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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빛된교회)


4:1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4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김 집사는 내가 이 곡을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마구 운다. 여기 아버지는 내가 효도해 드리지 못했던 육신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나를 구원하신 전능하신 우리 주님이시기도 하다.


 



솔로몬은 자식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 기록이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의 여자들이 천명이나 되었으니 아마 굉장히 많은 자식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르호보암이다. 솔로몬은 아마 르호보암을 포함한 아들들을 불러 앉혀놓고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들었던 훈계의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다시 자식들을 훈계하였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훈계의 효과는 썩 좋지 않은 듯 하다. 일찍이 아버지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들은 하나님의 훈계는 이렇다. 네가 나의 전을 지을 것이 아니라 네 자식이 지을 것이다. 그 나라를 내가 영원히 견고케 해 주겠다.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범죄한다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지만, 그래도 네 앞에서 폐하였던 사울로부터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삼하 7:12-15). 훗날 그는 여자들 때문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왕상 11:9).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그의 오만함 때문에 결국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결국 자신도 아들들도 이 교훈의 말씀들을 지키지 못하고 만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열두 가지 훈계의 말씀을 하신다. 모두가 명령어이다.



첫 번째 명령어는 “들으라” 이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1절).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잘 들어야 한다. 1장 8절에서는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라고 하여 들어야 할 대상이 단수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다. 단수든 복수든 의미는 동일하다. 하나님 앞에서 택함 받은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를 원하시는데, 히브리어의 어순은 ‘들으라’1)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사 44:1).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사 48:12).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 12:29)고 하셨다. 여기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모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명철(understanding)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음으로써 가능하다. 당신은 평소 어느 곳에 더욱 당신의 귀를 기울이는가? 사단의 속삭임인가, 사람의 소리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6-29).


 



두 번째 명령어는 “떠나지 말라” 이다.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2절).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면 그 다음은 들은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선(善)한 도리(道理)2) 이다. 그것은 내리는 비와 같고, 맺히는 이슬과 같으며,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와 같고, 채소 위에 내리는 단 비와도 같은 것이다(신 32:2).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남 원망하기 좋아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레카흐’라고 하였다(사 29:24).


 



다윗이 죽기 전 어느 날,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대표자들과 신하들과 군대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후계자임을 천명하였다. 그 자리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사람들 앞에 불러 세워놓고 공개적으로 당부를 하였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하나님은 사람의 깊은 심중까지 감찰하신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그러나 떠난다면 어떻게 되는가? 버리신다. 언제까지? 영~원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다. 당신은 열매 맺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라. 그리고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권세를 누리라.


 



세 번째 명령어는 “두라” 이다.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4a절).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행동이라면 두는 것은 적극적인 행동이다. “마음에 두라”3)는 것은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두 손으로 꽉 붙잡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다. 마음판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들었던 훈계이다. 그는 부모에게 있어서 “유약한 외아들”이었는데, KJV은 ‘유일하게 사랑받는(only [beloved]) 외아들’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시편 119:9-16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고 하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말씀을 마음에 새겨 우리 자신이 심비(心碑)가 되자.


 



네 번째 명령어는 “지키라” 이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4b절).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행동하는 신앙인이다. 성경에는 믿는 자들에게 지키라는 말씀이 수없이 나온다. 그것은 모두 명령어이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생명과 연관된다. 지킬 때 산다. 이 땅에서 누리는 짧은 생이 아니다. 말씀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는 말이다.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이다(약 2:17,26). 그리고 그는 지금 과녁을 잘못 겨누고 있다.4)


 



다섯 번째 명령어는 “얻으라” 이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5a절).



‘얻다’5) 라는 말 속에는 장사꾼이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적 의미가 들어 있다. 지혜와 명철은 후한 계산을 하고 살만한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큰 값의 진주와도 같다.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얻어야 할 값진 진주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자이시고, 평안을 가져다 주며, 능력의 원천이시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여섯 번째 명령어는 “잊지 말라”는 것이다.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5b절).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멸하지 아니하시며,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신다(신 4:31). 하나님께서 반문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러시면서 언약을 하신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누가 잊는가? 은혜 받은 자들이다. 받은 은혜가 사흘을 못 간다. 그리고 까마귀 밥 먹듯 까먹고는 불평하고 원망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신당부하신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2).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 9:7).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신 25:19).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내 입술을 타고 나올 수 있도록 해 보자.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시 119:83).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시 119:109).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141).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누구를 위해 고통을 참으시며 절규하셨던가? 택함 받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죄 값을 치르시는 고통이 아니었던가? 그 속에 나의 죄와 허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었던가? 그것을 잊으면 은혜를 모르는 자이다. 속담에 “개도 기르면 은혜를 안다”고 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 갚자.


 



여덟 번째 명령어는 “버리지 말라” 이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6a절)


 



지혜를 버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버리다’(아자브, בזע)는 말은 원어상 ‘떠나다, 포기하다’(forsake)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믿음에서 떠나는 경우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믿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가장 큰 이유는 시험 들어서 떠났다고 한다. 목사한테 시험 들고, 집사한테 시험 들고. 그러나 가만히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핑계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이 오히려 수월하다.


