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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목사 빛된교회



잠언 6:-19



아들에 대한 계속되는 훈계는 네 가지의 경고이다. 각 사항은 한 주제 아래서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지혜이다. 그것은 조사 연구한 결과 도출한 결론이 아니다. 경험에서 나온 산 체험들이다.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아니다. 지금 당장 내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참 지혜이다.


 



첫째, 경솔하게 보증을 서지 말라.



보증(保證)의에 대한 국어사전적 정의는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대신하여 채무를 이행할 것을 부담하는 일”(security)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해서 돈을 빌린 사람이 제 날짜에 갚지 못하면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는 빚보증이다. 빚보증은 무서운 것이다.


 



보증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보증을 언급한 곳은 모두 잠언서로 본문 외에 5회 나온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잠 11:15).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잠 17:18).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잠 20:1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잠22:26).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잠 27:13).


 



보증을 서는 일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이다. 보증을 서면 손해를 입는다. 보증을 서는 일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며, 어리석은 짓이다. 보증을 서려면 최악의 경우 몸이 팔리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한다. 보증에 관한 대단히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보증을 죄악시하여 전적으로 금하는 금지 명령은 아니다. 이웃 혹은 타인의 부채를 충동적으로 인수하는 것에 관하여 실제적인 방법을 다루고 있다. 충고는 사려 깊은 관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도박을 추방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 자체를 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에 대한 자선이 자주 권면 되었는데, 성경은 돈을 빌려줄 경우 형제로부터 이자를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고(레 출 22:25,26 ; 레 25:36,37 ; 신 23:19,20 ; 시 15:5 ; 겔 18:8,13,17),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출 22:25-27).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 신규 임용을 하거나 회사에 신규 채용할 때 사람 보증(人保證)을 두 사람씩 세우도록 한 때가 있었다. 인보증에는 무한책임이 따랐다. 지금도 은행에서는 대출을 받을 때 보증이 필요하고(대부분 담보물로 대체되긴 하였지만), 관공서에서 무슨 허가를 받을 때 보증을 요구한다. 보증에 따른 부작용은 막대하다. 점점 보증을 세우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짐에 따라 보증보험 제도가 생겨 이제는 이 보증보험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들에게는 보증의 위험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인이라 할지라도 거절하기 어려운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에 이를 물리치기란 대단히 곤혹스러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칫 인간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고, 원수처럼 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보증을 서야 할 경우에는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빚을 갚지 못함으로 인하여 채무자나 보증인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채권 추심을 담당하는 부서나 전담 회사 또는 심지어 폭력조직까지 합세하여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가해져 오는 압박은 때로 장기(臟器)를 팔아야 하고, 인신(人身)이 매매되기도 한다. 이런 위험성이 따르므로 만약 보증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충고한다.


 



“아이들아, 네가 이웃을 도우려고 담보를 서거나, 남의 딱한 사정을 듣고 보증을 선다면, 네가 한 그 말에 네가 걸려 들고, 네가 한 그 말에 네가 잡힌다. 아이들아, 네가 너의 이웃의 손에 잡힐 것이니, 어서 그에게 가서 풀어 달라고 겸손히 간청하여라. 잠을 자지도 말고, 졸지도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 새가 새 잡는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듯, 어서 벗어나서 너 자신을 구하여라”(표준새번역).


 



온전한 보증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후 1:22).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5:5).


 



둘째, 게으른 자가 되지 말라.



게으른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경고이다. 게으름뱅이들을 위하여 가장 작으면서도 부지런하기 그지없는 개미를 예로 든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6-8절).


 



개미는 두령(頭領)도 없고, 간역자(看役者)도 없고, 주권자(主權者)도 없지만 먹을 양식을 위해 여름에는 준비하고, 가을에는 거두어 들인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음 받은 사람이 어찌 하찮은 개미와 비교되어야 하겠는가?



게으름에 대한 책망은 계속된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9-11절).


