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용환, "우암 송시열 앞선 개혁정치, 왕도정치의 이상 구현"
이영자, "송준길의 의리와 도덕정신, 충청의 대표적인 민본사상"
유영봉, "초려선생의 지행합일 정신, 조선왕조 개혁의 핵심이었다"
황의동, "윤선거, 무실을 통한 인격의 성장, 나라의 발전, 민생의 증진 주창'
이연우, "시남선생의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 조선의 미래를 밝히다"

초려기념관
세종시 초려역사공원 내 초려기념관

지난 10월 1일 드디어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종학당 일원에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이 개원했다.

지난 2013, 12월 처음, 초려문화재단 주관의 '충청(기호)유교문화권종합개발계획' 을 위한 충청5현의 역사적 재조명 '전국학술심포지움' 에 이어 2021년 9월 서울 프레스센터 19F 기자회견장에서 충청5현의 역사적 평가와 재조명을 위한 그 두 번째 '전국학술대회' 가 개최된 이후 줄곧,
각계의 관심으로 충청(기호)유학에 대한 이해와 많은 연구가 추진 예정에 있고 학계는 물론, 지역에서 부터 그 당위성에 대해서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간 공주학, 천안학, 아산학 그리고 충남학 등이 진행되면서 실제, 충청(기호)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하기에는 우선, 지역에서 부터 관심과 참여와 협조가 부족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유관기관 및 관련단체 간 충분한 논의도 없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이제 서원, 향교는 연로한 노인들 밖에 없다. 대학이 무관심하고 다른 연구 성과에만 눈을 돌린다면 기약은 없다.

한국국학진흥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한국학연구원과 달리 이제 시작하는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되 결코, 지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 유교발전의 진정한 연구기관으로 거듭 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이에 뉴스캔은 초려문화재단과 공동으로 그 두 번째 충청5현에 대한 '언론좌담회' 를 각계 전문가들를 모시고 마련했다.

진행은 초려문화재단 이연우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편집자 주)

◇류용환 교수님, 우암 송시열이 실현하고자 했던 왕도정치의 완성은 무엇이었습니까?

▶류용환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그동안 역사학계 대다수는 남인 실학자는 개혁자, 노론 성리학자는 보수파라는 등식을 가지고 조선후기 모든 정책을 평가하였다. 

이러한 기조에서 보수파의 영수이자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로 우암 송시열을 지목해 왔다. 

류용환 목원대학교 교수
류용환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그러나 이는 유교망국론의 선입관에 입각한 시각이다. 아울러 성리학 북학을 단계적인 발전으로 인식하지 않고 성리학을 보수적인 사상, 이에 반해 실학은 개혁사상이란 도식적으로 대비시켜, 실학이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던 연구를 이어받은 결과이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를 계승하여 조선성리학에 입각한 요순삼대(堯舜三代)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신분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야 했다. 

당시에는 신분 차별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어떤 역(役·의무적 책임)을 부담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역 부담을 균등히 하면 당연히 신분 차별을 없애갈 수 있었다.

역에는 노비역과 양인의 군역이 있는데 이를 균등히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양반도 역  부담을 호포(戶布)로 해야만 천하가 모두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우암은 율곡 이이가 주장한 노비종모종량법(奴婢從母從良法 · 천인(노비 등) 아버지와 양인 어미니 사이에 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는 법)을 법제화시키고, 영조 때 시행되는 균역법의 전반적인 골격을 유계(俞棨)·이유태(李惟泰)·송준길(宋浚吉)과 의논하여 확립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양반호포론(兩班收布論)을 국론으로 부각시켜 나갔다.

반면 남인들은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관계와 같다(奴主猶君臣也)’라는 명분론을 내세워 노비종모종량법을 반대하였다. 

