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록 연구원, 초려 이유태 선생, 조선의 융중(隆中), 공주 중동을 가다
한태빈 연구원, 동춘 송준길의 동춘당(同春堂)을 가다
김창훈 연구원, 조선의 운곡(雲谷), 송시열의 남간정사(南澗精舍)를 가다
김진홍 연구원, 시남 유계 선생의 교유의 산실, 산천재를 가다
만진초 연구원, 비운의 은사(隱士) 미촌 윤선거의 고향 이산(尼山)에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 전공자들은 2019년부터 여름과 겨울 두 번,  조선시대 주요 인물과 그 문중의 세거지, 종택, 서원, 신도비, 선산 등을 답사, 사회 문화적 발자취를 살피고 연구한다.
올해는 김진홍, 김창훈, 만진초, 이종록, 한태빈 연구원이 임진·병자 양란 이후 피폐하고 문란해진 17세기 조선 중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개혁을 통한 왕도정치로 나아가고자 했던 '충청 5현'의 유적지를 찾아 그들의 삶과 꿈, 개혁사상을 살펴봤다. (편집자)
1663년(현종 4) 이유태  선생이 충남 공주 중동(지금의 상왕동)으로 이주한 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송서재(四松書齋)와 함께 세운 서원
1663년(현종 4) 이유태 선생이 충남 공주 중동(지금의 상왕동)으로 이주한 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송서재(四松書齋)와 함께 세운 서원(사진=이연우 교수)

초려 이유태 선생, 조선의 융중(隆中), 공주 중동을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록 연구원

1659년(효종 10) 5월, 마지막 다짐과 함께 나아갔던 조정(朝廷)에서 북벌의 대계는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록 연구원
이종록 연구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임금과 조정에 실망하고 있던 상황에서 친애하던 벗의 강권 때문에 나아온 조정이었지만 더는 남아 있을 이유도 의리도 없었다. 

누구보다 출처(出處)의 대의(大義)에 대해 고심하던 그였던 까닭에 나아갈 이유가 없다면 물러가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올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리기로 하였다. 

이른바 「기해봉사(己亥封事)」로 알려지게 될 대경장(大更張)의 상소문이었다. 

하지만 상소가 효종(孝宗, 1619~1659)에게 채 닿기도 전에 효종은 승하하고 현종(顯宗, 1641~1674)이 재위를 잇게 되었다. 「기해봉사」가 현종에게 올려졌던 까닭이다. 

편집자 주: 기해봉사는 조선 중기 효종의 북벌대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초려 이유태 선생이 1695년(기해년)에 작성한 상소문으로, 총체적인 국정 혁신 대개혁의 방책을 담은 2만여 자의 상소문과 별책 향약책까지 무려 4만여 자에 이르는 역사상 유례없는 장문의 대 상소문이다. 기해봉사는 풍속을 바르게 하고 인재 양성, 낡은 폐단 혁파 등을 국정개혁의 3대 강령으로 삼고 내수사內需司의 혁파 등 16조목에 걸친 국정 대 혁신안을 제시했다.

현종은 이 봉사를 읽고 감탄하며 승정원에 넘겨 시행할 수 있는 안건을 검토하게 하였지만 끝내 시행되지는 않았다. 

봉사의 실현이 나아감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이유태는 그렇게 누운 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유태는 자(字)는 태지(泰之)이고 호(號)는 초려(草廬)이며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산림학자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유계(兪棨, 1607~1664)와 더불어 충청오현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유태는 그의 스승 김장생에 의해 ‘대유(大儒)로다! 오도(吾道)를 의탁할 자 여기에 있구나!’라고 평해졌을 만큼 학문적 성취가 탁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배운 것은 같아도 그 성취의 방향은 다른 법이기 때문에 이유태는 벗들과 달리 삼국지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이상적 인물로 지향했다. 

이는 평소 ‘제갈량’과 그의 호인 ‘공명(孔明)’ 및 그의 시호인 ‘무후(武侯)’를 자주 언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갈량에 대한 찬미는 그의 평생 지론인 출처 관에 잘 드러난다. 

이유태는 “지금 출처(出處: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물러나 집에 있는 일.편집자 주)의 의리는 두 가지가 있으니, 제갈량과 같이 온몸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거나 왕촉(王燭)과 같이 말을 써주지 않으면 물러나 들에서 밭을 가는 것 다만 이 두 가지 말고는 털끝만큼도 어긋 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촉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란 말을 남긴 전국시대 제나라의 인물이다. 

당시 제나라를 침공한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가 현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귀순을 제안하자 ‘비록 제나라 왕이 간언을 듣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 의로움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고 자결하였다. 

이유태에게 출처란 철저하게 나아가서는 제갈량같이 하며 물러나서는 왕촉같이 하는 것이었다.

