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다시 생각한다.

민족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 왔다. 그래서 헌법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 헌법의 제정권자임을 선언한다.

민족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랑과 긍지가 대단할 것이다. 우리 민족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 우리를 제외하고 몇이나 될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장구한 세월을 버텨온 우리 민족의 생명력은 어떤 시련에도 고갈되지 않는다.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 민족에 대한 사유(思惟)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도 인류문명의 격동과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단위(單位)로서의 ‘민족’을 분명히 인식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또 민족지상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민족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저 단군 성조(聖祖)의 고조선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때로는 다수의 국가를 이루며 발전하고, 때로는 통일국가를 이루며 발전해 왔다. 광대한 대륙을 아우르기도 했고, 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조금도 약화된 일이 없다.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은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 했지만, 그 민족의 정체성을 축으로 한 역사의 물줄기는 단절되지 않고 더 강화되어 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렇게 나는 역사창조의 단위로서 민족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국가는 국민을 구성원으로 한다. 여기에서의 국민은 민족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민족이 혈연과 문화의 개념인 반면에, 국민은 정치적, 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단일민족국가이다. 고대국가들은 대륙을 아울렀고, 그래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도 포용하는 국가를 운영하였으나, 고구려, 발해의 멸망 이후 단일민족국가로 일관해 왔다.

세계를 보자. 미국, 중국, 러시아 정도가 다민족을 포용하는 국가일 뿐, 대부분의 국가는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은 다민족일 뿐만 아니라, 다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전 세계로부터 이민개척이 끊이지 않고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신 민족과 인종이 역사 창조에 중요한 단위로 작용하고 있다.

다민족국가라고 하지만, 중국은 한족(漢族)이, 러시아는 슬라브족이 절대 다수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 실제로는 단일민족국가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민족은 역사 창조의 바탕이자 주역이지만, 그 자체가 지향하는 가치는 아니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치의 실현을 통하여 민족은 더 왕성한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여기에서 민족 그 자체를 가치로 인식하는 민족지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가치의 경쟁을 함몰시키고 권력을 독재의 함정으로 빠뜨리기 일쑤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민족이 공존한다. 민족마다 기질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과 추구하는 가치가 같지 않다. 일정한 기준을 놓고 보면, 우열(憂劣)을 가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역량에 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민족을 얕잡아보는 우월의식은 잘못이다. 나는 민족우월주의를 반대한다. 그것은 패권주의로 직행하여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고, 나라를 고립으로 몰고 가 비극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인류학적, 언어학적 기원은 전문가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다만, 우리 민족이 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로부터 오늘의 몽골, 중국의 동북 3성(옛 만주지역) 그리고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을 터전으로 문명을 개척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광대한 지역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이 어떻게 이동했으며, 또 어떻게 다른 민족과 섞이며 진화되어 갔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를 필요로 하는 과제이다.

어디까지를 우리 민족으로 인식할 것인가? 혈통의 순수성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의 혼혈을 우리 민족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인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민족은 우리 관념으로 선 뜻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 유대의 딸과 이민족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유대민족이지만, 유대의 아들과 이민족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유대민족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의외로 설득력이 있다. 유대인은 혈통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 완성된다. 유대 어머니의 품안에서 유대인의 영혼을 가진 어린이로 양육될 때 진정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문화를 기준으로 우리 민족의 범주를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혈통, 언어, 역사, 전통, 관습 등 문화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은 우리 민족이다. 따라서 변경(邊境)의 민족 범주는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잊혀진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국력이 커지고 우리 민족의 문화역량이 확대될수록 민족의 외연(外延)은 넓어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대륙민족이다. 반도의 민족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핏속에는 대륙적 기질이 뛰고 있다. 기마민족의 역동성, 유목민족의 이동성이 넘친다. 발길이 닿는 곳이 삶의 영역이지 좁은 논두렁이 삶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분단의 악조건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숨에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바로 여기이다. 특히 속도와 이동성이 강조되는 현대의 디지털 문명에 우리 민족이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활동무대가 반도로 축소된 지 오래이다 보니 우리의 의식마저 대륙의 호방함과 웅혼함을 잊고 있다. 상무(尙武)의 정신은 문약(文弱)으로 변질되고, 적을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내부에서 찾으려 한다. 도전과 개척정신 대신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창조의 정신을 억누른다. 자주적인 운명의 개척보다는 큰 힘에 굴종하고 약한 것을 멸시하려 한다. 오랜 세월 정착 농경사회가 가져온 부정적 단면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단면을 뒤집으면 된다. 아주 쉬운 일이다. 없는 것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저 대륙의 기질을 깨우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크고 강한 민족이다. 결코 약소(弱小)민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 외침에 시달리고, 특히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약소민족이라는 의식이 아직도 우리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국가의 비전과 목표 그리고 전략을 세워나가는 데에도 엄청난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약소하다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않다.