허나 우암 송시열은 인간은 노비나 양인이나 양반이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평등한데 현실에서 하는 역할에 따라 차별이 있다는 율곡의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에 입각해 노비혈통론 보다는 인간 평등의식을 가지고 노비해방을 시행해 갔다. 그리고 이는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잇는 노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한편 우암 송시열은 요순삼대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정전제를 시행하여 복지사회를 이루는 지공무사(至公無私 ·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한 경제정책을 우선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재용을 아껴 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야함(節用愛人 輕徭薄賦)’를 공맹지훈(孔孟之訓)으로 하여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솔선수범해야 하는 곳을 왕실로 지목하고 이를 위해 내수사(內需司) 혁파, 어공(御供) 등 왕실경비 절제, 공주저택 축소, 궁방전 혁파 등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에 기반을 이루는 대동법(大同法)은, 한편으로는 공납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미포(米布)로 거두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한편으로는 공물을 줄이는 공안 개정이 주장되었다. 

공안 개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 대동법은 오히려 왕실의 사치를 조장하여 농민 부담을 가중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송시열은 효종 즉위년(1649)에 올린 기축봉사에서, 임금부터 의(義)를 숭상하고 이(利)를 추구하지 않아야 신하들도 의를 숭상하고 이를 탐내지 않아 부정이 없어지고 기강이 바로 선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내수사(內需司) 혁파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임금부터 솔선수범하여 공물을 줄이고, 절검을 숭상하고 사치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전제로 하는 대동법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조선후기 현실에 맞게 실천하는 대동법을 율곡의 이념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실천해 갔다. 

이는 공물·전세·요역 모두를 합하여 10분의 1을 거두는 이상적인 정전제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현하여 달성하려는 국가재정이나 사적인 재산보다는 민생 안정을 기본으로 하는 구휼정책을 충실히 실천해 갔다. 

이는 사창제의 주장이나 환곡(還穀·빈민곡식대여)·포흠(逋欠·세금미납) 등의 탕감정책으로 나타났다.

이같이 우암은 율곡이 제시했던 조선성리학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역할을 달리하는 데서 나오는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정책을 주장하고 추진해 갔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은 맹자의 왕도정치를 살펴볼 수 있는 말이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는 말로, 백성들이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임금 자리는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생각이 통하던 시대에, 백성을 하늘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얼마만큼 안정된 생활을 제공하느냐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며 백성들의 실생활을 돌보는 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을 보수적이라 하려면 우선 당대의 뜨거운 이슈였던 노비제 문제나 양반호포론, 대동법 개혁, 구휼정책에 대해 우암이 어떻게 보수적인 정책을 주장하고 실천해 갔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그 결과 우암 송시열은 사회경제 정책 모든 면에서 당시 남인 세력보다는 물론이고 서인 정치세력들 중에서도 훨씬 개혁적이며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영자 교수님, 격변의 17세기 동춘당 송준길이 추구했던 정치와 ‘도의(道義)정신’은 무엇입니까?

▶이영자 충남대학교 교수: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은 17세기 격변의 시기에 도의(道義)의 유학정신을 발휘한 충청오현(五賢)의 한 사람이다. 

‘도의’란 ‘사람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덕적 의리’를 말한다. 

이영자 충남대학교 교수
이영자 충남대학교 교수

물론 그의 유학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겠지만,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출처지변(出處之辯)’, 인간과 사회에 대한 동기가 이익에 편중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리지변(義利之辯)’, 국제질서와 문화적 기반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화이지변(華夷之辯)’의 측면에서 볼 때, 모두 적절한 도의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도의정신을 중심으로 그의 유학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출처지변’의 측면에서 보면, 송준길은 25세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스스로 학문이 미천하다 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효종 즉위(1649년) 후에 독서지인(讀書之人)으로 천거되어 부사직(副司直)에 제수되었다. 

진선, 장령 등을 거쳐 44세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재임하면서는 당시 권신인 감자점의 탄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역임하면서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期年制)를 관철시키는 등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생 동안 조정에 머문 날들은 단 1년에 불과하다. 

이렇듯 출사 기간이 짧은 것은 그 스스로 권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의(義)’로서 진퇴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는 권세를 얻기 위한 출사가 아닌 도의에 맞는 적절한 출처지변을 실천하였다.

