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캔/과학향기】최근 중등학교 수학문제들 중에 한붓그리기라는 주제로 위상수학이 소개되고 있다. 과거 중등교육 과정 중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양적인 면에서 많이 발전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극히 일부만 접할 수 있었던 수학문제를 지금은 중등교육 과정의 모든 학생들이 그들의 수학시간에 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홍수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난다.


 



위상수학의 학문적 바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복소수, 원주율, 적분, 함수 등을 표시하는 기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오일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철학자 칸트의 생활공간이었던 독일의 괴니히스베르그의 주민들이 가졌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일러의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도시를 관통하는 프레겔이라는 강과 그 내부에 고립된 두 섬 사이에 7개의 다리가 있었다. 주민들은 프레겔 강변의 어느 한 쪽에서 출발해 7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지나서 되돌아올 수 있는 산책로를 알고 싶어했다. 오일러의 결론은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는 산책길은 없다.’였다.



 


오일러는 주민들 눈에 보이는 다리와 땅을 종이로 옮겨 놓았다. 실재 세계를 머릿속 추상적 세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오일러의 머릿속 공간에서 다리는 선으로 땅은 점으로 보이고 그 사이를 힘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면서 논리를 세우고 문제의 해답을 찾았고, 이렇게 해서 위상수학은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상수학이 중등교육에 도입되는 이유는 현대생활에 있어서 그것의 유용성 덕분이다. 한붓그리기에서 시작된 위상수학은 지하철 노선의 계획, 반도체 집적회로의 설계, 컴퓨터의 기억장치 배열, 세일즈맨이나 여행가들의 최적 경로 찾기 등에 이용되고 있다. 실재하는 이 세상의 경제적 활동영역에 넓게 응용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한붓그리기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위상수학은 최신의 물리학에도 이용되고 있다. 물리학은 운동과 공간의 형식을 갖는 추상적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런 물리학의 형식화는 17세기 말 뉴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공간 속에서의 변화 또는 운동은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힘이라는 것이다. 자연에서 물체가 움직일 때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모두 알게 되면, 원인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미래의 특정한 시간에서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된다는 원리다. 이후에 물리학자들은 힘의 역할을 대신하는 에너지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추상적 세계의 묘사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물리학에서 형식화의 틀이 20세기 초에 크게 바뀌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때문이다. 뉴턴의 물리학 형식에서 공간은 단순히 연극의 무대배경과 같다고 보았다. 연극이란 희곡을 바탕으로 인간 삶의 변화무쌍함을 배우가 몸짓과 언어로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무대는 특정한 시대 또는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뉴턴 이래로 200년 넘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무심코 믿어 오던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시공간은 관심의 대상인 물체와 무관한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아인슈타인은 상황에 따라 그 표정과 몸짓을 달리하는 무대 위의 배우로 바꾸어 놓았다.



 


시공간이 고정불변이 아니고 변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빛이 움직이는 경로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전까지 모든 물리학자들은 빛은 곧게 뻗어 진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의 근처를 지나는 빛은 물체의 존재가 원인이 되어 그 시공간 자체가 휘어진다고 생각했다. 휘어진 공간을 따라 빛이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그 경로도 휘어질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1919년 개기일식을 이용하여 검증되었다. 시공간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뿐이지 물리학의 눈과 손에는 보이고 만져지고 때때로 이곳에 있을 때 저곳에 있을 때 그 성질을 달리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간의 틀을 깨뜨린 것이 양자역학이다. 입자가 운동하는 것은 그것에 미치는 힘 또는 그것이 가지는 에너지 때문이다. 그런데 입자의 운동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은 그 입자가 가지는 에너지의 증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뉴턴은 멀리 있는 입자들 사이의 상호 영향력을 미칠 때 그 사이의 공간은 무대배경처럼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그 입자들의 존재로 인해서 공간의 이곳저곳에서 다른 값을 갖는 필드 또는 장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입자가 운동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입자 에너지의 증감을 장이 주거나 받게 되어 자연스럽게 입자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양자역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입자가 제한된 영역에 구속되어 있으면 그곳에서 에너지는 연속적인 값을 갖지 못하고 띄엄띄엄한 값만을 갖게 된다. 다른 값을 가진 상태로 변하게 되면 그 차이만큼의 에너지 덩어리, 즉 입자를 외부로 방출하거나 외부에서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이 에너지를 가지며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각기 장마다 고유한 입자를 만들어내거나 그 입자를 다시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동안 텅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던 공간은 오히려 장이라는 것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더불어 입자가 생성되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물리학의 형식에 있어서 큰 변화는 100년 전에 시작되었다. 현재 새 이론들은 낡은 이론이 잘 들어맞는 실험적 조건에서도 낡은 이론과 똑같은 예측을 함으로써 물리학의 대응원리를 만족시키고 있다. 뉴턴 역학이 포함된 물리학을 굳건히 지켜주는 2개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큰 변화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거대한 우주를 하나의 얇은 막으로 생각하는 M-이론이 그것이다. 올여름 유럽 입자물리학연구소의 LHC의 가동과 더불어 언론매체에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 M-이론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오일러에 의해서 개발된 위상수학의 도구들을 많이 빌려와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간 해석에 있어서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물리학의 버팀목 2개를 1개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머릿속 세계에서 11차원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수와 공간으로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수학자들은 이러한 고차원의 세계를 많이 탐색해 놓았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차려놓은 공간의 밥상 위에 입자들의 운동을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말은 쉬워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안성맞춤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에서 출발선을 넘어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최첨단의 순수 물리학으로 세계 곳곳의 인재들이 이 일에 참여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의 두드러진 기여는 없다. 앞으로 한붓그리기와 같은 추상세계에 빨리 익숙해진 지금의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큰 기대를 해본다.



 


우리들 눈길이 닿는 곳에 색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또 다양한 모양의 선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삭막한 세상인가.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미술의 유용함을 믿으면 추상화란 결코 쓸모없는 그림이 아니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 젊은 세대의 활약은 추상적 세계의 가치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 사회적 인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추상적 세계의 근본은 실재세계다.



 


글 : 김태연 과학칼럼니스트




 


 




김태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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