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속의 참 지혜, '민생과 백성' 중시한 '충청 5현'의 경세사상
상태바
국난 속의 참 지혜, '민생과 백성' 중시한 '충청 5현'의 경세사상
  • 김봉철 기자
  • 승인 2022.09.28 1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석우, "새로운 충청(기호)유학정신의 발현"
최영성, "나라의 위기 땐 언제나 '충청5현' 의 정신"
이연우,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민생 안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충청5현"
곽호제, "임병양란으로 피폐해진 나라 살리는 상소가 있어 조선 유지"
안소연, "진정한 '왕도정치' 의 실현이 그들의 필생의 염원"

 

초려 이유태 선생을 모시는 갈산서원 전경(사진=초려문화재단)
초려 이유태 선생을 모시는 갈산서원 전경(사진=초려문화재단)

[정리=뉴스캔 김봉철 기자] 최근, 민선 제8기를 맞으며 충청권의 정체성 확보와 그간 관심 밖으로 치부됐던 정신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 '충청(기호)유교문화권종합개발계획' 이 수포로 돌아가고 늦게 각성의 소리가 있었음도 사실이지만 지난 6월 지방선거로 광역지자체장이 모두 바뀌면서 더욱 기호유학에 대한 연구, 조사, 발굴사업이 첨예화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 임병양란을 거치며 조선 중기 이후는  충청(기호)유학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기호)유학은 조광조, 이이, 김장생, 김집을 위시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초려 이유태, 미촌 윤선거, 시남 유계 선생으로 일컬어지는 "충청5현" 이 그 중심이다.

이들 충청5현은 국정 전반의 혁신 개혁을 통한 민생안정과 부국강병 그리고 제대로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국왕의 솔선수범과 지도층의 개혁을 주창한 경세사상가들이다.

이에 뉴스캔은 초려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충청5현을 평가하고 이들의 사상과 정신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회는 초려문화재단 이연우 이사장dk 맡아 진행됐다.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 먼저 이석우 교장선생님, 우암 송시열 선생이 추구한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석우 전 용남고등학교 교장 : 우암 송시열은 동춘 송준길, 초려 이유태 등과 더불어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제자로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은 임병양란 이후의 정통 성리학자면서 정치가다.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이석우 전)충청남도 장학사
이석우 전 용남고등학교 교장

예송으로 당쟁이 심화되었을 때 서인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주장했으며, 성리학 바탕의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나라와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왕도정치는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니라 통치자의 인격과 덕성의 감화력에 의하여 평화적이고 순리적으로 다스리는 인정(仁政)의 덕치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를 통해 요(堯)·순(舜) 이래 하(夏)·은(殷)·주(周) 3대의 지치(至治)를 계승하는 것이다. 

‘왕도’라는 말은 『서경』 홍범편(洪範篇)의 “치우침이 없고 공정하면 왕도가 광대하며,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며, 뒤집힘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공자의 정치  사상은 덕치주의로 집약되는데 이의 방법론으로는 『논어』 학이편에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라 하여 다섯 가지로 그 핵심이 들어 있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최고의 정치 철학으로 정립하였는데 그 근거를 성선설에서 찾았다. 죽으러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 제선왕(齊宣王)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왕도정치 실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군주의 이러한 어진 마음이 구체적인 정치 현실에 나타날 때 바람직한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을 통한 민생 안정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항산(恒産)을 갖지 못하고서는 항심(恒心)을 갖기 어렵다고 하여 백성의 안정된 생업을 중시하였다. 