 



이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많이 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 12:27),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잠 19:2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 26:14),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잠 26:15),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 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9),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 31:27),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전 10:18).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게으른 자에게 호통을 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미 너희를 택하여 수종(隨從)들고 분향하게 하셨으므로 게으르지 말라고 하신다(대하 29: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신다(롬 12: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벧후 1:8).


 



공부를 잘 하고 싶거든 부지런하라. 부자가 되고 싶거든 부지런하라. 남보다 뛰어나고 싶거든 부지런하라. 기도의 용사가 되고 싶거든 새벽부터 부지런하라.


 



셋째, 쓸모없는 자가 되지 말라.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그러므로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하리라”(12-15절).


 



공동번역을 보자. “거짓말이나 하며 돌아다니는 불량배, 협잡꾼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 손짓 발짓으로 신호를 해 가며 마음이 비뚤어져 나쁜 짓을 꾸미고 자나 깨나 말썽만 일으키다가 갑자기 재앙을 만나 순식간에 아주 망하고 만다.”


 



불량한 사람이란 쓸모없는 사람을 말한다. 불량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알지 못한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두 아들은 언약궤 옆에 있었지만 전쟁에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겼고, 전사하였다. 사무엘상 2:12에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하였다. 불량자는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인간이다.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 왕 아합은 욕심쟁이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은 지중해의 항구 도시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을 이스라엘로 끌어드린 장본인이다. 아합왕의 궁 가까이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작은 포도원을 경작하고 있었다. 포도원은 기름지고 아름다웠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싼 값으로 매입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나봇은 한사코 포도원 밭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아합은 이 일로 드디어 병이 들었다. 아합이 꾀를 내었다. 두 비류를 내세워서는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고 다닌다고 백성 앞에서 거짓 증언토록 하였다.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왕상21:13). 나봇은 공개 재판 결과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고, 아합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거짓 증언한 두 비류, 과욕을 부린 왕, 이를 부추긴 왕비 모두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시편 101:3,4에서 다윗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서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고 하였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보람차게 살아야지, 궤휼한 입을 벌리며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눈짓 발짓 손짓으로 음흉스럽게 뜻을 보이며 남을 해치고 골탕 먹일 못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디에다 쓸 것인가? 그 끝은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하리라” 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세 이전부터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셨을 때에는 각자 쓸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국적인 목적은 모두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라고 부르셨다. 이 땅에 살 동안에도 그릇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각자 합당한 그릇을 만드시고, 풍성한 은혜의 선물(은사)을 주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그릇을 갈고 닦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짓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으로 일반적인 온전수 7을 사용하여 거론한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16-19절).


 



이를 다시 정리해 보자. ① 교만한 눈 ② 거짓된 혀 ③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④ 악한 계교(計巧)를 꾀하는 마음 ⑤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⑥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⑦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등이다.


 



시선을 하나님께 맞추고, 푯대를 바라보아야 할 눈이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궤휼과 사곡을 버려야 할 입술에서 거짓이 술술 나온다. 선한 일을 해야 할 손이 피로 얼룩져 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지켜야 하는데, 흉계를 꾸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악에서 떠나야 할 발은 악한 일을 저지려고 달려가고 있다(4:20-27 ; 사 59:7 ; 롬 3:15 ; 약 3:14-16 ; 출 20:16). 이런 사람들의 증언은 망령(妄靈)되어 형제를 이간질할 뿐이다.


 



주께서는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지만 교만한 자의 눈은 낮추신다(시 18:27).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이 고백이 내 입술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미 2:1).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슥 8:17).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고 하였다(렘 4:14).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도무지 경험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듣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1-8).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나아와 진실 되게 죄의 고백을 한다면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써 사함 받게 하여 주신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주님은 미쁘사 우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신다(살후 3: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대하 13:12)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신다. 우리가 이 경고를 잘 듣는다면 범사가 형통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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