봉사는 현종 대 끊임없이 문제적 안건으로 부각되었다. 봉사의 시행을 둘러싼 갈등은 끝내 조정이 이유태를 경원시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현종은 봉사의 시행 대신 제직(除職), 등대(登對), 전유(傳諭), 하사(下賜)와 같이 누구라도 감격해 마지않을 은사를 여러 차례 내리며 출사를 권유하였지만 봉사가 시행되지 않는다면 조정에 머물 이유가 없다며 지속적으로 출사를 사양하였다. 

이제 이유태에게 필요한 것은 용이 누울 땅, 융중을 찾는 것이었다. 

비록 제갈량은 융중의 초려(草廬)에 누워있으면서 삼고초려(三顧草廬)로 그 정성을 보인 유비(劉備, 161~223)에게 융중대(隆中對)를 올리며 출사를 시작하였던데 반하여 이유태는 기해봉사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하여 융중을 찾아야 했다. 

이유태가 찾은 융중은 공주(公州) 중동(中洞)이었다.

전라도(全羅道)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던 이유태의 본가(本家)는 단연코 금산이다. 금산은 그의 아버지 이서(李曙)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형 이시(李時)와 함께 서울에서 피난을 온 뒤로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게 되었다. 

이들의 금산으로의 이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이들이 피난의 여정으로 금산을 택한 것은 이시가 금산의 유력가문인 금산한씨(錦山韓氏)에게 장가들면서 금산지역에 거처할 수 있는 기반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시와 이서의 후손들은 금산을 기반으로 그 영향력을 점차 늘려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고대방'(典故大方.1924)에 기록되어 있는 금산의 사우(祠宇) 중 금산한씨의 시조 한교(韓曒)를 모신 사당인 ‘향사우(鄕祠宇)’에 이유태의 형인 이유택(李惟澤)이 함께 제향되었던 것에서 반증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유태의 부친과 모친 모두 금산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이는 이들의 금산 정착의 완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항시 국가를 염려하던 이유태가 엎드리기엔 금산은 서울과 너무 거리가 멀었고, 또 궁벽하지도 않았다. 

금산으로의 낙향은 곧 가문이 주는 안온함 속에 안주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1651년(효종2) 공주 초외(草外)에 집을 옮겨지었는데 이는 벗인 송준길, 송시열과 동거(同居)를 위함으로, 이들과 가까이에서 학문을 닦고 정치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봉사의 좌절 이후 새로운 거처를 모색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이때 이유태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공주 중동이었다. 중동은 1663년(현종4) 이유태의 장자 이옹(李顒)이 발견하였는데 ‘경내가 그윽하고 땅이 후미진[境幽地僻]’ 곳이었다. 

이유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서 집 지을 땅을 개척하여 이거(移去:다른 곳으로 옮김)하고 용문서재(龍門書齋)와 사송서재(四松書齋)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다.

공주 금강의 남쪽 계룡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를 잡은 중동은 금강 변 길을 따라가다 작은 소로로 들어가면 나오는 그윽하고 후미진 마을이다. 

마을에 진입하면 긍당(肯堂), 농포(農圃) 형제의 강학비(講學碑)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근대(近代)의 유림(儒林)으로 이유태의 10대손이 된다. 

마을의 정 중앙에는 현재 서원이 된 용문서원이 있고 그 옆에는 이유태 후손가의 종택이 붙어있다. 

종택에는 당시부터 현재까지 중동을 지켜온 낡은 편액 몇 점이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여있는데, 특히 ‘용문서재’와 ‘중동정사(中洞精舍)’가 큰 필획으로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종택이 긍당의 종택이라면 바로 옆의 ‘현민서실(玄民書室)’은 농포의 소종택이다.

중동에서 주목할만한 공간은 하나 더 있다. 

이유태의 후손 이철영(李喆榮, 1867~1919)은 조선후기 유학자로 이유태 후손가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다. 

이철영은 이유태(李惟泰)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고, 호락논쟁을 절충한 「사상강설(四上講說)」을 짓는 등 학문적 역량으로 명망을 떨쳤다. 

이철영은 항왜(降倭)로도 알려져 있는데 1904년의 철도부설(鐵道敷說), 1905년의 을사조약(乙巳條約), 1909년의 광무호적(光武戶籍)의 민적(民籍) 대체 등의 사건마다 일제(日帝)의 만행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왜인들의 정령(政令)을 일체 거부하여 왜경주재소(倭警駐在所)에 구금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충청5현 순례에 나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들이 한국 최고의 한학자 아당 이성우 선생(왼쪽 네번쨰) · 이연우 교수(공주사범대.왼쪽 첫번쨰)와 초려선생의 11대손 현민 이종선 선생 서재 청유학당에서 함께했다.
충청5현 순례에 나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들이 한국 최고의 한학자 아당 이성우 선생(왼쪽 네번쨰) · 이연우 교수(공주사범대.왼쪽 첫번쨰)와 초려선생의 11대손 현민 이종선 선생 서재 청유학당에서 함께했다.(사진=이연우 교수)

해방 이후 1971년에 공주 중동에 지어진 숭의사(崇義祠)는 이철영을 제향하는 공간이다.