민생 안정을 위한 대책으로 공자의 말씀을 구체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 정전법(井田法)을 통한 자립적인 민생 안정 구축, 둘째는 침략 전쟁과 부역으로 백성이 농사를 지을 시간을 빼앗지 말 것, 셋째는 10분의 1의 가벼운 세금으로 생활의 안정을 보장해 줄 것, 넷째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 의해 저질러진 죄는 가볍게 처벌하며 연좌(連坐)를 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우암의 왕도 사상은 북벌 정책에서 가장 여실하게 보여 진다. 효종이 군대를 양성하여 연경으로 쳐들어가 북벌을 완성하고자 한 강경론자였다면 우암은 왕도정치를 위한 내수외양(內修外養) 즉 안으로 나라를 개혁해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워 먼저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효종의 북벌론이 정벌론이었다면 우암의 북벌론은 왕도정치를 앞세운 자강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암 북벌론의 핵심이었으며 존중화 양이적(尊中華攘夷狄)의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밀지 5신으로 산림들이 기용될 때 송시열은 효종의 왕자시절 대군사부를 지냈기에 산림 중에서도 가장 우대되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은 직후 기축봉사(己丑封事) 16조항을 올렸다. 이 봉사에서 ‘수정사이양이적(修政事以攘夷狄​)’으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이적을 물리칠 것을 주장하며 먼저 왕도정치를 시행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북벌을 해야 한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우암은 “지금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쳐들어가다가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굽혀 종사를 유지한 본의가 아니다.”, “마음을 굳게 정하여 원한을 쌓고 원통함을 인내하며 분노를 삭이고 조공을 바치는 가운데 와신상담하여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들의 형세를 관찰하라.”, “비록 중원을 쓸어 명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리와 안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657년에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 19조'를 건의하였다. 이 봉사에서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양민이 우선이고, 기강을 진작해야 하며, 군주의 사치를 억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군정을 서두르지 말고 민심을 얻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부역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용도의 무절제함을 없애 경비를 줄여 양병의 자본으로 삼아야 한다.”, “금위군이 교만하고 사나우며, 항상 도성에 모여 있어 군율이 엄격하지 못하다.”, “궁내 공주의 저택이 호사스럽고 희빈, 공주들과 함께 풍성함과 사치를 즐김은 성상의 마음이 방탕해져서 아랫사람을 단속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우암의 이러한 왕도 사상은 이른 바 공자가 말한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를 구체적으로 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현을 건의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향은 이후에 초려의 1659년 기해봉사(己亥封事)에서 집대성 되어 변통 사상의 정화를 이루어 국정전반에 걸쳐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최영성 교수님, 동춘 송준길 선생의 경세사상과 현대사회의 의미는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은 우리나라 유학자를 대표하는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이다. 

그의 경세사상은 한 마디로 ‘도학적 경세사상’이라 할 수 있다. 도학적 이상정치(理想政治)에 주안이 있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평생 주자학자로 살았던 송준길은 17세기를 주자가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북방 여진족인 금나라에게 유린 당했던 남송의 참담한 처지가 인조⋅효종 시대의 조선의 현실과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청복수론(大淸復讎論)을 내걸고 북벌(北伐)과 존주(尊周)를 주장한 것은 이런 시대 인식에 바탕을 두었다. 

리기론⋅심성론 등 철학사상은 송준길이 경세사상을 정련(精鍊)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주경(主敬)’이다. ‘경’ 철학은 천리를 간직하고 인욕을 막는 ‘존천리(存天理) 알인욕(遏人慾)’을 하기 위함이었다. 

또 그가 제시한 ‘존천리 알인욕’은 개인의 수양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경세 전반에 일관되었다. ‘철학의 현실화’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천리를 보존하고 대본(大本)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송준길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내수외양(內修外攘)을 제시하였다. 

안으로는 국내를 잘 다스려 이상정치〔至治〕를 이루고 밖으로는 오랑캐에게 복수하여 무너진 국가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선내수(先內修) 후외양(後外攘)’으로 방향을 정했음은 물론이다. 치병(治兵: 講武)이 양민(養民: 安民)을 앞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수론(內修論)은 공안(貢案)의 개정, 대동법의 확대 실시, 사창제(社倉制) 실시, 군역 부담의 경감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대안으로 구체화하였다.

