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L@내 운동화 어디 있나? 청와대로 이사한지 며칠 후에 YS가 비서진에게 던진 말이다. 비서진은 상도동에서 청와대로 평소에 신던 YS의 운동화를 서둘러 공수했다. 운동화 긴급 수송 작전에 딱 15분 걸렸다. YS는 운동을 즐겼지만 특히 배드민턴과 조깅에 열심했던 YS가 등산화를 신고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등산화는 민주화 세력, 운동화는 운동권 세력으로 통한다. 군화에 이어 등산화(YS)와 운동화(DJ-노무현)를 신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착하고 순구한 민초들만 아직도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사는 게 어렵고 살아갈 맛을 보다듬어 주는 희망과 비전이 손에 잡히질 않고 있다.

서울의 봄에 이어 민주화 세력에게 주어진 정권도전의 실패는 토종 군화의 ‘권력 이어가기’의 성공을 의미한다. 딱 한번만 하고 권좌에서 내려오겠다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약속도 지켜졌고, 3김과 함께 선거를 치른 노태우 전대통령은 권력의 정통성 문제에서도 빗겨 설 수 있었다.

경제가 비교적 호황을 누리면서 잘 굴러가고, 사회 전체의 권위주의 체제정비도 민주화 세력의 저항에 맞서 간단없이 펼쳐졌다. 어용교수들의 정치참여와 언론의 적절한 입막음도 효력을 발휘하던 ‘보통 사람의 시대’가 열리면서 민주화 인사들에겐 한숨과 실망의 어정쩡한 시절이 다가왔다.

진정으로 산을 아끼는 사람들은 산이 있어 그 곳에 오른다. 그러나 민주화 인사들에겐 등산은 권력쟁취를 염두엔 둔 고행이자 결집력 강화의 시련이었다. 이들은 민주산악회를 결성하여 전국에 지부를 두고 백두대간을 섭렵하면서, 동지들과 소주잔도 기울이고 시국에 대한 불만도 토로했지만 하산 길엔 언제나 답답했다.

권력은 저 만치 물러서 있고, 갈 길은 멀고. 권력을 향한 투쟁과정에서 ‘오늘도 살아 돌아올지 모르겠다’면서 군화를 질끈 동여맸던 전두환장군 처지와 동일선상에 놓인 것이다. 이 시기의 민주화 인사들은 등산화를 동여맬 때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인고와 인내의 한계를 스스로 감수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풍토에 익숙한 탓인지, 다리가 불편한 DJ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도 답답할 때면 기자들과 함께 북한산을 오른다. 그런가 하면 내년 대권에 도전하는 예비후보자들과 연관된 인사들이 전국 차원의 산악회 구성을 위해 벌써부터 암암리에 열심히 뛰고 있다.

민주산악회, 제 2의 하나회

천신만고 끝에 이뤄진 YS의 청와대 입성은 토종 군화와 등산화의 공동작품이다. 3당 합당은 민주화 인사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등산화의 정체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YS의 문민정부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출범한 것이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망각한 채 지고지선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반만년 역사의 한국은 이미 병에 걸려 썩어버렸다고 판단했다. ‘한국병 치유, 신한국 건설’ 의지와 달리 개혁의 주체와 대상도 불분명한 채 개혁의 물꼬는 갈 길을 못 찾고 있었고, 칼국수 대접도 못 받았던 권력창출 공신자들의 불만도 함께 높아갔다.