전국의 명가(名家)를 답사해 보면 명가가 위치한 장소의 경관과 의미는 제각기 다르다. 

조선의 마을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인문적으로 설계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유태는 제갈량을 꿈꾼 유학자였다. 비록 제갈량은 삼고초려를 한 유비에게 융중대를 바치고 와룡강이 흐르는 융중을 떠날 수 있었지만 이유태는 기해봉사를 바치고도 쓰이지 못하여 금강이 흐르는 중동으로 물러나야 했다. 

중동은 철저하게 이유태의 출처 관에 따라 조성되어 졌고 그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대대로 살고 있는 고장)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었다.

그 후 2015년 11월 세종특별자치 도움 1로 40 소재, 초려역사공원이 준공되면서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코자 하는 전국 각 대학 문, 사, 철 소장파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초려문화재단(이사장 이연우)을 설립하게 되었다.  

동춘당공원 내 고택(사진=이연우 교수)
동춘당공원 내 고택(사진=이연우 교수)

동춘 송준길의 동춘당(同春堂)을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태빈 연구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게는 유명하고 흥미로운 일화가 존재한다. 

16세기 무렵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사윗감을 찾고자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문하를 방문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태빈 연구원
한태빈 연구원

당시 김장생 밑에서는 3명의 제자가 공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송준길·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유태(李惟泰, 1607~1684)가 그들이다.
 
정경세는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였으므로 공부를 하는 도중 방문을 열어보았는데 이유태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인사를 하였고, 송시열은 공부에 집중했으며 송준길은 일어나서 가볍게 인사만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정경세는 중용(中庸)의 덕을 가졌다는 이유로 송준길을 택한다. 

3인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윗감 일화는 송준길이란 인물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동춘당 송준길의 자(字)는 명보(明甫)이고 호(號)는 동춘당(同春堂)이다. 

효종부터 숙종까지 활동했던 문신이며, 생전에는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동행했고. 사후에는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정치가로서는 서인, 청서파(淸西派)를 이끌면서, 북벌(北伐)과 예송 논쟁에 참여했다. 

한편 손자에게 써준 송준길의 필적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었을 만큼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거유(巨儒)가 생전에 활동했던 공간 동춘당(同春堂)을 실견(實見)한 소회에 대해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약술해보고자 한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78에 위치한 동춘당은 1963년에 보물 제209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초건(初建)은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宋爾昌, 1561~1627)이 세웠으며 중건(重建)은 송준길이 주도하여 1649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건축 문화재들은 창건부터 지금까지 불변하는 존재로서 착각하기 쉽다. 

가전체(假傳體) 문학과 같이 선조들이 물건에 부여하는 전통을 고려한다면 훨씬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당(堂)에는 상세한 경위가 담겨있을 것이 틀림 없다. 

동춘당의 경우 동춘당기(同春堂記)가 현전한다.

동춘당기는 송준길보다 한 시대 앞서 활동했던 포저 조익(趙翊, 1579~1655)에 의해 작성되었다. 성리학의 대가였던 그는 정치가로서 한때 의정을 역임했을 정도로 저명한 인물이다. 

동춘당기는 바로 조익의 문집인 『포저집』에 실려있는데 후술하겠지만 그 논리는 자못 상세하며, 흥미롭다고 생각하기에 심층적으로 분석할 만하다. 

동춘당기를 시작하면서 조익은 은진 송씨 대전 입향조 송유(宋愉, 1388~1446)를 기리는 쌍청당(雙淸堂)과 그 기문(記文)을 지었던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을 언급하면서 동춘당과 자신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자부한다.

다만 초건의 동춘당은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하겠다는 뜻”[名其堂曰同春, 取與物同春之意也.]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핵심 키워드라 볼 수 있는 “與物同春”의 원 텍스트를 『장자(莊子)』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해당 대목이 포함된 덕충부(德充符)는 덕이 충만한 표시[符]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천덕(天德)이 충만해져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표현되는 경지를 다룬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만물과 더불어 따뜻한 봄과 같은 관계를 이루어야 하니 이것은 만물과 접촉하여 마음 속에서 때를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재능이 완전하다고 합니다.[使日夜無郤, 而與物爲春, 是接而生時於心者也, 是之謂才全.]

즉 『장자』에서의 ‘여물동춘’은 봄이 만물을 생성시켜 주는 것처럼 따뜻한 안식처가 되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동춘당기의 필자로 돌아가자면 청년 시절의 조익은 『장자』를 문장의 고범(古範)으로서 중시했었다. 