송준길의 경세론은 율곡 이이의 변법경장론(變法更張論)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법과 제도가 중요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를 운영하는 도덕 주체로서의 치자(治者)의 마음가짐과 능력을 더 중시하였다. 

그가 ‘대본의 확립’을 입이 쓰도록 주장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천하의 이치는 본말⋅대소가 서로 떨어져 있는 일이 없다. 치〔寸〕가 잘못된 자〔尺〕는 자 노릇을 할 수 없고, 눈금〔星〕이 잘못된 저울은 저울 노릇을 할 수 없으며, 그물눈이 올바르지 못한데도 벼리가 제 구실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 것과 완전히 견해가 다르다. 

근본이 바로 서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견해와 법과 제도 등 구체적인 대안이 없이는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견해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두 학자에게서 제기되었다. 그 만큼 시대에 대한 인식차가 컸음을 보여준다. 

고대에는 성인(聖人)이 세상에 표준이 될 만한 가르침을 내려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민도(民度)가 낮았던 전근대 시기까지 성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소수의 양심적인 엘리트 집단이 ‘계몽적’, ‘교화적’ 차원에서 세상을 이끌었다. 우주의 원리를 담은 것이 ‘태극(太極)’이라면, 인간 세계의 표준은 ‘인극(人極)’이다. 제왕의 대중지정(大中至正)한 기준이 ‘황극(皇極)’이다. 

전근대 시기의 정치는 이 ‘극’(표준, standard)을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민도가 높은 오늘의 민주시대에는 지난날의 권위주의적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 ‘가치관의 다양성 시대’다. 

그러나 다양한 가치관으로 인한 충돌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성리학을 정교(政敎)의 이념으로 삼아, 인간에 내재한 천부(天賦)의 인성을 자각하고, 이것을 학술과 언론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적극 고양하고 실천하였던 학문 풍토, 정치 풍토는 정치공학만 난무하는 ‘철학부재’의 오늘날 정치와는 비교가 된다. 

‘천리를 보존하고 대본을 확립해야 한다’고 한 송준길의 경세사상은 근본이 무너진 오늘날 울림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기자: 여기서 기해봉사로 널리 알려진 초려 이유태 선생의 경세사상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신 이연우 이사장님께서  요약, 정리해 주시지요? 

▶기호 5현은 17C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경세제민하고자 온힘을 다했던 학자이자 정치가들이다. 

다섯 분이 산림에 묻혀 있거나 환로(宦路)에 있었던 기간은 서로 다르나 나라를 걱정하고 도탄에 빠져 있던 민초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일념은 하나였다.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당시에는 ‘경세(經世)’와 ‘경제(經濟)’는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자 하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오늘날 ‘경제’의 뜻은 생활하는데 있어서 필요로 하는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 economy의 좁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경제’의 뜻은 이른바 경세제민의 준말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커다란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기호유학의 발원인 율곡 이이가 ‘경제사(經濟司)’를 세우자고 말하였고 초려가 기해봉사에서 나라를 다스리며 개혁을 주도할 기관으로 경제사 설립을 다시 언급하였다. 

이 경제사는 바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최고의 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비변사(備邊司)사와 맞먹는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비변사는 당시 왜구와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여 출발했던 작은 기관이 후에 난리를 겪으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초려의 기해봉사를 통하여 기호학자들이 지녔던 경세사상의 핵심을 파헤쳐 본다. 이해를 돕기 위해 기해봉사에 쓰인 성어(成語)들을 그대로 인용하여 열 가지만 살펴보겠다. 

열 가지 만으로 그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단면은 쉽게 알 수 있다. 나머지 네 분들도 임금에게 기해봉사에 나타난 개혁의 실행을 적극 추천·건의했던 만큼 의견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첫째는 손상익하(損上益下)이다. 

이는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준다는 것이다. 이은 기해봉사에 보인 개혁의 방침이라 할 수 있다. 주역에 나와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둘째는 상행하효(上行下效)이다. 

