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 청주성모병원 내과

 
이제 건강보험공단에서는 모든 병의원의 처방을 실시간 모니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DUR 사업은 세계 초유의 슈퍼 빅 브라더의 출현입니다. 인터넷 보안의 취약성을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들 공무원에게는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오전에 병원 근처 사는 선배가 거의 기어오다시피 외래에 왔습니다. 제가 출근하기도 전에 제 진료실 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어제 오후부터 목 아프고, 춥고 떨리고 열이 펄펄 나고, 머리는 빠개질 것 같고……. 목 안을 들여다보니 편도가 퉁퉁 부었고 그 위에 백태까지 끼었더군요. 전에도 가끔 편도염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죠.




평소에 제가 편도염이나 열성질환을 진료하지는 않지만, 아파 죽겠다는 선배를 다른 과 진료하라고 할 수는 없어서, 진통제와 항생제 처방을 하고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부터 밥 한 끼도 못 먹었는데, 속이 안 좋아 약을 먹지도 못하겠고, 직장에 출근은 해야겠으니, 진통해열제 주사라도 놓아달라고 하네요.




먹는 약으로도 대부분 충분하지만, 이런 경우 저도 진통해열제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심정이 이해가 되어 처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먹는 약에 처방한 해열제와 주사제가 비슷한 약이라서 처방이 불가능하다고 컴퓨터에 뜨네요. 아, 이게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 심평원의 야심에 찬 사업 DUR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 초유의 슈퍼 빅 브라더, DUR 사업


원래 DUR은 12세 어린이에게 사용해서 안 되는 약을 걸러내는 것, 병용하면 부작용이 심각한 약을 걸러내는 것이죠. 나이나 병용처방에 따른 부작용을 감시하는 장치입니다. 저는 DUR을 적극 찬성합니다. 무식한 의사도 있고, 실수하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니 이런 안전망을 국가차원에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죠. 하지만 바보의사가 아니면 같은 계열의 진통제라고 하더라도, 위험-이익을 고려해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병용금기가 일반적 권고사항이라고 해도 의사는 이를 고려해서 넘어설 수 있는 것이죠. 이런 경우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 시스템은 안 하니만 못한 시스템입니다.




이제 건강보험공단에서는 모든 병의원의 처방을 실시간 모니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DUR 사업은 세계 초유의 슈퍼 빅 브라더의 출현입니다. 인터넷 보안의 취약성을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들 공무원에게는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정보, 특히 의료정보를 보안이 취약한 인터넷으로 실시간 전송 및 모니터하는 것은 절대해서는 안됩니다. 전국적 인터넷망의 해킹이나 마비도 문제이지만, 개인 의료정보가 유출되었을 경우 인터넷을 통한 빠른 확산은 개인의 파멸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병으로 치료받은 병력이 인터넷에 오픈되거나, 응급 피임약 처방자가 공개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피임약을 먹은 여대생의 가족과 친구, 학교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며 사람들은 왜 약을 먹었는지 별의별 상상과 추측을 할 것입니다.




몰래카메라로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촬영하여 유포하는 것 이상의 개인 말살능력이 있는 것이 개인의 의료정보입니다. 작은 산부인과의원에서 하루 진료한 환자의 진단명 없는 이름만 유출돼도 큰일 날 사람이 줄을 설 것입니다. 저 같은 내과에서도 암이란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은 않은 환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의 실수로 처방한 비슷한 약물이 환자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예방하자는 목적은 망각하고, 의사를 통제하고 비난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하니 ´한국식 의약분업´처럼 엉터리 제도로 이어질 수밖에요.



 


강력히 통제하면 의료의 질이 올라간다!?


얼마 전 어느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민주당 강기정 국회의원의 말입니다.




“의료는 한없이 강력하게 통제하고 감독하고 감시하여야 의료의 질이 올라갑니다.”




군대에서 중간관리자를 족치면 사병이 편해질까요? 성경책에 나오는 세리들을 쥐어짜면, 유대인들의 삶이 윤택해지던가요? 통제라는 것은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를 넘어서는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인 정치가 바로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것을 이해를 못하거나, 알면서도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주장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통제 제일주의 정책의 결과, 저는 제가 아는 사람이 열이 40℃까지 오르내리고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비슷한 성분의 진통해열제를 함께 처방해서는 안 된다는 공무원 나리들의 규칙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보험심사과에도 문의를 해보았지만, 정부에서 정한 것이니 방법이 없다더군요.


 


비대해지고 관료화된 공무원조직과 일을 해보신 분들은 제 심정을 아실 겁니다. 국회의원과 공무원을 무한대로 감시하여야 공공서비스와 국회/법의 질이 올라갈 것이라고 하면, 저분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진보를 지향하는 분들이 빅브라더(big brother)에 찬성하고, 획일적 통제 정책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회민주주의, 법치주의, 의료,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이런 정책이 바로 빈대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거죠), 고의적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심각히 우려됩니다. 전문가를 기득권으로 등치하여 불합리한 통제를 합리화해서는 안됩니다. 공론의 장에서 점검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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