예컨대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조익은 15살부터 이정귀(李廷龜, 1564~1635)에게 수학하면서 『장자』를 병통으로 여기는 스승의 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좌씨(左氏;춘추좌씨전)와 맹가(孟軻;맹자)와 장주(莊周;장자)와 태사(太史;사기)의 글은 다른 글들보다 월등하게 기묘하다고 가장 많이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익이 초건의 동춘당의 명명 의도를 ‘여물동춘’이라 지적한 것은 그의 학문관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인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동춘당기의 나머지 내용은 단순한 ‘여물동춘’을 넘어 성리학적인 의미를 투영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조익은 동춘당이란 당호를 명명한 그 뜻이 원대하다고 평가하였는데 바로 춘(春)과 인(仁)을 동일한 개념으로 단정했기 때문이다.[宋君以同春名其堂, 則可見其志在於求仁也.]

이를 이해하려면 성리학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사덕(四德)과 사절(四節) 및 사상(四常)의 대응이다. 

원(元)이 춘(春)·인(仁)과 통한다는 설명은 성리학 체계의 기본 도서인 『소학(小學)』에서도 그 서문 격인 제사(題辭)에서 등장한다.[元, 於時爲春, 於人爲仁.] 

그리고 성리학의 인(仁)은 선의 으뜸[善之長]으로서 고평가 받았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노장학과 아래에서 언급한 성리학은 어떻게 다른가? 

양자 모두 ‘생장(生長)이 이루어지는 따뜻한 시기’라는 봄의 속성을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술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자면 노장학의 춘(春)은 ‘인심(人心)’에 한정되었고 성리학의 춘(春)은 ‘천리(天理)’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한편 조익에 관한 종래의 연구에 따르면 20대 이후에는 문장 대신 성리학 즉, 경학(經學)에 침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주자의 주석 체계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독창적인 설을 제시하기도 했고, 양명학과의 연관성도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조익의 방대한 학문관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각설하고도 최소한 성리학에 집중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글은 계사년(1653), 즉 조익의 나이 75살에 쓰여진 것이다. 

현판 하나에 담길 정도로 짧은 글이지만 앞서 논했던 내용을 염두하자면 2가지의 의미를 추측해낼 수 있다. 

첫 번째는 학문적으로 완숙했던 노학자가 송준길의 남들과 다른 뜻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又喜其名堂之義異於人也.] 

다른 하나는 글의 전면에서 드러나지 않으며 본고에서 다루었던 한갓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익은 중건기(重建記)의 형식을 차용하여 한편의 전기(傳記)처럼 그 자신이 겪었던 노장학으로부터 성리학으로의 학문관의 변화를 녹여내지 않았을까?

동춘당공원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호화스러운 여타 종택과 다르게 동춘당을 처음 마주하면 그 모습이 단촐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두 글자의 함의는 가장 무겁게 다가올 수 있다. 자신에게 기문을 요청했던 청운의 선비에게 지난 60여 년간의 학문적 여정을 축약했다는 사실을 송준길은 이해했는지, 당을 오르고 내리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동춘당기 번역 참고 : 이상현(2006))
 

우암 사적공원 인함각
우암 사적공원 인함각(사진=이연우 교수)

조선의 운곡(雲谷), 송시열의 남간정사(南澗精舍)를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창훈 연구원

1653년(효종 4년) 윤7월 21일, 송시열은 황산서원(黃山書院, 현 죽림서원)에서 유계(俞棨)·윤선거(尹宣擧)와 함께 모여 화산(花山)을 선유(船遊)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시간이 지나 밤이 되어 재실에서 잠을 청할 때, 윤선거와 윤휴(尹鑴)의 관계에 대해 세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창훈 연구원
김창훈 연구원

윤휴가 스스로 주자의 뜻과 다른 새로운 주석을 낸 행위에 대해 윤선거가 윤휴의 고명함과 의리는 천하의 공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윤휴를 두둔하자, 송시열은 윤휴를 주자의 뜻을 어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평가하면서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유유(劉裕)과 같은 유학자들에게 역적으로 평가받는 자들과 함께 묶는 등 맹렬한 비판을 펼친다. 

송시열의 평가 근저에는 공자로부터 이어지는 하늘의 도통은 주자에게 계승되었고 주자의 학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이치와 글들이 현명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존경심과 흠모함이 내재되어 있다. 

황산서원에서의 모임에서 발생한 송시열과 윤선거의 윤휴를 둘러싼 갈등은 사사로운 감정대립을 넘어서 학문적, 이념적 차이가 컸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노론과 소론의 분기라는 정파적 대립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그는 24살의 나이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서인의 학문과 정치관을 배웠으며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양송(兩宋)이라 일컬어지며 서인의 핵심 인사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병자호란을 직접 겪으며 피탄에 빠진 조선의 모습을 목도하였다. 

