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푸른 물결(16)

희망의 푸른 물결(16)
모처럼 동지들과 포장마차에 갔다. 50대의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담배 한 개비를 청했다. 행색을 보니 구걸하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담배를 피우는 동지가 한 개비는 정(情)이 없다며 담배 세 개비를 꺼내 주었다.

담배를 받아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은 그 남자는 일행을 훑어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아, 이인제 의원 아닙니까!”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자신이 안양에서 살았던 아무개라며 열심히 자기소개를 한다.

한참 설명을 하더니 갑자기 돈 1,000원을 달라고 한다. 아무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담배를 주었던 동지가 손에 집히는 대로 천 원짜리 몇 장을 집어주니 그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특별히 고맙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요즘 삶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이룬다. 저녁 늦게 서울 역에 가면 노숙자들이 너무 많아 불안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 남자도 삶의 뿌리가 뽑히고 이제는 수치심도 말라버린 사람 가운데 하나이리라. 부실한 정권이 노숙자를 양산해버린 것이다.

가을이 되면 산야(山野)의 초목(草木)은 성장을 멈춘다. 그리고 말라버린다. 누군가 불을 댕기면 마른 초목은 화약이 된다. 생태계가 파괴되는 무서운 재앙이 닥친다. 그 불길이 어디로 옮겨 붙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삶의 뿌리가 뽑힌 사람들은 작은 충격에도 무서운 반응을 한다. 가랑잎처럼 말라버린 마음 때문에 과격해지고 자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노 정권은 우리 사회가 1대 9의 사회로 양극화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끄러운 정권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노 정권은 중산층이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뿌리가 뽑힌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된다. 그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으리라. 그 불길로 한국 사회를 주도해 온 세력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으로 교체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지난 지방총선거를 놓고 정당이나 후보자들은 승패로 결과를 규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길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균형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적 불안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난기류(難氣流)에 빠지면 벼락, 천둥을 걱정하듯, 이제 우리는 이 정치적 불안정으로부터 어떤 충격이 올지를 걱정하게 된다. 충격이 올 때마다 메마른 민심은 내면 깊숙이 변화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될 것이다. 임계질량(臨界質量)에 이르면 폭발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평양까지 우리 정세를 불안정하게 한다. 평양이 무엄하게도 국내정치에 발길을 들여놓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어느 당이 집권하면 한반도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다고! 그들이 이런 폭언을 평양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하고 있다.

더욱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노 정권의 태도이다. 이런 북한의 행태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하기는커녕, 나라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5년 안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연합사를 해체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곧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아니, 임기가 2년도 남지 않은 정권이 무슨 권한으로 5년 안에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인가. 국민의 뜻을 물어 본 일도 없고 국회에서 논의된 일도 없다. 자기가 나라안보의 초석인 한미동맹을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니,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이야기인가.

평양과 정상회담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 정권이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을 넘어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노 정권은 평양을 향해 주한미군철수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 정치에 적극 개입하려는 평양과 북에 영합하는 정권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또 평양이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야단이다. 미국, 일본이 강력 대처를 경고하고 중국도 말리는 형편이다. 하지만 평양이 발사를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노 정권의 대응이다. 뜨뜨 미지근할 뿐 도대체 입장이 없다. 한 편에서는 무슨 인공위성이지 군사용이 아니라는 말을 흘린다. 평양은 위성체를 만들 능력이 없다. 또 다른 나라 위성을 쏘아주고 돈을 버는 사업을 벌일 형편도 아니다. 그런데 인공위성 발사라니, 이런 이야기가 노 정권 주변에서 나오는 게 엄중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제 국내 정치는 대권경쟁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질 것이다. 깨어진 균형, 메마른 민심, 노골화 된 북풍, 긴장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 놀라운 변화가 몰려 올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는 이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속도를 알 수 없다. 이것이 곧 혁명적 변화(revolutionary change)이다.

변화는 어떤 경우에도 정체(停滯)보다 낫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직한 변화를 갈망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감내할 여유가 없다. 나는 변화의 중심에서 창조적 역할을 감당할 세력이 있을 때에만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 정권이나, 한나라당이나, 깊이 들어가면 맹목에 의지하는 세력들이다. 벌써 폐기처분된 낡은 이념, 일찍이 타파되었어야 할 낡은 기득권 의식, 그리고 아직도 국민을 분열로 몰고 가는 지역패권주의에 눈멀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3세력론’을 주창한다. 국민중심당은 바로 이 제3세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중심당은 국민들로부터, 또 믿었던 충청지역에서조차,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잘못된 깃발과 전략 때문이었다. 이제 이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 출발해야 한다.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한 가운데로 나아가려 한다. 나는 깃발을 높이 들고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중심에서 가야할 방향과 목표를 향해 나의 몸을 태울 결심이다. 우리는 이 변화의 기운으로부터 국민적 통합, 경제의 회생, 민생의 안정 그리고 민족의 통일로 가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

2006. 6. 20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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