민주산악회는 수많은 인재들을 주어 담았기에 소속회원들 중에는 낙하산으로 자리를 챙기기도 했다. 지방선거와 총선에 나간 사람들도 민주산악회 회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 걸었다. 이런 연유 탓에, 민주산악회가 문민시대에 선보인 ‘제 2의 하나회’라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YS는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서 문민정부의 정체성을 부각시켰다. 물리력을 갖고 있는 군부에 메스를 가한다는 자체가 지극히 위험천만의 일이다. 그러나 YS는 개혁추진 전략 중에서 전격작전(Blitzkrieg-strategy/tactics)을 구사했고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독일의 경우, 서독정부는 통일과정에서 동독 군부의 저항을 염려하여 점진전략(Fabian strategy/tactics)을 구사했지만, 해체작업에 동참한 동독 군부의 무저항 행동에 서독정부도 놀라워 할 정도였다. 통독 직후에 필자가 만났던 동독 군 장성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총을 들고 저항이라도 할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북한은 통독 직전부터 동독이 무너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조사해서 정리했다고 한다. 지금의 선군정치 구현과 훗날 한반도 통일대비 방안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통독 이후에 각 부처의 공무원을 보내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서만 무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독일 정부에서 통독관련 브리핑을 해줄 터이니 제발 정부통합반을 보내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각 부서마다 독자적으로 들고 뛰어다니니 비효율적이고 귀찮았던 모양이다.

빨치산 활동을 다룬 <남부군>의 저자 이태씨가 YS에게 산행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산행생활의 경험을 반영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건강에도 좋고 친목도 할 수 있는 산악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권력획득 이후에 정작에 이태씨는 YS와 전화통화는 커녕 악수도 못해보고, 칼국수도 못 먹어 본 탓인지 팽(烹) 당한 자신이 3대 바보라고 털어놓았다.

YS의 청와대 입성을 놓고 “군화 다음에 등산화”의 시대가 열렸다는 풍자적 지적이 나돌면서 민주산악회도 해산되었다. 그간에 세상이 바뀌었지만, 건강과 친목을 위해서 사람 모으기에 산악회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지금도 정치하려면 지역구에 산악회 몇 개 정도는 줄을 대고 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P2L@진정한 세르파가 없는 우리 정치

히말라야 산맥의 세르파족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민족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최초로 정복한 에드먼드 힐라리는 세르파인 텐징 노르게이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 하산 직후에 힐라리는 노르게이가 최초의 정상정복자라고 추켜세웠다. 세르파의 역할은 정상에 오르는 자를 돕기 위한 길라잡이다.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날라 주는 포터는 세르파와 달리 정상정복에 관심이 없다.

YS 정권 초기엔 등산화 세력은 포터역할을 넘어서서 너도 나도 세르파임을 자임했다. 오죽하면 칼국수에 콩가루를 넣으라고 한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서로 주장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권력창출의 세르파임을 너도 나도 떠들고 다닌 것이다. 이렇듯 세르파가 넘쳐났음에도 YS는 ‘인사가 망사(亡事), 토사구팽, 윗물만 맑은 정치자금 근절, 깜짝 쇼’ 등 단호하고 결연한 권력행사를 보여주었다.

YS에겐 진정한 세르파가 없었다. 세르파임을 자처하는 가신-측근인사들은 줄줄이 법정에 섰다. YS의 도덕적-종교적 신념이 너무 강한 탓인지, 세르파와 포터 모두가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올라갈 땐 합심해서 힘차게 오르더니, 내려올 땐 각자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나라 살림도 거덜나고 민초의 삶은 회복하기 어려운 처지로 굴러 떨어졌다. ‘나 홀로’ 맑았던 YS에겐 영식님과 소장님으로 불렸던 차남이 유일한 세르파였던 셈이다. 소통령으로 불렸던 차남마저 감옥에 가는 처지가 되자 정권말기에 외롭고 비정한 하산 경험을 치러야 했다.

세르파의 역할은 정상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과 같이 올라갔다가, 하산 길에도 같이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 동행하던 세르파가 눈에 안 보이고, 하산 길에는 세르파를 찾아도 누구 하나 거들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은 쟁취보다는 하산 길이 더 어렵다.

우리 정치에서 진정한 세르파가 활동하는 날이 올 것인가. 정상으로 안내하고 하산 길을 동행하는 그런 세르파가 아쉽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백담사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시비에 적힌 싯귀다. 권력의 하산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도 우리는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서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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