이윽고 효종에게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청나라에 대한 철저한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면서 적극적으로 북벌을 주장하였다. 

또 윤휴와 허목 등으로 대표되는 남인과 복제를 둘러싼 첨예한 예송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평생토록 주자를 흠모하였는데 이 글의 주제인 남간정사에서도 묵묵히 주자학에 몰두하고자 하는 송시열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남간정사는 현재 대전 동구 충정로 53에 위치한 우암사적공원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암사적공원은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남간정사뿐만 아니라 장판각, 유물관, 기국정 등이 위치해있고,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의 목판본이 보전되고 있는 등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며, 우암사적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현대인이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곳에 위치한 남간정사는 송시열의 나이 80세에 회덕 흥농에 우거할 당시 작은 서재의 기능을 하였다. 

흥농은 본래 송시열이 초년에 강학하던 곳으로 1687년 10월 13일 흥농으로 돌아오면서 흥농서당(興農書堂), 즉 능인암(能仁菴)에서 강학을 하는 동시에 남간정사라는 개인 차원의 공부처를 짓게 된다. 남간정사라는 이름의 기원은 주자의 「운곡남간(雲谷南澗)」에 기인한다. 

주자의 「운곡남간(雲谷南澗)」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危石下崢嶸 위태로운 돌이 가파르고 험한 모습으로 아래를 향하고高林上蒼翠 높은 숲 푸르게 우거지며 위를 향하네中有橫飛泉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물이여崩奔雜綺麗 모든 것이 무너지듯 뒤섞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남간정사라는 이름에서 ‘남간(南澗)’의 ‘간(澗)’이라는 글자는 ‘계곡의 시내 간’이라는 뜻으로, 주자와 같이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임학(林壑)’에 거처하려고 하는 송시열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한원진이 지은 「흥농영당기(興農影堂記)」에서도 흥농이라는 지역은 임학(林壑)의 풍취가 있어 송시열이 좋아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송시열의 어록에서 그가 화양동에 거처했을 당시, 징담(澄潭)·백석(白石)·폭포·창벽(蒼壁)을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물을 특히나 중요시 했던 이유는 한밤 중 물소리를 들으면 정(靜) 가운데 동(動)이 들어있는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송시열은 자신의 거처나 공부처를 정할 때,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과 정제됨과 그 속에 내포된 학문적 가치를 고심하는 모습을 통해 남간정사가 지니는 지리적·역사적 가치는 더욱 알 만하다.

송시열은 남간정사를 통해 조용히 주자학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수양하려 했다. 이는 그의 후학이라 할 수 있는 한원진과 이희조의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한원진은 「흥농영당기(興農影堂記)」를 지으며, 흥농이란 지역은 송시열의 초년·만년의 강학처로 송시열 스스로 ‘이곳이 내가 명을 다할 곳이다’라고 칭하였고, 이는 모두 주자를 추모하려는 뜻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또 송시열의 문인인 이희조가 지은 「남간정사기(南澗精舍記)」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항상 읊었다는 기록을 통해, 죽기 직전까지 두 손에서 주자의 책을 놓지 않고 묵묵히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고 탐구하려는 주자학자로서의 송시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송시열이 사망하고 나서 남간정사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그의 학문과 도학적 면모를 존모하기 위해 성지화가 된다. 그가 죽고 나서 남간정사 뒷 편에 송시열의 사당인 종회사(宗晦祠)가 건립된다. 

이는 본래 남간정사가 지니고 있던 공부처의 성격에 제향기능이 더해지면서 서원의 셩격과 비슷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남간정사는 여러 차례 중건되고 1927년 기국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고, 1936년에는 고종때 훼철된 종회사의 기능을 이은 남간사가 설립된다. 

1998년에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우암사적공원이 조성되고 송시열의 정신과 사상, 학문과 예술의 가치를 시민에게 이해시키고 홍보하기 위해 남간사유회 주간으로 매년 10월 ‘우암문화제’가 진행된다. 

주요 행사로는 강경경연대회, 한시백일장, 휘호대회, 도의사례 발표 등 옛 선비의 전통적인 모습을 재현해 보는 행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2021년 9월 25일 ~ 10월 17일에는 ‘남간정사 우암야행’ 행사가 펼쳐지기도 하였다. 

1687년 송시열은 많은 현대인들이 우암사적공원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송시열의 자취를 체험하고 기억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송시열의 정신과 기운이 이 땅 위에서 소멸 되지 않고 길이 존재할 것이다.