이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 먼저 행해야 아랫사람이 본받아 행한다는 것이다.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팔로워도 따라 온다는 것이다. 관리와 백성도 마찬가지다. 손상익하와 상행하효는 기득권층에 가장 부담이 되었던 말이다.

셋째는 시관택재(視官擇材)이다. 

이는 관직을 보고 인재를 선택하는 것 즉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된다는 것이다. 친소(親疎)에 따라 벼슬을 내려서는 안 된다. 능력과 역량을 중시해야 된다. 특히 문과 과거시험에 활쏘기와 말타기 과목을 두어 문관도 무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봉공망사(奉公忘私)이다. 

이는 공무원으로 봉사하며 사적인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공적인 일을 빙자해 사익을 추구하는 탁공영사(托公營私)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상급 관리이건 하리(下吏)이건 멸사봉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동인일시(同仁一視)이다. 
이는 기해봉사에 보인 가장 중요한 표현으로 모든 백성들을 인(仁)으로 차별 없이 동일하게 하나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초려가 가진 경세사상의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이는 유학의 기본 이념인 왕도정치에서 나온 것이다.

여섯째는 인역일동(人役一同)이다. 

인역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행할 의무를 말한다. 인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역이며 조세의 납부도 이에 해당된다. 이 인역에 모두가 하나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반 계층이라 덜하고 상민·천민이라 더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는 정위통행(定爲通行)이다. 

이는 국가에 표준화 규정을 만들자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KS인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당시에 쌀로 납부하던 방식이 포로 납부하는 포납화(布納化) 방식으로 바뀌면서 포의 규격이 지역마다 다르면서 불만이 많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한 개혁방안이었다.

여덟째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이다. 

이는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한다는 국가 예산집행의 원칙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의 삶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양출위입하는 것은 예산을 집행하는 관리들만 편한 것이지 지출에 맞추어야 하는 백성들을 고려하는 예산 원칙이 아니다.

아홉째는 시상무용(市上貿用)이다. 

이는 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물을 바치는 폐단이 극심했다. 특히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고역의 극치였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대동법이었고 미납(米納)으로 대신해 받은 것으로 시장에서 구입해 쓰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 백성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상업의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도 되었다. 

열째는 금치습숭절검(禁侈習崇節儉)이다. 

이는 사치하는 풍습을 금하고 정약과 검소를 숭상하라는 것이다. 금치습은 구폐의 개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숭절검은 궁중의 쓰임새를 절약하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다. 궁중에서부터 사치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열 가지로 기해봉사에 보인 초려의 경세 방향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는 초려사상의 단면일 뿐이다. 어떻게 4만자로 된 역사상 최고의 상소문에 나타난 사상을 다 담을 수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기호 5현의 경세 사상도 큰 바다와 같기에 한 마디로 언급할 수는 없는 것이고 율곡과 사계로 이어지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므로 대동소이하하였기에 이로 갈음하는 것이다. 

◇곽호제 교수님, 미촌 윤선거 선생의 사상과 정신에 대해 부탁드립니다.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 윤선거(尹宣擧,1610~1669) 선생은 충청5현의 한 사람으로, 17세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그는 牛溪(우계) 성혼(成渾)의 외손자이고 八松(팔송) 윤황(尹煌)의 아들이며 明齋(명제) 윤증(尹拯)의 부친이다. 