다음으로 ‘의리지변’의 측면에서 보면, 송준길이 의리를 무엇보다 중시하였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그가 조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효종 초기 북벌사업에 임해서이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을 인의(仁義)를 행하는 국가와 군주로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기해예송에서 기년복을 주장했던 이유도 효종이 이미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인의(仁義)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왕통(王統)과 종통(宗統)의 일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왕통이란 인의에 입각한 천명(天命)의 문제이므로 종통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그는 인의, 특히 ‘의’에 입각한 의리지변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화이지변’의 측면에서 보면, 송준길은 존주(尊周, 中華를 높임)의 의리와 복수의 뜻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매진하였다. 

그의 화이론의 핵심은 춘추(春秋)정신을 바탕으로 중화(中華)는 중화로 대하고 이적(夷狄)은 이적으로 대한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복수설치(復讎雪恥)’의 근거도 삼전도의 치욕에 대한 설욕이라기보다,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에 더 큰 명분을 두었다. 

그는 당시의 무도한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편적 가치로서의 준칙이자 행위규범인 대의(大義)에 합치되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한 세계는 폭력이 아닌 평화와 공존의 문화가치가 존중되는 대동(大同)사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예를 중시하고 명을 숭상하며 청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화이관에서도 도의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송준길의 삶과 사상은 마땅함, 의리, 도덕으로 점철되었고, 그러한 점에서 충청의 대표적 도의정신의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작금의 무도하고 혼란한 대내외 상황에서 송준길의 도의정신과 그 실천이 더욱 고귀하고 위대하게 느껴진다.

◇유영봉 교수님, 조선 경세사상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기해봉사” 를 통해 본 초려 이유태의 경세사상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유영봉 전주대학교 교수: 17세기에 활동했던 草廬 李惟泰(1607~1684)는 도덕·학문·경륜 등을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그리 현달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병자호란의 치욕 이후 오직 북벌대계를 출처의 근거로 삼았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출사관을 평생동안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유영봉 전주대학교 교수
유영봉 전주대학교 교수

그러나 조정에서는 북벌대계를 실천하려는 의지는 없으면서, 북벌을 함께 하자는 명분으로 초려에 대한 徵召(징소·부름)가 그치지 않았다. 

이에 초려는 ‘無可爲之勢(무가위지세·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이기 때문에 출사할 명분이 없음을 <己亥封事(기해봉사)>를 작성하여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進退之計(진퇴지계·들고나감의 계략)는 물론 북벌의 萬全之策(만전지책·만전을 기하는 계책)으로 제시했다. 

이는 2만여 자의 상소문과 별책으로 첨부된 향약책까지 합하면 무려 4만여 자에 이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장문의 상소문이다.

초려는 정치·경제·교육·군사·사회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구상된 <기해봉사>를 작성했지만, 효종의 서거와 함께 해를 넘겨 현종에게 올려졌다. 그 내용은 크게 時弊論(시폐론).救弊論(구폐론).聖學論(성학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시폐론은 당대의 폐단을 7가지로 나누어 밝힌 것이다.

1) 위로는(군주) 다스림을 구하려는 실상이 없다. (上無求治之實)
2) 아래로는(신하) 일을 맡은 실상이 없다. (下無任事之實)
3) 經筵에서 道를 강론하는 사람이 없다. (經筵無講道之實)
4) 학교에서 선비를 가르치는 실상이 없다. (學校無造士之實)
5) 여러 대책들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다. (群策無救民之實)
6) 사람들의 마음에는 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다. (人心亡向善之實)
7) 조정에서는 군주의 명령에 실상이 없다. (朝廷毋敎令之實)

초려의 일곱 가지 時弊論은 당시의 폐단을 군주·관리·경연·학교·정책·법령 및 국가기강 등 국정전반에 걸쳐 실상이 없는 無實의 악순환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기해봉사>가 처음부터 효종에게 올리기 위해 작성된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첫째, ‘上無求治之實(상무구치지실·‘윗사람은 다스림을 갈구하는 실공이 없음) ’과 둘째 ‘下無任事之實(하무임사지실·아랫사람은 일을 책임지지 않음)’은 향촌으로 내려온 초려의 이유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효종의 강력한 북벌 의지도 時勢(시세)에 따라 북벌에 도움을 주려는 신하가 없음을 알고 上下 모두 無實(무실·실상이 없음)함을 비판한 것이다. 