시남재
칠산서원 내 시남재(사진=이연우 교수)

시남 유계 선생의 교유의 산실, 산천재를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진홍 연구원

 『주역(周易)』의 64개 중 4번째에 있는 괘인 산수몽괘(山水蒙卦)는 산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상(象)이다. 또한 몽(蒙)은 사물이 태어나 아직 몽매한 상태로 ‘어둡다, 어리다 혹은 기르다’라는 뜻으로 파생된 뜻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래한 가장 유명한 책이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擊蒙要訣)』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진홍 연구원
김진홍 연구원

또한 율곡의 도통을 이었던 한 학자가 바로 이러한 몽괘를 가지고 자신의 서실을 지으면서 어린이를 바르게 키워서 성인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산천재라고 편액한 사실이 있다. 

여기서 그는 제자만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책을 편찬했는데, 오늘날 일종의 학문적 아지트 역할인 셈이다.

산천재는 공간적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일대에 자리한 서원으로 윤선거(尹宣擧)와 그의 아들들인 윤증(尹拯)과 윤추(尹推)을 모시고 이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원래는 산천재라고 하는 강학 공간이 있었으며 후에 서원으로 창건된 것이다. 

지금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그 터와 유허비만 남겨져 있을 뿐 서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과거 당대에 이름을 날린 호서의 유현이 서로 어울려 사귀던 공간이었던 역사가 있다. 

산천재 터를 둘러싼 구체적인 내력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금산이라는 장소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산이라는 공간은 충청오현, 각 인물의 삶과 밀접한 인연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기호학의 종장이자 충청도를 대표하는 학자인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가 주로 활동했던 공간이자 윤선거가 아버지 윤황(尹煌)과 함께 병자호란을 피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계가 조정에 낙하한 이후 다시 등용될 때까지 주로 살았던 곳이었으며 그의 집은 윤선거 집안과 한 다리를 두고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유태, 송시열, 송준길 등도 마찬가지로 금산에서 이들과 만나 함께 교유하고 했던 곳인데, 이들의 삶의 행적 속에서 금산이라는 지역은 교유(交遊)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짙은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인물은 시남(市南) 유계(1607~1664)이다. 

유계는 17세기 활동했던 조선의 학자로 본관은 기계류씨로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기계현(현재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 호장이 되어 세거했던 유의신(柳義臣)의 후손이다. 

그는 세 가지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보통의 학자라면 한 영역에서 활동에 그쳤겠지만, 경세, 예학, 역사 분야에 각각 대표적인 저술작품을 남겼다. 

『가례원류(家禮源流)』, 『강거문답(江居問答)』, 『여사제강(麗史提綱)』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본래의 출신은 경기도 수원으로 충청 지역과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생 중 학문 활동이 완숙하게 꽃피웠던 시기는 바로 금산이었으며 호서의 대표적인 유림과 교유했던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유계의 행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유계와 함께 살펴봐야 할 인연은 바로 산천재를 둘러싼 윤선거 간의 깊은 교유이다. 

유계는 젊은 나이에 문과에 합격한 관료이자 학자로 특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왕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척화론을 지킨 충신이었다. 

이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뒤로 유계는 척화를 주장했던 일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을 받아 임천(林川, 현재의 부여군)으로 유배되었고 3년이 지나 해배된 이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금산 마하산 아래 남일면 대보촌으로 이거하였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강학처 겸 서재(書齋)를 짓고 산천재라고 편액하였다. 

유계의 삶에서 금산 이사 온 이후 유계는 정치적인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었다. 

이 시기 가장 득의했던 시기라고 자평할 만큼 그는 학문 활동을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의 제자나 친구들이 산천재에 종종 찾아오게 되었는데, 비슷한 나이 또래인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이 찾아와 서로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계와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되어주던 이가 바로 윤선거이다. 

윤선거와 유계의 인연은 이미 금산에서 만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스승인 김장생과 김집을 모신 동문 관계였으며 유계가 문과 합격했던 1633년(인조 11) 당시 동기생으로 윤선거의 형인 윤문거와 합격했던 이력이 있다. 

이들 사이는 직접적인 교유뿐 아니라 혼인과 사승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유계의 셋째 아들인 명흥은 윤문거의 딸과 혼인했으며 윤증 역시 바로 산천재에서 유계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후 유계 사후 행장과 제문 역시 윤선거 부자가 지은 것이다. 

게다가 윤선거는 유계가 금산으로 오기 전부터 있었는데,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 이후 아버지와 함께 금산에 은거하며 살고 있었다. 

와중에 유계가 따라 살게 되었고 이 두 집안은 서로 돌다리를 두고 있었을 만큼 가깝고 돈독했던 친구였다.

두 사람 교유의 산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산천재에서 저술되었던 『가례원류(家禮源流)』라고 하는 주석서이다.