곽호재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윤선거는 외가인 聽松(청송) 成守琛(성수침)과 牛溪 成渾으로부터 ‘隱居自守 聖賢自期(은거하여 스스로 지키고, 성현이 될 것을 기다림)’의 昌寜成門(창령성문)의 전통과 부친 윤황을 통해 坡平尹門(파평윤문)의 家學的(가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또한 尤菴(우암) 宋時烈(송시열)·同春堂(동춘당) 宋浚吉(송준길)·草廬9초려) 李惟泰(이유태)·市南(시남) 俞棨(유계) 등과 함께 沙溪(사걔) 金長生(김장생)·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의 문인으로 栗谷學派(율곡학파)의 학풍도 접하였다. 따라서 윤선거의 학문적 연원은 우계학파와 율곡학파의 接合點(접합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윤선거는 성리학, 예학,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16세기의 思辨的(사변적)인 성리학풍에서 벗어나 實踐 中心(실천 중심)의 道學(도학)과 實心(실심), 實德(실덕)의 務實學風(무실학파)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는 牛溪學風(우계학풍)이면서 동시에 栗谷學風(율곡학풍)이기도 하지만, 율곡 직계의 학풍과는 다소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결국 그의 학풍은 牛溪學(우계학)을 계승하였고, 이는 그가 禮訟(예송)이나 南人(남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포용성과 탄력적 대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의 개방적, 실학적 학풍은 그의 아들 명재 윤증을 통해 계승되었고 이후 少論派(소론파)들이 가세하여 牛溪學派(우계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1653년(효종 4)의 黃山(황산) 모임과 1665년(현종 6)의 東鶴寺9동학사) 모임에서 白湖(백호) 尹鑴(윤휴)를 대상으로 전개된 송시열과의 논쟁에서 윤선거는 학문적 개방성과 진보적 학문태도를 견지하였다. 

비록 송시열과 치열하게 논쟁하여 결말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윤휴의 『大學(대학)』과 『中庸(중용)』에 대한 새로운 解釋(해석)이 왜 잘못인가’라는 그의 항변은 ‘주자학만이 절대적이라는 당시 조선 성리학의 굳건한 牙城에 대한 용기 있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윤선거의 나이가 29세 때인 1636년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협상을 요구하자, 그는 對明義理(대명의리)를 위해 청 사신을 목벨 것을 상소하였다. 

이해 12월 병자호란 때 그는 權順長(권순장)·金益兼(김익겸)과 함께 강화도의 성문을 지키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권순장·김익겸과 妻(처) 公州李氏(공주이씨)는 자결하였으나,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는 병자호란 때 친구, 아내와 함게 죽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병으로 여겨, 과거를 포기하고 죄인으로 지내면서 懺悔(참회)와 反省(반성)의 삶을 살았다. 효종과 현종 대에 수십 차례 부름을 받고 천거되었으나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윤선거는 직접 세상을 경영해 보거나 관직의 경험이 없지만, 유학자로서 나라와 백성에 대한 憂患意識(우환의식)과 자신의 經世論(경세론)의 일면을 볼 수는 있다. 그는 왕에게 올린 上疏(상소)와 학문적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경세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경세에 있어 임금의 立志(입지)와 모범을 강조하면서 務實論(무실론)에 입각한 北伐大義(북벌대의)가 한갓 말로만 되어서는 안 되고, 실제로 군비를 갖추고 민생을 두텁게 하고 군사력을 준비해 內實(내실)을 기해야 된다고 보았다. 

특히 北伐(북벌)을 주도했던 송시열에게 名分論9명분론)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노력으로 내실을 기할 것을 충고하였다. 

그리고 개혁론으로 군사 대책, 과거제도, 인사제도, 대동법의 개정, 기강의 확립 등을 주장하였다. 윤선거의 경세론이 栗谷(율곡)을 비롯한 先儒(선유)들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평생을 참회 속에 산 재야의 處士(처사)로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우환의식에 투철했다는 점은 오늘날 이 시대에도 큰 가르침이 될 것이다.

윤선거가 1669년 59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송준길은 “師友(사우)간에 윤선거를 嚴憚之臣(엄탄지신)이 될 만하다고 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끝으로 안소연 박사님께서 시남 유계 선생의 개혁사상의 핵심에 대해 요약해 주시지요?                                                           
▶안소연 국민대학교 문학박사 : 시남 유계 선생은 1607년 선조 40년에 태어나 1633년 인조 11년 식년시에 합격하여 승정원 관리가 된 것을 시작으로 1663년 현종 4년 은퇴하고 1664년 현종 5년 57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유계 선생의 정치활동과 개혁은 크게 (1) 인조대에 정치에 등단해서 효종대 초까지와 (2) 효종대에 저술활동과 정치활동으로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완숙해진 경세 사상을 토대로 경세 활동을 해나갑니다. 

