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민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민족과 민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이 시대는 어떤 386을 원하는가?
‘민주와 민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순 없는 일


우리 사회의 두 유명 인사가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우리사회내의 일부386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난다. 얼마 전에 고려대의 최장집 교수는 “이들이 정부가 되고 권력을 가졌지만, 비전과 현실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현 정국을 주도하는 일부 386을 비판했다. 2004년도에도 이 헌재 당시 경제부총리는 “386세력들이 정치적 암흑기에 저항운동을 하느라 경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정부의 경제정책이 한계에 부닥쳐 있다”는 발언을 통해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구체적인 실력과 비젼이 다소 결여된 일부 386을 향해 뼈 아픈 충고를 한 기억이 새롭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기반한 실용주의 노선보다는 관념론에 기반한 이념적인 노선에서 국가의 정책방향을 이끌어 갈려고 하는 일부 386세력의 시대착오(時代錯誤)적인 인식을 문제 삼은 것이다. 앞으로도 지금 정계에 진출한 일부 386세력의 입김은 여전히 우리의 국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일부 386이 매몰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편협성’의 원인을 그들이 추구했던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과 민중민주(People’s Democracy’)의 개념에서 답을 구하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이념을 잣대로 문제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회의 집단을 편가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풍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세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한 분단구조는 우리에게 정확한 국제정세의 인식 및 우리 사회의 제(諸)문제들에 대한 분석의 틀을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냉전시대의 소산인 이데올로기적인 이분법적 시각에 우리들의 눈을 고정하고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저해하는 사회 저항문화의 탄생을 매우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현재 우리사회의 집권세력이 된 일부 386은 ‘반공과 경제건설’의 슬로건에 묻혀 다양한 사회의 문제들을 발굴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학문의 전당이 되지 못한 대학가에서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못했고, 잘못된 기득권세력에 대한 증오감 및 제3세계 학자들의 계급갈등이론 및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세계체제론적인 시각에 매몰되어서 유연한 사고로 우리 사회의 비젼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신학문을 배우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생각이다.

남북의 분단이 낳은 이념 및 계급적 갈등과 흑백논리에 기반한 이분법적 사고의 여파는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민주투사 및 외세의 배격을 통한 자주적인 국가건설’이라는 모토를 기준으로 한 자신의 정체성(identity) 형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음지(陰地)에서 나름의 신념을 위한 고달픈 삶을 살아온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과 가족들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공동체의 문제에 자신을 희생을 하면서 이 민족의 문제를 고민해 온 이 땅의 투쟁가요 혁명가 들이었다.

군부독재시절에 양산된 군인정신에 투철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절대적 선으로 여겼던 일부 군부엘리트는 국가의 발전을 지상과제로 삼고 실천한 역사적 측면도 있지만, 대중들이 주인이 되는 문민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다소 국가에 대한 경직된 사고문화 대신, 자유와 민주를 상징하는 다소 관념적인 문화로 대체되면서 말과 논리가 실익(實益)에 앞서는 명분과 관념이 우선시되는 듯한 정치문화를 갖게 되었다. 과거사청산, 행정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이론적인 지방분권의 정책적 추구, 민족에 대한 강한 애착, 현실적 이득보다는 자주와 자존심에 기반한 국가정책의 추구 등이 다 이러한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문화의 토대에서 자라고 있는 지류들이라 생각한다.

386이 대학가의 지하서클에서 민주적인 투사로 거듭나는 일련의 학습과정을 통해서 갖게 되었던, 당시 재벌로 상징되었던 부패하고 부도덕한 기득권세력, 군사독재의 정권연장을 획책하고 있었던 일부 권위적인 정치군인 집단 및 이에 기대어 기생하였던 부패한 관료층, 대표적인 외세지배의 상징인 주한 미군, 기득권세력으로 성장한 친일파 및 그들의 후예들 등 은 척결과 배척의 대상이었다.