『가례원류』는 중국과 조선에서 볼 수 있는 가례에 대한 모든 주석을 모아 『가례(家禮)』 체제에 맞게 편집한 책으로 예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와 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저술할 수 없는 책이다. 

그러나 두 인물 모두 당대 최고의 예학자였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전에 유계는 단독으로 『가례집해(家禮集解)』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이를 더 보충하고자 했으며 그의 절친 윤선거와 함께 산천재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가례원류』 저술과 보충은 유계가 다시 조정에 부름을 받아 출사한 직후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계는 유배되고 나서 대략 10년만인 1646(인조 24년)년에 다시 무안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어 산천재를 떠나게 될 상황이었다. 

이 때 윤선거는 유계를 대신하여 산천재에 남아 그대로 유생들의 강론과 학문 연구를 계속해나가는데, 유계가 어떠한 말 없이 산천재를 윤선거 부자에게 내어준 것은 이들의 깊은 우정이 뒷받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와 스승이 했던 것을 계승하여 『가레원류』 수정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유계가 떠난 후로 산천재는 윤선거 부자의 주요 강학처로서 거듭나게 된다.

그 뒤로 산천재는 이들의 사후에 새롭게 제향과 강학을 동시에 진행하는 서원으로 창건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서원을 창건하여 윤선거, 윤증, 윤추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지방 유림의 교육에도 힘쓰게 된다. 

이후 산천재서원이 남긴 역사는 별로 찾아볼 수는 없으며 흥선대원군 시기 서원철패령으로 인해 훼철된 1868년(고종 5년)을 끝으로 복원되지 못했다. 

다만 1896년에 당시 산천재서원의 유림들이 세운 ‘명재윤선생사우지허(明齋尹先生祠宇之墟)’가 적힌 유허비만이 쓸쓸히 자리해 이곳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유계는 사후 여러 서원에 제향되는데, 임천에는 칠산서원(七山書院)이, 무안에는 송림서원(松林書院), 그리고 그의 북방 유배지였던 함경도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곳 산천재서원은 생전 유계가 직접 짓고 편액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선거 부자의 제향 서원으로 나타나는 점이 흥미롭다. 

또 다른 사연이 있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들 간의 깊은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산천재서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정에 나가고 친구에게 기꺼이 강학처를 맡길 만큼 돈독한 우정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산천재는 그대로 역사 속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재 산천재서원은 유허비만 남아 있을 뿐 이곳에 대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내력을 담은 표지판 하나 있지 않은 실정이다. 

여기서 더는 두 집안의 교유 내지는 충청오현의 자취는 더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천재라는 공간에 담긴 역사 역시 그대로 잊기에는 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적어도 자그마한 표지판이라도 남겨놓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비의 우정과 교유에 관한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가 답사를 마친 후에 느낀 작은 바람이다.

미촌 유선거
 미촌 유선거 유적지(사진=이연우 교수)

비운의 은사(隱士) 미촌 윤선거의 고향 이산(尼山)에 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진초 연구원

조선 중기 호서 5현으로 불리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유계(俞棨), 이유태(李惟泰) 등 다섯 명의 학자가 있었다. 

그들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17세기 양란으로 혼란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에 큰 공을 들여 후세에게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만진초 연구원
만진초 연구원

이번 답사도 역시 호서 5현을 중심으로 그들이 활동했던 역사 현장 답사다. 

현장에 서 있으면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특히 조선 후기 당쟁의 희생자로 생각된 윤선거 부자의 사적(事跡)을 들을 수 있겠다. 

◇시비(是非)가 얽힌 생전사후(生前死後)

1637년 한겨울의 강화도에 청나라 군대의 맹공으로 강화성은 곧 함락할 시점에 한 젊은 사내가 망연자실하였다. 부인과 친구들은 모두 준절하였다. 

그는 약속대로 자결해야 할 것인데 결국엔 홀로 성에서 빠져나가 살아남았다. 

조선 사대부가 무엇보다 명예와 의리를 으뜸으로 여겼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평생 자괴와 타인의 험담에서 살아야 갔다. 

이 사내가 바로 28세의 윤선거였다. 이후 고향인 노성(魯城)에 내려와 오직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비록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물론 당시 관직에 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세간의 비난과 내심의 자책으로 결국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향리(鄕里)에 은거해도 그의 삶은 여전히 평탄치 않았다. 

가까운 지난 친구로부터 원망과 질타를 받았다. 

그 때 그의 기분이 씁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지요? 당시 다른 친구 윤휴(尹鑴)는 사문난적의 낙인이 찍혔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 세계를 이해하여 옹호하였다. 이는 친구 송시열의 불만을 초래하여 결국은 교분이 끓어질 정도까지 되었다. 

1669년에 윤선거가 강화도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세상만사를 버리고 편히 쉴 수 있는 대가 될 것인데 이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그의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 관련해서 다시 시비가 생겼다. 

