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적 성과주의가 빚어낸 함정을 경계하며

단기적 성과주의가 빚어낸 함정을 경계하며
핵(核) 합의가 빠진 절름발이 남북회담
조급한 성과주의가 불러올 “남북한 비핵화선언” 무력화의 함정

그 동안에 남북한간에는 많은 합의문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안보와 가장 밀접한 ‘남북한 비핵화선언’은 아직 문서상의 합의로 남아있지만 남북간에 실질적 문제해결을 위한 흉금을 턴 대화를 통한 접근이 되질 않고 있다.

1992년에 이 선언을 채택한 이후에도,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국제사회와 우리정부를 속이면서 체제보장을 위한 핵 개발에 북한 국력의 대부분을 투입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북한은 인도적 명분으로 우리 정부로부터 더 많은 현금과 물자지원을 위한 회담을 부분적으로 진행했지만, 정작 우리 민족의 최대 안보현안으로 등장한 핵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해 왔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 번의 남북차관급 회담도 북한의 이러한 속내를 확인하는 사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부는 국민들을 상대로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마치 이 번 회담에 큰 성과를 거둔 것처럼 홍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질을 비켜간 이 회담을 어떻게 잘된 것이라고 홍보할 수 있는가?

회담합의문에 단 한 줄도 이 중대한 핵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에서 그 동안에 실패해 온 우리 정부의 대북(對北)정책의 현 주소를 읽을 수 있다. 고작 합의한 것이 비료 20만톤 지원과 남북장관급회담의 평양개최, 그리고 6.15 5주년 행사에 우리의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 이라니, 북 핵(核) 상황의 다급성과 중요성을 알고 있는 필자 같은 국민에겐 정부의 안이한 대북인식 및 접근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 번에 합의문에도 담지 못한 내용이 다음의 장관급회담에서 무슨 근거로 합의를 통한 성과가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북한은 이미 올해 2월에 외무성의 대변인을 통해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내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원칙적인 남북합의’를 위반하고 있는 북한정부를 상대로 따지지 못하고 얼렁뚱땅 ‘평화’니 ‘화해’니 하면서 실체도 없는 합의문을 우리 국민들에게 들이밀고 있단 말인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당정 연석회의에서 앞으로 열린 장관급회담에서는 정치.군사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의제를 끌어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동안에 남북간에 합의된 가장 큰 현안인 비핵화에 대한 선언을 깨고 핵 보유를 선언한 북한을 상대로 무슨 합의로 어떠한 신뢰성에 기반하여 남북관계를 이끌어 갈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도 많다.

물론, 이 번의 회담을 통해 정부의 주장대로 북 핵 위기관련 우리의 생각과 북한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전달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 대원칙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지엽적인 문제에 합의를 했다고 해서 큰 그림이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핵 실험이라는 마지막 수순만 남긴 북한에게 우리 정부는 더 단호하게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합의를 지킬 것을 원칙적으로 단호하게 주문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이를 따를 의사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여타의 의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순서가 옳은 것이다.

아직도, 남북간에 합의된 사항들에 대한 불이행에 대한 점검도 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 대한 새로운 합의만 하는 것은 후대의 정권이 추구할 대북정책의 큰 틀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이다.

지금부터라도, ‘한반도 비핵화합의’에 대한 북한의 분명한 의지를 확인하고, 납북자들에 대한 생사확인 및 귀환문제를 우선순위로 거론하면서 북한이 진지하게 회담에 응해 우리와 쌍방간에 신뢰성을 갖고 대화를 할 태도변화가 있는지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이제는 두루뭉실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식의 합의가 의미를 갖는 시기는 벌써 지났다. 남북간의 대화채널이 실증적인 의미를 갖기위한 신뢰와 검증의 단계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이행을 위한 우리정부의 단호한 협상원칙과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

정부의 담당부처와 일부 편협된 인식을 하고 있는 정파의 안이하고 낙관적인 식견을 담은 이 번 회담결과 홍보를 접하면서 정말로 이 정권이 국민들의 바람과 염원을 제대로 담아내고 이끌어 갈 실용주의.검증주의에 기반한 비젼과 철학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번 회담결과를 놓고 담당장관이 무엇을 밝은 마음으로 국민들에게 보고를 한다는 것인지, 어떤 국민들이 이러한 정부의 홍보에 동조한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다시 ‘한반도의 비핵화원칙’을 단호하게 원칙적으로 따지지 못하는 장관급 회담이 된다면 아무리 많은 인도적인 합의가 도출이 되어도 이는 정부의 가장 큰 국민에 대한 책무인 안보에 대한 크나큰 직무유기를 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문제를 제외하고 기타의 분야인 이산가족상봉, 경의선.동해선 도로개통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도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가 되어서 또 다시 북의 대남전략에 말려드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북 핵의 가장 큰 당사자이면서 6자회담 회원국인 우리를 제외하고 미국과의 직접담판을 통한 핵 게임을 벌이는 북한정부의 태도가 지속된다면, 우리 정부도 단호한 결단으로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우리의 우방들과의 강력한 공조로 강경책(sticks)을 쓸 수 있는 참된 용기도 있어야 대북유화정책도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난 13일에 조셉 디트러니 미 국무부 대북협상대사가 비밀리에 유엔 주재 대북대표부를 방문하여 박길연대사에게 “김정일 정권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외교활동을 한 직후 미국정부의 고위관계자는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 휴전상태의 종식 및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들이 미국정부의 북한에 대한 외교적 노력의 한 예이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뜻과 함께 19일자 와싱턴 발 아사히 신문을 통한 인터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6자회담의 틀(framework) 내에서의 북미양자회담 가능성을 포함, 미사일수출, 인권문제, 마약과 위조화폐 밀수 등이 거론되면서 대화로서 해결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아사히의 보도대로 이 번 디트러니 대사의 북한대표부 방문이 6자회담 존속여부가 걸린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있음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

왜 북한은 우리 정부를 왕따로 하면서 미국과의 담판을 내세우는가?
왜 북한은 핵개발을 통한 체제유지에만 관심을 갖는가?

답은 간단한 것이 아닌가?

유일주체사상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종교적 도그마에 기반한, 필자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개인적으로 정의한 ‘가부장적 전체주의 정권’을 억지로라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자 유일한 김씨 일가 정권의 기댈 언덕이 핵 개발과 협상을 통한 시대를 거스르는 독재정권 유지전략인 것이다.

고통 받는 북한의 일반주민들의 입장에선 하루빨리 개선.개혁되어야 할 북한정권이지만, 중국식의 개혁개방으로 인해 정권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특권세력들의 선택은 너무나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북한정권을 상대로 단호한 원칙의 천명을 통한 비핵화 의지를 실천한다는 우리정부의 일관된 전략부재 및 단기적 정치적 성과주의에 급급한 대북접근은 우리 민족에게 더 큰 짐을 가져올 확률이 높기에 걱정을 하고 또 하는 것이 아닌가?
2005-05-21 박태우(대만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 객좌교수, 국제정치학)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