우리 민족의 수효(數爻)는 남북한과 해외를 합쳐 7,600만 명에 이른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보다 많고 독일의 8,000만 명에 육박한다. 국민총소득(GDP) 규모도 러시아를 능가한다. 이들 나라를 약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루 빨리 우리가 약소민족이라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열등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 단군성조의 건국이념을 한마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한다. 수직적 지배보다는 수평적 번영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우리민족이 타민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침략전쟁을 벌인 예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평화를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평화의 적을 용납하지 않는 강인한 정의감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끝없는 외적의 침략을 받았지만 절대로 굴하지 않는 정신을 보유한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미래의 세계는 평화의 정신이 지배한다. 우리 민족이 시대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뛰어난 문화 창조 역량을 갖고 있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世紀)이다. 문화 창조의 어머니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억압당하는 곳에서 문화의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문화의 세기인 21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무한한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하지만 잡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자유의 가치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오늘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낡은 이데올로기는 자유의 가치를 억누른다.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의 다양성과 사회 구성의 다원성을 무차별적인 획일성으로 대체하려 한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교활한 선전 선동이 동원된다. 뜻있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금이 투쟁을 강화해야 할 때이다. 자유의 가치가 힘을 잃으면 문화의 꽃은 시들어 버린다. 우리는 21세기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인류가 창조한 고급종교를 모두 포용하고 이를 눈부시게 발전시키는 민족이다. 종교는 문화의 원류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관과 가치관의 정수(精髓)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민족이 이렇게 여러 종교를 포용하는 경우가 우리 민족을 제외하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불교를 받아들여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전파되자 완전히 우리의 문화로 성숙시킨 다음 세계를 향해 맹렬히 선교활동을 한다. 우리 민족 전통의 종교문화도 왕성하게 발전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까지는 힘이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한다. 하나의 민족이 여러 종교를 포용할 때, 내부의 통합이나 단결에 어려움을 격을 수도 있지만, 그 다원적인 세계관과 다양한 가치의 융합을 통해 나오게 될 폭발적인 문화 창조 에너지는 다른 어떤 민족도 가질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 된다.

우리 민족은 이미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의 민족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그렇지만 그 민족이 문화 단위로 세계 도처에 민족사회를 구성하여 발전하고 있는 민족은 몇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중국민족, 유대민족 그리고 우리 민족 정도이다. 이 사실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미래는 지구가 하나의 촌락이 되며, 문화의 경쟁력이 궁극적으로 빈부를 가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시대를 대비해,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세계경영의 민족적, 문화적 거점을 이미 완성해 놓은 셈이 된다. 역사의 섭리요,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은 역사창조의 가장 중요한 주체이다.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 전제로서 우리 민족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요구된다. 우리 민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그래서 게을리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안과 밖에서 격렬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창조한 찬란한 고대사를 중국이 침략해 온다. 어떻게 이를 막아내고 지킬 것인가. 잠시 영토를 짓밟히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역사를 빼앗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것은 민족의 혼을 상실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싸워야 한다.

우리 내부의 사정은 어떠한가.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는 놀라운 맹목이 판을 치고 있다. 이 광란의 바다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며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체제가치를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을 21세기 새 역사창조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투쟁이다.

2005. 8. 25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