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그룹, 인동회와 청맥회

@P1L@요즘은 살빼기 위해 각종 운동에 목을 매지만, 80년대 대학생들은 저항운동을 극렬하게 펼쳤다. 출발은 신군부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목적은 서로가 조금씩 달랐던 모양이다. 이들끼리도 패가 나뉘면서 민족과 민중중심의 노선으로 뒤틀려졌고, 급기야 제도권으로 진입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간의 갈등도 불거졌다.

세월이 변한 탓인지, 과거 좌파성향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우파전향 선언도 나왔다. 좌파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우파의 쇄신을 촉구하는 재밌는(?) 현상도 나오고 있다. 뉴라이트도 그런 양태의 하나다. 보수 스스로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탓일까? 하여튼 운동권 세력과 이들과 결탁한 신세력은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기성찰을 게을리 했던 수구 보수층을 사정없이 무너트렸다.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올랐던 민주산악회는 정치규제 시절에 나왔다. 반면에 운동권의 조직과 논리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움직였던 신세력은 권력을 잡고 나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인동회(1998년 4월)와 노무현정권의 청맥회(2003년 11월)는 집권 초기에 출범한 것이다. 이들 단체의 특성은 ‘보스’중심의 은밀하고 배타적 움직임 속에서 맹목적인 충성심이 발휘된다는 점이다.

권력을 잡지 못했다면 이런 신세력의 등장이 가능했을까? 글쎄다. DJ와 노무현대통령은 운동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정치적 우군이 취약한 이들의 공통점은 제도권 밖에 있던 운동권과 손잡음으로서 권력을 쟁취했기에 권력이 다 할 때까지 이들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YS의 문민정부가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듯이, DJ와 노무현 역시 태생적 한계를 지닌 채 권력을 거머쥔 것이다.

촛불을 들고 지지했던 노사모와 열성당원의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과는 달리 DJ는 사정이 좀 다르다. 내각제를 고리로 JP와의 연정(coalition)을 통해 권력분점을 약속한 것이다. 내각제 유보와 대북정책의 이견 탓에 결렬되었지만, 결과적으론 권력 정통성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DJ와 JP는 권력쟁취 이전에 정책 이견을 충분히 좁혔을까. 돌이켜 보면 JP로선 DJ에게 속은 기분일테고, DJ는 장관자리 서너개 건네준 만큼 JP에게 할 만큼 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노무현 이전에 DJ는 충청에서 재미 좀 본 것이다. 대북송금건으로 특검이 실시되었을 때, DJ와 결별을 하지 않았다면 JP도 함께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대북관계는 DJ와 청와대가 틀어쥐고 독자적으로 펼친 것이다. 그러고도 정당간의 연정이랄 수 있을까?


정치실험, 맞습니다! 맞고요...

취임 직전에 열린 젊은 검사들과의 대화. 맞습니다. 맞고요...집요하게 상대를 설득하려 드는 노무현의 의지. 그 때 국민이 알아차려야 했다. 탄핵의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그래도 국민은 믿고 또 믿었던 것이다. 대낮이라 촛불이 안 보이는 줄 알았더니만 그래도 빛을 발하더라...JP의 노무현에 대한 평가다. 누가 뭐래도 노무현의 등장은 우리 정치의 한 획을 긋는 일임엔 틀림없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외롭다. 무엇이든지 혼자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왜 그런 정책이 안 되는지 설득하는 고달픈 자리다. 투르만대통령의 고백이다. 숱한 정책이 올라오면 왜 안 되는지 (정책 입안자 또는 지지세력에게) 설득해야 하는 자리인데, 오히려 단선적인 사고와 실험정신으로 정책을 쏟아내고 국민을 설득하려드니 공무원들이 고달프고 정책마다 오기가 넘쳐난다.

헌법보다 더 강한 부동산 정책. 혁명이 아니고서야, 아니 혁명이라 해도 이런 표현은 정말 가관이다. 4대 법안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천년정당 운운하다가 정치실험의 실패라고 자인하면 그만인가. 정치는 실험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와 숙련된 기술을 요구 할 뿐이다.

맞습니다. 맞고요...이런 식의 대화법은 열린 시대에 적절한 언어구사다. 그러나 진실성이 함께 배어나야 한다. 내 말만 맞다는 식의 정책은 양극화를 부채질 한다. 이 과정에서 더 못된 것은 책임마저 상대에게 돌린다는 점이다. 선동과 집단최면을 통한 견제심리는 후진적 정치행위다.

운동권 세력의 고답적 전략과 마인드는 닫힌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국정운영은 풍부한 경험과 노회한 전략이 함께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그 많은 자리에 사람을 고루 나눠 써야했다. 우리 정치의 획기적인 줄기세포(?)를 기대했던 국민이 노무현정권에게 속은 기분이라는 현실은 무엇을 반증하고 있는가?