이에 초려는 독서를 통해 眞誠(진성·참된 정성)을 회복하고 知와 實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實質(실질)과 實行(실행)을 중시하는 實學的(실학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17세기 효종․현종 재위 시기 산림으로 중요한 역할을 점유한 초려는 산림으로 戰後(전후) 조선의 재건을 위해 평생 동안 개혁의 염원을 <기해봉사>를 통해 실천적 의지를 나타냈다. 

2. 구폐론에서는 시폐론에서 제기한 7가지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하여 3강령 16조목을 제시했다. 
3강은 救弊論은, 正風俗(정풍속). 養人材(양인재).革舊弊(혁구폐) 이다.

1) 正風俗 항목은 號牌制度(호폐제도)를 대신하여 향약과 五家統(오가통·조선시대 마을조직) 조직을 연계하여 향촌을 운영하고자 한 것이었다. 

즉, 오가통 조직을 기반으로 향약운영의 기본단위로 삼은 대통조직에서 교육제도·군사제도·구휼제도·자치제도 등을 효율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의 개혁안을 향촌에서 현실화시키고자 한 의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2) 養人材 항목은 學校(학교)․延英院(연영원·선비 기숙교육원)․科擧法(과거법)․五衛(오위·중앙 군제)․軍資別倉(군자별창)이다. 

주목되는 것은 五衛와 軍資別倉을 양인재의 항목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군자별창은 인재양성, 즉 養兵(양병)에 소요되는 경비를 책임져야 하는 경제기관이었으며, 損上益下(손상익하·윗사람이 손해를 보아 아랫사람 이롭게 함)의 원칙을 적용하여 운영되도록 구상한 것이었다. 

養民(양민)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양반에게서도 신역의 부담을 지게 하려는 군자별창의 운영원칙을 고려해 보면, <기해봉사>의 개혁원칙은 주자가 제기하고 송시열이 계승한 養民養兵必相妨論(양민양병필상방론)을 극복하고 양민과 양병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도록 구상한 것이었다.

3) 革舊弊 항목은 당시의 구체적 폐단을 內需(내수).貢案(공안).賦稅(부세).人役(인역).量田(양전).汰冗(태용).久任(구임·장기근무제).禁侈習(금치습·사치배격) 등의 8가지로 지적한 것이다.

3. 성학론에서는 군주의 수신과 제가를 강조했다.
1) 修己(수기) : 立志(입지).收斂(수렴).窮理(궁리).誠實(성실).養氣(양기).正心(정심).檢身(검신)
2) 齊家(제가) : 孝友(효반).敎世子(교세자)之法(지법).嚴宮禁(엄궁금).崇節儉(숭절검)

성학론은 초려가 개혁 실천의 성패가 君主一心(군주일심)에 달려 있다고 보고 비중있게 제기하였다. 성학론을 救弊策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철저히 율곡의 ≪聖學輯要(성학집요)≫의 차서와 내용에 의지하고 있어, 그가 제시한 개혁안의 출처를 짐작할 수 있다.

초려의 이와 같은 개혁론은 위민의식을 바탕으로 對民統制制度(대민통제제도)를 운영하려는 根本的(근본적)·同時的(동시적)·全面的(전면적) 改革論(개혁론)·損上益下의 원칙하에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均賦(균부)·均役論(균역론) 그리고 爲政者層(위정자층)의 솔선수범을 통한 國家紀綱確立論(국가기강확립론) 등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 밖에도 그의 개혁론에는 병자호란 이후의 時局觀(시국관)이 반영되어 북벌을 위한 양병의 기반이 되도록 구상된 것이었으며, 현실을 긍정하는 因時制宜的(인시제의적)인 學問觀(학문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황의동 교수님, 미촌 윤선거의 우계(牛溪)학문의 계승과 무실(務實) 학풍에 대하여 정리해 주시지요?