안소연 국민대학교 철학박사
안소연 국민대학교 문학박사

인조 11년(1633) 식년시 합격한 이후, 29세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계 선생은 시강원 설서로 재직하며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임천에 유배를 갔습니다. 

이후 풀려나 금산 마하산에 서실을 짓고 윤선거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가례원류>를 지었고 다시 조정에 불려서 주서와 무안현감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1650년 효종 1년 인조의 묘호에 “조(祖)”가 적합하지 않다고 상소하여 온성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영월로 이배를 갔습니다. 

특히 온성에서 보낸 유배 기간 동안 북쪽 지역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들었습니다. 『시남집』의 「초화」, 「삼독」, 「북승」, 「변창」, 「잠상」, 「엄졸」 등은 유배 기간에 쓴 것입니다.

1653년 효종 3년인 42세 때 유배에서 풀려나와 임천으로 돌아왔고, 43세 때 『강거문답』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욱 완숙한 경세사상을 제시하고 효종대의 개혁 정치를 이끌어갔습니다.

시남 유계 선생은 율곡학파의 경세론을 계승하고 이를 유계 자신이 목격·경험한 당대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변통하고자 공안 개정, 대동법 시행, 군정 개혁 등을 주도하였습니다. 

『강거문답』에서는 왕도정치에 입각하여 치도를 제시하고 당대 시무 정책에 대해여 정리하였으며,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이루려는 ‘무실(務實)’을 강조하고, 임관의 조목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도학적 측면이 먼저 준비 되어야 실제 개혁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민의 방책’에 대해서는 경장과 혁파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당대의 폐단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의지를 가졌으며, 상소를 통해 군정 개혁과 진휼책을 수시로 건의하여 실제 정책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정계에서 실제 정책을 주도할 때에는 율곡학파의 기본 원칙인 부국강병보다는 민생을 우선하는 ‘선양민 후부국강병’을 강조하였습니다. 

구체적인 방도로는 백성들에게 거둘 수 있는 조세의 양을 헤아려 국가의 경비를 조절하는 ‘양입위출’을 기반으로 한 공안개정 이후의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였으며, 양민이 부담하던 공납과 군역을 지주와 양반에게 부과하게 하는 ‘손상익하’의 조세개혁을 통해 대동법·균역법 및 여러 변통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효종~현종대에는 <유포사목>을 저술하여 군포 징수에 대해 의논하면서 ‘양민감필’과 ‘사족 수포’를 주장하고, 대동법·호패법·오가작통·향악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또한 <진휼사목>·<양남감진어사재거사목>을 지어 정계에 진출한 후에도 지방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강거문답>과 실제 정치 활동에서 지속적으로 군심(君心)의 수양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통해 인격적인 수양이 바탕이 되어야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고 나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정책을 시행할 때 바른 방향으로 시행하는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유계는 율곡학파의 경세론을 계승하여 당대 현실에 맞는 개혁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고, 개혁정책을 실현하기 이전에 군심(君心)의 수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며 경연을 주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도학적인 측면’과 ‘경세사상’이 유리되거나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유계 선생이 졸한 이후인 숙종 7년에는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계 선생이 쓴 <여사제강>의 간행을 청하여 허락받았고, 숙종 39년에는 좌의정 이이명 등이 <가례원류>의 간행을 주장하였는데, 윤증 등 소론 일파가 이는 윤선거와 공저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시비가 붙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가례원류>는 조선 후기 예학에서 가지는 위치가 상당했습니다. 이렇듯 숙종대에도 율곡학파의 사상을 이은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 세력이 유계 선생의 저서를 간행하였고, 그 경세 사상과 개혁안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