@P2L@핵, 핵...헉! 헉!

대북정책과 한반도 평화문제를 따로 소개하겠지만, 북한핵과 관련하여 현 정부의 딜레마는 심각하다.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태주고 있다. 전시작전권, 386간첩단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중대한 현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물러난 국정원장마저 “남쪽 사회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다”고 토로 할 정도인데 어느 국민이 안심할 수 있겠는가.

북한이 핵카드를 흔들 때 마다 평화 운운하면서 현 정권은 봉합에 급급하고, 노대통령의 핵관련 발언을 살펴보면 더 헷갈린다.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손에 잡히질 않는다. 별다른 대안을 못 내놓은 비판주의자들의 입장도 거칠지만, 그렇다고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되묻는 대응방식도 문제다.

안타깝게도 북한 스스로가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정부는 헉헉거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국민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고, 반세기에 걸쳐 간단없는 대화를 가져 온 우리만큼 북한을 제대로 아는 정부도 없다. 금강산, 개성공단, 쌀 지원 등은 북한 달래기의 일환일 뿐, 설득과 해결의 수단으로 작동되지 못 하고 있다. 북한이 우리의 협상카드를 이미 간파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치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정치권의 소아적 발상이 남남갈등을 부풀리고 있다.

망상에 빠지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자유는 망상이 아니다. 감상적 민족주의와 햇볕정책의 한계가 드러난 현 시점에서 DJ와 노무현은 정책의 환류(feed back)와 재투입(re-input)에 인색해선 안 된다. 북한의 인권문제와 탈북자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정말 아득하다. 북한과 손잡고 평등하게 잘살자는 것은 아직은 희망사항이고 망상이다. 개인의 자유가 위협받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핵문제로 헉헉거리면서도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소리칠 때가 아니다. 한반도는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한반도에 관심을 두고 있다. 북핵이 있는 한 한반도에서의 냉전(cold-war)의 찬 기운은 여전하고,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냉평화(cold-peace)에 불과하다.

우리 정치권에선 모두가 기득권층이다. 모두가 신발의 세력을 등에 업고 한번씩 정권을 잡아봤기 때문이다. 이젠 진검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가 솔직하게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분배와 평등 등등 이런 가치에 대한 진수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작금의 정치실험의 실패는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아직도 정치발전의 절실함과 함께 지난 날 판단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 것이 아닐까...


< Epilogue >

2% 운명의 충청


요즘들어 노무현대통령과 DJ가 밀월 중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YS와 JP의 회동도 흘러나오고 이회창씨의 정계복귀도 함께 거론되고 있어 정치권의 구도가 기묘하게 점쳐지고 있다. DJ는 목포로 내려가 노벨상과 포용정책을 호남주민에게 갖다 바쳤다. 그의 고향 땅엔 김대중기념관이 들어서고 있다. 무호남, 무국가! 호남인의 자긍심이 우쭐할 게다. 이를 지켜보는 여타 지역민들은 할 말이 없다. 살기도 힘든 처지인지라 마냥 걱정만 앞설 뿐이다.

정책은 만고의 진리가 아니다, 집행환경의 변화에 따른 정책의 환류와 재투입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정치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손 볼 것은 과감하게 손보고 새로운 맘가짐으로 대처해야 한다.

DJ가 포용정책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노벨상의 진가가 떨어지겠는가. 그렇다고 정상회담의 평가가 인색해지겠는가.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굴러가기 마련이다. 흘러 간 물을 물레방아 곁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포용정책에 대한 고집과 오기는 자칫 민족에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책임질 묘책이 있는가.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국민이 수용할 것인가.

전직 대통령들이 물러나서도 책임지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정책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권력의 진퇴가 구사되는 내각책임제와 같은 권력구조를 생각해 볼 때도 되었다. 무충청, 무권력을 내세우려면 권력구조에 대해서 먼저 따져 볼 일이다.

얼마 전에 DJ는 충청의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감회가 어땠을까. 항상 권력쟁취 과정에서 필수적인 2%를 채워 온 충청이 아니던가. 지금도 대선 예비후보자들이 2%가 부족해서 충청을 찾아들지 않는가.

군화와 등산화 그리고 운동화 시절로 접어들면서 충청의 2% 운명이 정말 안타깝다. 언제까지 권력쟁취를 위한 부족분을 채워 주는 역할을 지탱할 것인가. 충청에서 재미 좀 봤다는 발언이 나와도 이 지역에선 침묵했다. 이제 더 바쁘게 움직이는 세력들이 몰려올 것이다. 무주공산인 충청도로...

서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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