▶황의동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尹宣擧(윤선거·1610~1669)는 병자호란 때 斥和(척화)의리에 앞장섰던 八松(팔송) 尹煌(윤황)의 아들이며, 少論(소론)의 영수 明齋(명재) 尹拯(윤증)의 부친이며, 東國(동국) 18賢(현)의 한 분인 牛溪(우계) 成渾(송혼)의 외손자이다. 

황의동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황의동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그의 자는 吉甫(길보), 호는 魯西(노서) 또는 美村(미촌)으로 불린다. 그는 율곡학파의 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家學(가학)으로 외조부 牛溪 成渾, 부친 尹煌의 학문을 배웠다. 그는 병자호란 때 이른 바 江都(강도·병자호란때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윤선거는 부인과 친구들이 함께 성이 함락되면 죽기로 맹세했지만 청나라군이 들이닥치자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사건)사건으로 평생 반성과 후회로 살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선거는 宋時烈(송시열), 宋浚吉(송준길), 李惟泰(이유태), 兪棨(유계) 등과 친밀하게 교유하면서 17세기 호서유학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의 학문은 理氣心性論(이기심성론)에서 벗어나 실천유학에로 전향하면서 禮學(학풍)과 務實(무실)학풍의 진작에 주력하였다. 특히 그는 우계 성혼의 외손자로 외조부 우계 학문의 계승과 실천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후일 그의 아들인 명재 윤증을 통해 牛溪學風이 기호유학의 한 갈래로 발전하는데 기초를 닦았다.  

윤선거는 牛溪를 평해 말하기를 "牛溪선생은 학문과 門路(문로·학문의길)의 바름과 평생 進退(진퇴)의 의리가 순수하게 한결 같이 옛 성현으로 법을 삼았으니, 우리나라 先儒(선유)가운데 牛溪와 같은 분이 계시지 않다. 이는 내가 좋아하여 아첨하는 말이 아니니, 후세에 주자와 같은 분이 있으면 반드시 단정하여 말씀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牛溪 成渾은 栗谷(율곡)과 道友(도우)였지만 학풍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다. 

율곡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 이론가였다. 반면 우계는 율곡이 인정하였듯이 선비의 기상과 품덕을 갖춘 眞儒(진유)였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일찍이 교육에 전념하였다. 특히 우계는 겸양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진실한 마음(實心), 참된 덕(實德), 진실한 노력(實功, 實踐)을 강조하는 務實학풍은 외조부 牛溪의 학풍이면서 동시에 栗谷의 학풍이었다. 윤선거는 우계와 율곡의 이 務實학풍을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17세기 병자호란을 겪고 조선조 지식인들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 매달려 민생을 소홀히 하고 국력신장을 게을리 하였다. 대의명분론에 집착하여 실용, 실천을 등한히 해 백성들은 가난에 신음하고 나라는 무력에 빠져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윤선거는 이론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의 문집 속에 理氣心性(이기심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의 학문적 관심이 예학을 통해 잃어버린 유학의 正道(정도)를 회복하고, 實心(실심), 實德(실덕), 實功(실공), 實踐(실천)을 통해 務實학풍을 진작하여 민풍의 쇄신과 국력의 회복을 기하고자 하였다. 

朴世采(박세채)는 宋時烈(송시열)에게 보낸 글에서 "지금 魯丈(노장)의 학문은 비록 하나로 논하기는 어렵지만, 요컨대 그 대체는 스스로 牛溪의 가르침을 이었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아들인 明齋 尹拯은 朴世采에게 답한 글에서 부친의 학풍을 內와 實로, 尤庵(우암)의 학풍을 外(외)와 虛(허)로 구별해 설명한 바 있다. 

즉 윤선거의 학풍은 내면적인 자기수양의 학문이요 실용, 실천을 강조하는 務實학풍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아들 明齋 尹拯은 소론파의 영수로 朴世采와 함께 牛溪學派를 형성하고 務實학풍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 이러한 務實학풍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實心이란 인간주체의 성실한 자아를 확립한다는 말이다. 진실한 인간, 성실한 인간은 우리가 세워야 할 교육과 교화의 제일덕목이다.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하는 일이 다 거짓이고, 인격이 참되지 아니하면 부모도, 선생도, 대통령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實功, 實踐은 공리공담에 대한 대안이다. 세상만사가 실천이 없으면 그 무엇도 성사될 수 없다. 진정한 실천이야 말로 인격의 성장, 나라의 발전, 민생의 증진에 튼튼한 기초가 된다.  

