가 정책으로 육성되는 첨단산업결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2001년 인도 뱅갈로를 방문하여 직접 STPI를 살펴본 일이 있다. 당시 뱅갈로 시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에 36군데의 STPI가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확대되는 추세라는 설명을 들었다.

정부는 그 지역에 필요한 인프라를 깔아주고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막대한 세제와 금융상의 혜택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빠른 속도로 뛰어난 인재와 국제자본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한 일이 있다.

만일 노 정권이 지금이라도 이런 비전을 가지고 대덕연구단지와 청주국제공항을 아우르는 지역에 지식경제를 위한 인프라 확충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지식산업 육성을 위한 획기적인 정책을 수립 시행한다면 누구도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역이 발전하면 다른 지역도 연쇄적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 정권은 토지공사를 시켜 공채를 발행하고 금융권에서 거액의 돈을 가져다가 멀쩡한 논밭 2,000 여 만 평을 사고 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시를 건설하여 기껏 서울에 있는 행정부처를 옮기겠다고 한다. 거기에 무슨 비전이 담겨 있고, 무슨 창조의 의미가 있는가. 오직 낭비, 비효율, 갈등만이 보일 뿐이다. 이런 무모한 일을 거둬 치워야 한다.

그러나 오늘 국회의 동향을 보면 이 행정중심복합도시 법안이 이번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이 확실하다. 노 정권의 의도는 그렇다 치고, 한나라당의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해괴망측한 기형적 발상을, 그것도 국민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 좌절되고 말 허구의 정략을, 그래서 충청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이 망국적 책략을, 야당인 한나라당이 가로막지는 못할망정 거꾸로 노 정권의 손을 들어준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자!

노 정권은 국민을 설득하고 헌법개정절차를 밟아 수도이전 공약을 실천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고, 그래서 공약을 실천할 수 없으면, 국민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그리고 노 정권이 진정으로 허탈감에 빠져있는 충청 지역을 위해 무엇인가 할 의지가 있다면 앞서 내가 말한 대로 대전, 청주를 배후 도시로 하고, 청주국제공항과 대덕연구단지를 아우르는 광역 신산업결집지역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될 일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순리로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 해봐야 5년, 이제 남은 기간 3년의 정권이 정도를 걷지 않고 국민을 또 속이려 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국민의 마음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정화(淨化)해 낸다. 속임수를 가려내고 응징할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충청인의 마음을 가능하지도 않은 수도이전 공약으로 훔친 자들이 사죄하기는커녕 또 다시 되지도 않을 계획을 내 놓고 속이려 한다. 그러나 충청인들이 또 속절없이 속을 것으로 믿는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거짓의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고 있다. 그 화살을 분질러 버려야 할 한나라당까지 힘을 보태고 있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국민의 힘을 믿는다. 국민의 마음을 두 번씩이나 훔치려 하다니! 그 거짓의 화살이 끝내는 그들의 심장을 향해 되돌아온다는 것을 경고해 둔다.


2005. 3. 1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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