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푸른 물결(9)

희망의 푸른 물결(9)
한 반 년쯤 전일까. 나는 우연히 한 종교인을 만났다. 그는 꿈을 연구하고 꿈의 해석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처지가 불우하게 느껴져 위로를 하려는 의도였는지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의원님, 역대 대통령은 다 필연의 이유가 있어서 출현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 없는 한(恨)을 풀기 위해 등장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배고픈 한을 풀기 위해 등장했지요. 전두환, 노태우는 관성(慣性) 때문에 나타난 대통령이니 의미가 없고, 김영삼 대통령은 독재에 억눌린 한을 풀기 위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광주의 한을 풀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

“만일 김대중 대통령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호남 사람들이 광주의 한을 품고서 어떻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노 정권은 좌익(左翼)의 한을 풀기 위해 나타난 정권입니다. 해방 이후 좌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큰 억압을 받아왔습니까. 그들도 어떻게든 한을 풀어야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돌아오지 않겠어요.”

나는 그의 현대사를 보는 관점에 흥미를 느꼈다. 우리 민족을 한(恨)의 민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하나 국민들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한을 풀어나가는 관점에서 역대 대통령의 출현을 해석하는 그의 논리에 전적인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노 정권의 출현이 우리 역사에 큰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가장 강력하게 역설한 사람이다. 그 핵심 세력이 매달리고 있는 이념이 이 시대에 뒤떨어진 그리고 낡아빠진 좌파의 세계관이자, 시대착오적인 북의 주체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주장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노 정권 사람들도 자신들이 좌파라는 규정을 반박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이번에 밀려난 이 전 총리는 자신들을 중도우파라고 우겼다.

그러나 거짓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엊그제 노 대통령이 인터넷 대화를 한 모양이다. 보도를 보니 그가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로 규정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는 우파의 고전(古典)인 자유주의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정부는 공정한 경쟁의 틀과 합리적인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일 외에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좌파와 태생적으로 친할 수 없는 이론인데 좌파 신자유주의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소련을 비롯한 동 유럽에서 볼쉐비키 사회주의 혁명이 한창일 때 히틀러가 사회주의 혁명을 극렬 반대하고 우파 파쇼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노선을 국가사회주의라고 우겼던 일이 생각난다. 사회주의면 사회주의지 국가사회주의는 또 무엇인가.

하여튼 대통령 스스로가 늦게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좌파라고 규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가 이번에 새 총리 지명을 하였다. 바로 한명숙 의원이다. 언론을 통해 여론을 살피니 대체로 긍정적인 것 같다. 하나는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권 대모(代母)로서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 때문인 것 같다.

한나라당도 그녀가 당적만 이탈하면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한 의원과 함께 같은 정당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매우 온화하고 사려 깊은 분이라는 좋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세계는 어떨까.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북한체제로 통일을 추구한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 가까이 복역한 남편을 뒷바라지 하며 가슴에 쌓였을 한(恨)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 종교인의 말대로 노 정권이 좌익의 한을 씻기 위해 나타난 정권이라면 정말 깨끗이 그 한을 씻고 우리 국민 모두가 손을 잡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총리로 지명된 한 의원도 국민 앞에 떳떳한 자세로 그 한의 실체와 그 한을 어떻게 씻어 왔고 또 어떻게 씻어낼 것인지를 명쾌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조국인지, 또 시대의 고아로 고통 받고 있는 평양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무엇인지, 진솔하게 말해주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총리란 대통령의 유고시 바로 국가를 좌우하는 막중한 자리이니 말이다.

나는 그 종교인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타날 대통령은 어떤 한을 풀어줄 사람인가요.” 그는 다음 대통령은 바로 민족의 한을 풀어줄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의 한! 위대한 저력의 우리 민족이 품어 온 천년의 한! 대륙을 호령하던 민족이 쫒기고 쫒겨 한반도로 위축되고, 그것도 모자라 망국(亡國)에 이어 분단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민족!

이제 그 한을 푸는 길은 무엇인가.

바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지식강국과 문화대국의 비전을 가지고 국민의 통합을 이루며 쉬지 않고 전진하면 어느 사이 우리는 통일조국의 시대를 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족의 한을 푸는 길이다.

그 시대를 위하여 망국의 한, 배고픈 한, 광주의 한, 좌익의 한을 씻어내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었단 말인가. 과정이 고통스러워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이 민감한 한반도의 정세변화 속에서 궁극적으로 가야 할 우리의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이?통일의 시대를 열자. 지식은 강하고(智識强國) 문화는 큰 나라(文化大國)를 만들자. 우리 민족 모두가 꿈을 향해 보람찬 삶을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나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돈이 그 위대한 아침을 열기 위한 진통임을 믿는다.

2006. 3. 27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