◇시남 유계 선생이 주창한 17C 개혁의 핵심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시남(市南) 유계(俞棨) 선생은 충청5현 가운데 한 분으로 예학은 물론, 경세(經世) 분야의 구체적으로 의견을 개진, 주창한 대표적인 산림(山林) 학자이다.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우암, 초려, 미촌 선생은 과거(科擧)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동춘과 시남 선생은 일찍이 과거에 응하여 조정에 출사하면서 율곡, 사계 선생의 도학적 경세사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경세사상가이다.

이미 경세 사상으로 대표되는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적극 수용하여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집필하고 벼슬에 나아가 이를 직접, 실현하고자 했던 실무적 경세사상가 이기도 하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민본(民本), 인본(人本)사회의 실현에 가장 개혁적인 실천가였음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유계가 추진한 선양민, 후부국강병(先良民, 後富國强兵)의 위민정책과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재정정책과 손상익하(損上益下)의 조세정책을 보면 너무 잘 알 수 있겠다.

공안의 개정, 대동법의 시행, 군정 개혁 등 추진에 앞장섰으며 우암, 동춘, 초려 선생 등과 함께 구폐와 악습의 폐단을 청산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단행해야 한다고 역설한 데에서 선생이 추진한 민본, 애민사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실제 17C 서인계의 전형적인 산림으로서 북벌(北伐)과 예치(禮治)를 목표로 하는 산당(山黨)으로서 산림활동과 기해봉사(己亥封事), 예변 등 초려 선생의 사상과 정신에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이는 왕도정치를 바탕으로 한 저술 활동과 조정에 있으면서 안민(安民) 중심의 경세 활동을 펼치고 이를 직접, 수행해 왔다는 점에서 크게 대별 된다고 하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여 임천(부여)에 잠시 유배 되었다가 금산 마하산에서 미촌 윤선거와 가례집해(家禮集解)에 예서의 글을 붙이고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고 온성(穩城) 유배지에서의 시남집 잡저에 실린 북승(北僧), 변창(邊娼), 잠상(潛商), 삼독(參毒), 초화(貂禍) 등은 전란 후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이야기체의 단편 저술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백성의 삶과 애환 그리고 민생(民生)에 관심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북벌의 당위성보다 양민과 부국강병에 더 신경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군왕(君王)의 기본과 태도, 자세에 대해선 추상(秋霜)같은 요구와 자질을 요구하였다.

군왕의 수기(修己)를 가장 중요시해야 하며 입지(立志)를 세워 제왕치치(帝王致治)의 대업을 마땅히 삼대(三代)의 정치를 회복하여 왕도의 뜻을 세우고 요순(堯舜)의 치세를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패도에만 뜻을 두면 한당(漢唐) 시대의 소강(小康)에 그칠 뿐이니 삼대의 치세를 이루는 뜻을 가지고 먼저, 박시제중(博施濟衆) 한다는 뜻을 세우면 모든 백성이 그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 모두 나의 근심이고 수명예악(修明禮樂)한다는 뜻을 세우면 모든 정치가 삼대의 고도(古道)에 합치되지 못하는 것을 모두 자신의 병통으로 여기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진실로 뜻을 세워 성인이 되기를 표준으로 삼고 그러한 뜻으로 배움에 힘써야 삼대의 치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런 듯 유계의 개혁정치의 핵심은 군왕의 자질과 솔선수범을 우선하였고 지도층의 수양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이는 임병양란 이후 조선왕조 개혁의 가장 중요한 실체이며 지적이었으나 결국, 군왕의 무관심과 기득권층의 외면으로 수용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주요 정신과 발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한 왕조가 500년을 존속한 나라는 거의 없다.

시남 선생을 위시한 충청5현 같은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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