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이회창의 성공과 실패...
박근혜는 누구의 뒤를?

그렇다면 이쯤에서 과거 대권 후보들의 ´변신´이 가져온 결과, 양 극단의 결과를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

많은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추앙한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병 환자´라며 깎아 내린다.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편견과 상관없이 이 글에선 DJ가 끝끝내 대통령에 당선된 변신,변화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92년 대선, DJ의 패배 기자회견 당시 옆에 있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을 기억하는가.

패배,정계은퇴 기자회견에 앞서 DJ는 이희호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이나 넘겼고 6년 동안 감옥에서 지냈으며, 10년간 연금과 망명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소. 그런데 대통령 선거에 세 번이나 도전했는데도 행운의 여신은 우리를 외면해 버렸소. 내 운은 여기까지 같소. 이제 깨끗이 정리하고 싶소."

DJ도,이 여사도 김 전의장처럼 울지 않았을까.

그랬다... 죽을 고비, 망명, 연금, 옥살이...이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견뎌냈지만 끝내 실패한 세번째 대권 도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수행 비서만 달랑 한 명 대동하고, 영국으로 날아간 DJ 부부.
케임브리지대학에 적을 두고 독일의 통일을 연구하며 한반도의 통일을 생각한 DJ.
그러나 불과 7개월 여 만인 1993년 7월 귀국. 언론은 그의 정계 복귀를 기정사실화했고,
예상대로 95년 6월 지방선거에 돌아왔다. 그는 승리했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차기 대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 대선은 97년. 불과 2년을 앞둔 그가 ´변신모드´에 서서히 돌입한 것이다.
96년 4월 총선에서의 패배는 DJ 변신의 폭과 속도 모두 이전과 다르게 만든 위기이자 기회의 신호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흡사 이건희 삼성회장의 말 대로 ´아내를 빼곤 모두 바꾼 거´다.

그 상징. “정치 생활 30년 만에 텔레비전에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 나왔다.”
1996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코너 ´이경규가 간다’ 에 DJ가 나와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 재치 넘치는 유머, 살가운 대화는 ´반독재 투사´ DJ의 이미지를 단숨에 뒤집었다.
옛날 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TV 예능프로 출연이 이뤄진 거다.
정치인들이 온갖 예능프로에 나가지 못해 안달인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 그것도 DJ같은 거물 정치인이 코미디언과 웃고 떠드는 건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김영희 PD는 "산책을 하면서 DJ 부부가 주고받는 농담은 이들을 비로소 ‘이웃집 할아버지·할머니’로 보이게 만들었다"며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 유명한 개그맨이 ‘김대중씨가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방송을 보고서 부드러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할 정도.

이후 DJ는 근엄한 선생님도, 빨갱이 투사도 아닌 ‘옛날에 고생 좀 했지만, 재밌는 할아버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때부털까, DJ는 스스로 변신을 결심했다. 아니 변신,변화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화장까지 했다. 굳게 다문 입과 주름이 여전히 딱딱한 이미지를 준다는 조언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1997년 대선.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 컨셉을 본격화 한다. DJ DOC의 노래 ´DOC와 함께 춤을´을 개사한 노래 ´DJ와 함께 춤을´에 리듬을 맞추는 제 2의 파격을 선보인다. 춤이라고 보기엔 어색할 정도의 ´율동´ 수준이었지만, 그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는 거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론 서태지를 꼽았다.

DJ의 변신에 대해 ´왕비서실장´ 박지원(민주당 비대위원장)은 이렇게 얘기한다. "원래 DJ는 따뜻하고 정이 많고, 유머가 철철 넘치는 그런 분이에요. 수 십 년 동안 빨갱이 이미지가 덧칠됐고, 그 분 인생 자체가 강경 투사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거요. 그래서 원래 자상하고 부드럽고, 재밌는 분이라는 걸 그저 보이기만 하면 됐지."

사람의 본 모습이 그렇다는 얘기다.

정권이든 언론이든 외부가 덧칠한 이미지를 벗겨 내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대중이 만들어 낸, 혹은 부여한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를 많이 혹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건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얘기다.

이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얘기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같은 이미지. ´대쪽´ ´원칙´ 날 선 끝에 종이가 닿자마자 스르르 갈라질 것 같은 창.

경기중고, 서울대 법대, 사법시험 합격. 30년 간의 엘리트 판사. 이후 감사원장, 총리, 97년 집권 여당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002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한 번 더...2007년 대선 삼 수. 현재 제 3당인 자유선진당 대표.(이전에는 총재였다가 당 대표로 스스로를 낮춤)

최고 권좌인 대통령까지 오르지 못한 이 남자. 무엇이 문제였을까?

줄곧 성공 가도를 달려온 엘리트, 원리원칙주의자. 이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으로 여겨진다. 물론 경제적인 상황이나, 전직 대통령과의 관계, 두 아들 병역 문제 등 원인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변신´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이게 가장 크다. ´창´은 변화에 실패했다.

DJ를 벤치마킹했을까?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많이 웃고 떠들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 무진 애를 썼다. 포스터 사진을 찍기 위해 어린이 모델들과 ´다정하고 친근한 할아버지 포즈´를 취했고, 서울역, 재래시장 등 어딜 가더라도 어린 아이, 아기들은 어르고 달래고 웃어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동원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변신은 그저 겉포장을 바꾸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봤을 때 "우와, 총재가 저런 분이었어. 와아아아아....."이럴 정도는 돼야 변신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창´이 갖고 있는 독특한 버릇 하나에서 그 실패를 본다.
´창´은 헤어스타일에 대해 편집증,결벽증 같은 걸 갖고 있다. 특히 머리 양 옆 부분을 자신의 마음에 들게 단정히 정리하는 것에 매우 신경쓴다. 대부분 ´창´을 담당했던 정치부 기자들은 대중 연설, 회의 등 각종 자리에 등장하기 전이나 후에 ´창´이 이쑤시개로 옆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기는 모습을 입에 올린다.

이같은 ´창´의 모습을 보고 "창이 변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탄식했다는 한 참모도 있었다.

결국 창은 실패했다. 변신에 실패해서다. 아무리 대중들이 바라는 이미지, 모습을 따라 하려 해도 그 자신이 변하지도 않았고, 또 못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변신은 DJ와 ´창´, 누구의 어떤 길을 따라갈 것인가?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