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풍이란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누우런 들판은 농부들의 가슴을 뿌듯함으로 채워주고 왠지 발걸음 가벼워져 잘 안되는 집안일마저 그저 술술 풀리게 하는 들판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동네 고개를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나의 마음은 기쁨이나 환희보다 무거움과 근심걱정이 앞을 서고 풍년 되어 출렁이는 들판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온다.

추석 귀향길을 떠나기 전날 밤늦게까지 보좌관들과 정부의 쌀 재협상의 굴욕적 태도와 자세에 대하여 어떻게 경종을 울리고 시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고민 고민 하였다.
쌀이 한국농업의 대들보인데 이 쌀협상마저 마늘 협상이나 학교급식법처럼 굴욕적으로 유권해석하고 진행한다면 우리의 쌀 운명은 뻔한 것이 된다.
어떡하던 이것을 막아야 한다며 밤새워 국감준비를 하고 온 나의 농촌들판을 바라보는 심정이 참으로 착잡하다. 풍년의 들판이 기쁨보다는 고민의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온 들판의 고개 숙인 벼들이 꼭 주인인 농부들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봄부터 볍씨로 선택되어 못자리 비닐 씌워 정성들여 키워서 논에 모심어 지금껏 자식처럼 키워준 주인 농부님께 보답코자 자연과 하늘의 뜻에 따라 알알이 옹골지게 영글었건만 왠지 세상이 반겨주지 않아 주인보기 민망하여 몸둘바 몰라 하는 것 같다.

속이 찰수록 고개 숙이는 벼들의 겸손함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처량하게 느껴질까?
식량자급 26.9%인 나라가 식량 자급 80%를 달성하던 보리고개 시절의 곡식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던 때와는 달리 이렇게 식량을 천대하는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개도국의 지위나 관세 상한선, 감축율 등의 중요한 결정들도 모두 WTO DDA 협상기한인 05년 12월 31일 이후로 미루어 졌기 때문에 쌀재협상 역시 성급하게 올 안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올 안으로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내년부터 관세화의 의무가 발생된다며 농민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토론회장에서,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공청회장에서 통상법적 유권해석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였음에도 외통부와 농림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정부가 결정한 모종의 수위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행정부가 잘못된 통상협상을 하고 있다면 입법부가 당연히 문제제기하고 사실파악을 통하여 시정케 해야 한다.

쌀은 주식이며 우리나라 식량자급 26.9% 중에 95%를 차지하고 있기에 쌀이 무너지면 한국 농업이 무너지고 따라서 식량자급도는 회복불가능의 벼랑으로 추락할 것은 뻔한 일이다.
이미 세계가 1억톤의 식량부족으로 8억 인구가 굶주리고 있으며 하루에 10만명이 아사하고 있다. 그중 3만 5천명이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다.
세계 5대 곡물메이저들은 세계 식량 유통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으며 아차 하는 순간이면 식량을 무기화하여 생명을 돈벌이의 최고 수단으로 삼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미 UN이 WTO 기구에 「식량을 인권으로 다루지 않으면 WTO(세계무역기구)를 UN 인권위에 기소하겠다」고 경고해 놓고 있다.
OECD 회원국 30개국 가운데 27위, UN 가입국 175개국 중 119위의 식량자급도의 순위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과연 올해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이렇게 농부가 고민해야 하고 곡식이 외면당해야 하는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정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정책, 참으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모르는 정치, 이번 국감 때 이것을 얼마나 규명하여 바로 잡을 수 있을지...... 마음이 무겁다.
국정감사라지만 한 의원에게 주어지는 질의 시간은 한 기관 당 하루에 30분이 채 못 된다.
한계가 있지만 밝힐 수 있는데 까지 밝혀야 한다.
추석을 맞이한 농민들의 마음이, 들판의 알알이 영근 벼들의 몸짓들이 보다 환하고 밝게 피어날 일들을 만들어 보자.

9월 27일
노루밭 들녘 고개에서

강기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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