 



야고보서에는 두 가지의 시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외적 시험(test, trials)이다. 이는 인내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시험이 오면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다. 이런 시험을 참은 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주신다(약 1:2-12).


 



또 하나의 시험은 사람의 욕심으로 인한 시험(temptation)이다. 마음속에서 생기며,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기 때문이다. 미혹케 하는 것은 마귀이다. 이런 경우 정확한 용어는 사실 시험이 아니라 유혹(델레아조, δελεάζω)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고 하였다.


 



지혜를 버린다고 하여 반드시 신앙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말씀의 교훈을 하나 둘씩 버리기 시작할 때의 끝은 자명하지 않은가? 지혜를 완전히 포기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고, 이리와 늑대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목자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아홉 번째의 명령어는 “사랑하라” 이다.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6b절)



누구를 사랑하란 말인가? 의인화 된 지혜를 말함이지만, 주님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사랑의 자녀들을 많이 만들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채우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사랑의 언어로 속삭이시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사도 요한이 말년에 제자들에게 하였다는 말은 유명하다. 제롬(Jerome, 347-420)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극히 늙었을 때에 에베소에서 청년들이 그를 의자에 앉힌 채 강대에 올려 두면, “소자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드디어 제자들과 교부들이 “선생이여, 왜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하시나이까?” 하고 물으면 “이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이시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만 행하면 족하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사랑과 계명과 복은 서로 연결고리로 엮어져 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말씀의 실천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임마누엘이 되시어 함께 하신다.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힘이 되신다는 말이다.


 



열 번째 명령어는 “얻으라” 이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7절)


 



5절에서도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얻어야 할 지혜가 제일임을 일깨운다.2) 그리고 최고인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소유한 모든 것을 과감히 투자하라고 한다. 5절과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5절이 지혜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에게 그 가치를 일깨워주면서 얻어야 할 대상이라고 훈계한 것이라면, 7절은 반드시 얻어야 할 당위성을 말함이다. 그리고 얻되 더욱 풍성히 얻어야 함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자, 이제 눈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께서는 단지 당신이 “이제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든지 “예수님, 사랑해요~”라는 말만 듣기를 원하시는가? 주님은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기기를 바라시는가? 아니다. 그것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신랑이 되시기를 바라시고,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연합의 관계로 맺어져야 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별개의 인격체의 만남이 아니다. 둘은 하나이다. 하와는 아담의 몸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둘이지만 원래는 하나이며, 이제 별개의 인격체인 지금 둘은 연합의 관계로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고 하셨고(요 14:20),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어찌하든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하셨다(요 15: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옛사람인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으로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서 얻은 보물이며, 나를 통해 드러내기를 바라시는 권세다.


 



열한 번째 명령어는 “높이라” 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8a절)



‘높이라’는 의미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3) 그러나 가장 적합한 의미는 주님을 높여드리라는 뜻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4,32 ; 25:17,43 ; 왕하 17:39 ; 시 34:9)고 하신 바로 그 명령이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보다도 자식들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에게 자식들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오늘 날에도 자식이라고 하면 모두가 껌뻑 죽지 않는가? 그런 성도 앞에서 목사라고 눈치 없이 함부로 말했다가는 당장 보따리 싸들고 이웃 교회로 가버린다. 예배 때 아이들이 떠들며 왔다 갔다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타일러야 한다. 엘리 제사장의 자식들은 얼마나 버르장머리가 없이 못되게 자랐던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솥에 삶을 때면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쿡쿡 찔러서 마음대로 가져갔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도 고기를 강제로 가지고 가곤 하였다.


 


어느 날 여호와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나를 존중하는 자들을 내가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은 천대하겠다는 말씀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사도들이 권능를 받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자 이적과 표적이 쏟아졌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 사도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들을 풀어주었다. 천사의 지시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새벽 설교를 하는데 옥졸들이 나타나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웠다. 추궁하는 그들에게 베드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29-31).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6-9). 그리스도인 속에는 이미 성령이 계시다. 비천한 자를 성전 삼으시고 높여주신다.


 



열두 번째 명령어는 “품으라” 이다.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b절)



사랑하는 자를 품으라4). 품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을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가서이다. 그 표현이 너무나 진하여 어떤 부분은 수줍음이 밀려온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2,3).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6,7).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아 8:1-4).


 



마치 연애하듯이 지혜를 가슴에 품으라. 정말 예수님을 가슴에 품으라. 그리고 사랑의 고백을 해보라. “예수님, 사랑해요.”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품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좌소(座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과 혼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NIV). 당신은 정말 주님을 가슴에 품고 마음으로 사랑하는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맏형격인 베드로에게 이 사랑을 확인하시는 사건으로 마무리 짓는다.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당부하신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두 번째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전과 동일한 답변을 드린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당부하신다. “내 양을 치라.” 세 번째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시니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하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셨을까? 아시면서도 짐짓 베드로의 가슴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의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사랑의 고백은 주님을 가슴으로 품은 자만이 할 수 있다.


 



아비의 훈계를 즐겨 듣는 자에게 약속의 보장을 하신다.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8b,9절).



마지막 날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행한 일들을 물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상급으로 갚으실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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