이들을 몰아내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우리끼리의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혁명가와 투쟁가를 자처했던 이들이 이루어야 할 새로운 역사적 과업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북한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분석에 기초한 이해보다는 다소 민족논리에 몰입되어 감정적이고 편협한 잣대로 북한이 정치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온 ‘주체’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털지 못하고 아직도 현 시대를 보고 사회를 진단하는 잘못된 시각일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소위 “주사파” 출신이라는 레떼르를 갖고 있는 일부 사회인사들이 아직도 혁명이 완수되어야 할 부정의가 충만한 대상으로 대한민국을 상정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면, 매우 빠른 속도와 큰 폭으로 변화하고 있는 국내외의 상황을 둘러싼 시대인식에 대한 적절한 교정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도 우선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많은 정책적인 준비와 토론으로 대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더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한다는 신념으로 일 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을 통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정치문화의 창달을 추구하여,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난 유연하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방향으로의 인식의 대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성이 결여된 혁명론을 날조해서 김씨 일가족 왕조를 공고히 하고 인민들을 우민화해서 일사분란한 병영국가를 만들어온 북한의 체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미래가 없어 보이는 고통 받는 우리들의 북한 땅 형제동포를 생각해 보라. 삶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인 식량과 사상의 자유마저 없는 그 삶을 생각해 보라.

만약, 과거에 주사파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지금도 우리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성장하여 활동하면서도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주체적 민족논리를 아직도 그리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혁명의 장으로서 북한사회에 가서 살아보길 권하고 싶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부와 명예를 일구고,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상식이 있는 시민이라면 그 누구도 거짓된 구호로 김정일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희생당하고 있는 북한의 구성원이 되려는 생각을 감히 하질 못할 것이다. 진정한 주체는 경제적인 번영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그들이 평등이라는 관념적인 구호에 매료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가난과 체제의 경직성에서 허덕이면서 대다수의 인민들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타개할 정책으로 과거에 가장 큰 적국이었던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경제발전을 꾀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외면하면 안된다.

필자도 우리나라의 아픈 현대사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386세대의 지식인이다. 1980년대 초 대학 재학시절, 학교 수업이 진행 중이던 대 낮에 반정부 구호를 외치는 한 여학생의 머리채를 끌고 경찰차로 유인해가는 학내경찰의 폭력성과 비 도덕성을 보면서 많은 고민과 방황의 삶을 산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나 시골출신의 청년이 갖고 있었던 순수한 애국심을 적개심으로만 고정시켜서 어두운 곳에서 투쟁만 하는 삶을 살진 않은 필자지만, 적잖이 고민하고 그릇된 권력구조하에서 저항의 의미와 약자의 설움을 익히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갈망해 온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필자는 ‘민족’이라는 구호에만 나를 가두지 않고 더 큰 비젼과 용기로 ‘우주론적 세계’라는 담론을 가슴에 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地球村)을 더 객관적으로 알고 푼 욕망에 편협한 이념서적의 굴레를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접하는 많은 독서를 하였으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유학 길에 올라서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의 문제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시골출신의 젊은이가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서 열악한 조건을 감수하면서 행한 노력은 눈물겨운 측면도 많이 있었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행한 피눈물 나는 노력들도 있었다. 외국의 정부 장학금으로 유학을 하면서 서럽게 느낀 우리사회의 일부 잘못된 구조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필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일부 지도층들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분석을 할 수 있는 분석의 틀이 없이 단지 지엽적인 민족 및 외세배척의 문제에 몰입되어 과거의 낡은 틀로만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 하는 데서 올 수 있는 국가적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장집 교수가 진보진영의 후배들에게 한 말은 그 의미가 자못 크다는 생각이다. 그는 “ NL은 민족자주에, PD는 민족해방에 매달렸으나 기층 민중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좋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로서 관념론에서 벗어나고 있질 못한 이 땅의 일부 경직된 386에게 뼈아픈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386세대의 층은 일부 언론이 보도하는 특정층을 겨냥하는 것보다 훨씬 두껍고 넓다. 이젠 386을 이야기 할 때 이념적으로 경직된 일부 운동권 출신들만을 염두 해 둔 발언은 자제했으면 한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고민으로 한 시대를 살아온, 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대다수의 건전하고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의 새로운 비젼을 개발하고 국민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국력을 모아서 국가의 방향을 바르게 이끌어 갈 준비된 386이 많이 있음도 우리 사회의 지도층 및 국민들 알았으면 한다. 문제는 널려진 이러한 보배들을 어떻게 꿰매고 조직화 하느냐 이다.

실용주의에 기반한 386은 이념적으로 모호한 경계를 설정하고 ‘진보’니 ‘보수니 하는 무의미한 이념논쟁에서 국가발전의 답을 얻을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이고, 제대로 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국가와 국민에게 이로운 흐름이고 정책이라면 언제든지 팔을 걷어 붙이고 동참할 것이다. 앞서서 이끌어 갈 준비가 된 균형 잡힌 386에게 국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소신을 갖고 나라를 이끌어 갈 참된 용기를 주길 바란다.

2005-04-23 박태우(대만국립정치대 외교학과 객좌교수, 국제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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