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을 모르면 죽는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아날로그를 말하면 마치 시대에 뒤처진 듯한 평가를 받는 것이 요즘입니다.

디지털은 참 대단합니다. 포토숍에서 내 얼굴을 영화배우 그레고리 팩처럼 멋지게 둔갑시키기도 하구요. HDTV로 드라마를 보면 배우의 솜털까지 보이더라구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싸이월드에 글 하나 남기면 순식간에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지요. 지금 이 글도 네트워크를 타고 금세 누군가 볼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디지털은 참 피곤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 변신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죠. 빛이든 소리든 간에 모두 디지털 숫자 0과 1의 무수한 조합의 결과입니다.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들어가 있는 듯한 디지털 세상입니다.

일터에서 디지털을 목청껏 외치다가 집에 들어가면 아날로그가 더 좋더라구요. 책상 깊숙이 박혀 있는 테이프, 디카에 밀린 필름 카메라, 진공관이 툭 튀어나온 구식 텔리비전...

아날로그를 이야기하면 촌스럽다고 할지언정 요즘 아날로그 향수에 빠져버렸읍니다. 술집에 가도 디지털기기가 있는 곳에 가기 싫고 아날로그 기기를  찾습니다. 

디지털에 대한 무언의 반항인가요?
 
일전에는 밤늦게 귀가하다 문득 집근처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일산의 정발산 근처 카페촌에 있는 허름한 주점인데요. 그곳은 절대 디지털 음악을 틀지 않습니다. 사방을 둘러 빼곡이 LP판이 꽂혀 있지요. 이보다 작은 세칭 도너츠판도 있고요


´목포의 눈물´에다 이미자가 부른 드라마 ´아씨´의 주제곡을 듣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이지요. 지지직 하고 바늘이 내는 잡음조차 전혀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나만 청승인 줄 알았는데 양복에 넥타이를 멀쩡하게 맨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더라구요. 그런데 삼성전자 등 첨단 기술을 다루는 대기업 직원들도 많았습니다.

아! 나만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알고 보니 나같은 디지털 피로증후군이라나... 하지만 아날로그를 즐길 시간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디지털 화음이 울려퍼지면서 나를 찾는 휴대폰... 그리고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

"당신! 지금 몇시인 줄이나 알어? 빨랑빨랑 안 들어오고 뭐해. 문자 메시지 수도 없이 보내도 받지도 않고..... 빨리 와" 

김경호 기자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