송시열은 죽을 때까지 사문난적을 두둔한 윤선거에게 강화도의 일을 가지고 야유한 묘갈명을 써 주었다. 

이에 아들 윤증은 몇 차례에 찾아가 고쳐주라고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아들도 송시열과 인연을 끊겼다. 이는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하여 이후 서인(西人)은 노·소론으로 분기하였다. 

그리고 친구 유계와 같이 편찬한 '가례원류'의 저작권 문제는 큰 정치 사건이 되어 노·소론 간의 대립을 한층 심화하였다. 

원래 사소한 문제였는데 당시의 정치와 연동되어 결국 국왕까지 나와서 ‘병신처분(丙申處分)’이란 재정(裁定)을 내렸다. 

노론은 승리하였다. 소론은 정국에서 축출되었다. 윤선거 문집의 판본은 소각되어 부자 두 사람에게 선정(先正)의 칭호도 쓸 수 없게 하였다. 

반면에 송시열이 죽은 뒤에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받고 문집 '송자대전'도 국가에서 편찬되었다. 

◇가려진 현장에서 역사 공간으로
 
윤선거에 관련한 역사 유적은 대체 충청도에 있다. 이는 그가 병자호란 이후 고향에 내려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윤선거 사후 1673년(현종 14)에 충북 단양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윤선거를 추모하는 송파서원(松坡書院)은 건립되었다. 

그리고 금산에서 과거 유계와 같이 학문을 연구하여 후학을 교육하는 공간인 산천재서원(山泉齋書院)이 있다. 

그러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각각 1871년, 1868년에 훼철되어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못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윤선거 집안에 관련한 가장 유명한 유적은 노강서원(魯岡書院)과 명재고택(明齋古宅)이다.

답사팀은 우선 파평 윤씨의 문중 서원으로 칭할 수 있는 노강서원에 갔다. 

노강서원은 1675년(숙종 1)에 김수항의 발의로 윤선거 아버지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창건된 서원이었다. 

이후 윤문거(尹文擧), 윤선거, 윤증이 차례로 추가 배향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이에 노강서원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노강서원의 강당이 해체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임시 건물이 강당을 덮어있고 마치 거대한 포장 박스에 집어넣은 듯하다. 

공사 현장 위험하여 비록 들어가서 자세히 볼 수가 없기만 새로운 노강서원의 모습을 많이 기대한다.

이어서 현재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명재 선생의 고택에 갔다. 

이 고택은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이 건립한 것이며 백제 시대 노성산성이 있는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택 앞에서 나오자마자 한옥 건축과 자연이 잘 어울리는 느낌을 들었다. 

특히 고택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수많은 장독대는 우리의 눈을 끌었다. 

2열씩 나누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며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도 편안해질 듯하다. 

그리고 바로 이 장독대 옆에 410년이 넘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다시 한 번 명재 고택의 오래된 역사를 알려주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며 이 고택의 주인도 몇 번이나 바꿨는데 이 역사의 공간에 서 있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감회를 줄 수 있다.

◇350년의 세월 끝에 얻은 화해(和解)

답사하는 동안 윤선거에 관련한 유적 정보를 검색하면서 최근에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종결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올해 2월에 대전광역시 우암 사적공원에서 은진 송씨와 파평 윤씨 그리고 광산 김씨 등 3개 문중 50여 명의 대표는 한 자리에 모였다. 

광산 김씨는 기호학파 예학의 본산인 김장생(金長生)의 집안이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역시 김장생에게 학문을 배운 바가 있었다. 

그들은 이이 이후 기호학파의 맥을 전승한 인물들이었다. 

모임 자리에 나온 3성 후손들은 문중 간의 대립과 반목을 청산하고 화합의 시대를 열기로 뜻을 표명하였다. 

서인의 종장 김장생 후손의 참석 하에 숙종 때부터 지금까지 350여 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회니시비는 올해에 와서 결국 문중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회니시비의 중심에 처하였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는 이 행사의 소식을 들어서 무슨 생각을 가졌을까? 

그리고 시비의 또, 하나 주인공인 송시열은 이에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이에 대해선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과거의 잘못이 바로, 그 때 해결되었으면 얼마나 좋은데 역시, 한(恨)이 있어야 이 세상은 진실한 존재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 당파 간의 싸움이 너무나 잔혹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 즉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은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런 극심한 대립의 구도에서 윤증을 비롯한 후배 소론은 붕당의 타파와 서로 간의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지향한 탕평책을 제시하였다. 

비록 끝에 소론은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후손은 조상의 정신을 이어져 대화를 통해서 화해를 실현하였다. 

그들이 가진 그러한 이념은 오늘날 화합, 존중, 상생의 시대 요구에 부응하여 정치와 국민의 통합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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