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금융맨들은 지금]
-10분의 1이면 매우 큰 차이인데, 무슨 일이 있나요.
=정 씨의 추락은 다니던 회사의 경영상황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시작됐습니다. 증시 부진으로 업황이 악화되자 회사는 ‘수익원 다변화’를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금융상품 판매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과 친지를 모두 동원해 영업한 뒤에도 정 씨는 할당된 실적을 채우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내에서 ‘부진자(不振者)’로 찍혀 강도 높은 실적 올리기 과정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석 달간 모두 세 차례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정 씨는 상위 10% 직원도 올리기 힘든 목표를 부여받았습니다. 정 씨는 “아주 힘든 업무를 부여해서 결국 못 버티고 회사를 나가게 만드는 과정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실제 그는 2차 프로그램을 마치고 지난해 말 회사를 나왔습니다.
-일부러 내보내려 했다는 말이군요. 이후는 어떻게 됐죠.
=그는 당장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정부 일자리센터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자신을 필요로 한 곳은 어느 보험사였습니다. 박 씨는 “지금 월수입은 100만∼150만 원 정도”라며 “설계사들 대부분은 가족, 친지들에게 보험을 팔아 3∼4개월을 버티면 더이상 계약을 딸 곳이 없습니다. 설계사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10명 가운데 9명이 그만둔다”고 말했습니다.
-금융맨 상황이 예전같지 않군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인력 감축이 금융권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8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7월만 해도 89만4000명까지 늘었던 금융·보험업 취업자의 수가 올해 10월 81만7000명으로 줄었습니다. 불과 15개월 만에 7만7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금융회사들이 신규채용을 줄인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존 인력의 막대한 구조조정 탓에 이렇게 많은 일자리가 증발한 것입니다.
-결국 인력감축 때문이군요. 다른 사례를 들어보죠.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 2010년 희망퇴직한 이모 씨(54)는 별다른 준비 없이 회사를 그만둔 뒤 ‘기술’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일반 회사에 다시 들어간다 해도 언젠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다시 퇴직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제대로 된 기술 하나만 배워놓으면 나이가 더 들어도 계속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새 직업은 보일러공이었습니다. 벌이는 월 100만 원 안팎으로 자기 용돈과 매달 나가는 경조사비 정도 충당할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 나이가 돼서도 일한다’는 기쁨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미혼인 두 아들의 결혼 비용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7억 원대 아파트를 팔고 3억 원대 집으로 옮겨 마련할 계획입니다.
-전문직에서 기술직으로의 선택이 쉽지 않을 텐데요.
=네. 문제는 정작 돈의 액수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양복을 빼입고 직원들을 부리던 옛날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이 씨는 “일을 하니 그래도 돈을 번다는 뿌듯함은 있다”면서도 “그런데 현장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부림’을 당하다 보면 알 수 없는 설움이 와락 밀려온다”고 털어놨습니다. 결국 이 씨는 조금이라도 더 ‘대접’받는 곳에서 일하기 위해 다른 금융 관련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금융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군요.
=네. 나이에 ‘5’자가 들어가는 순간, 금융회사 직원들의 직장생활은 언제 끝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나마 은행이나 보험사는 좀 나은 편입니다. 증권사는 40대 초반만 돼도 연말 인사철이 영 편치 않습니다.
예전에는 회사를 조금 일찍 나와도 갈 곳이 있었습니다. 몸만 좀 낮추면 어떻게든 다른 금융회사에서 ‘둥지’를 틀 수 있었습니다. 은행을 관두고 저축은행에, 또는 증권사에서 나와 중소 투자자문사에 재취업하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전(全) 금융권이 동시다발적 경영난에 빠진 요즘은 같은 금융권에 남아 있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약 5년간의 통계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중장년층이 퇴직 이후 같은 직종에 재취업하는 비율은 금융·보험업이 20.3%로 23개 직종 중 4번째로 낮았습니다.
금융권에서 조기 퇴직하는 이들의 행보는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한 가지는 이 씨처럼 기존에 하던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을 찾는 경우입니다. 대개는 소득수준이나 사회적 신분이 모두 하락하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하나는 원래 다니던 회사에 계약직으로 재취업을 하는 경우입니다. 올 7월 퇴직한 증권사에 다시 취업한 양모 씨(45)가 그런 사례입니다.
-같은 업종으로의 재취업 사례군요. 들려주시죠.
=20년간 한 증권사에서만 일했던 양 씨는 40대 중반 나이에 명예퇴직 권고를 받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안 나가겠다고 버텨봤자 원격지로 발령이 나거나 새로 만든 방문판매부로 쫓겨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양 씨는 명예퇴직 한 뒤 재입사해 지금 6개월 시한부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은 이전과 거의 같지만 급여는 예전의 절반도 안 됩니다. 이런 열악한 처우에도 양 씨처럼 같은 회사에 계약직으로 재취업한 직원이 전체 퇴사자의 40%가 넘습니다.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 씨는 “지금 자리마저도 내년 초 재계약이 어려울 것 같아 막막한 심정”이라며 “퇴직금을 쏟아부어 음식점을 여는 것은 주변에서 다들 절대 하지 말라고 해서 어떻게든 월급쟁이로 남아 있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그만두게 한 다음 계약직으로 채용했군요. 창업도 고려할 만한 상황 같은데, 여의치 않은가요.
=네. 최근 금융권 퇴직자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자영업 진출을 극도로 꺼린다는 점입니다. 외환위기 직후 너도나도 음식점을 차렸다가 퇴직금만 날리고 폐업한 경험이 ‘금융맨’들에게 깊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직(轉職) 컨설팅업체인 인지어스의 정태식 사업본부장은 “과거에는 요식업 창업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우리가 먼저 뜯어말린다”며 “금융권은 동종업계 취업도 쉽지 않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조업, 통신업 등 다른 산업군으로 넘어가려는 추세”라고 말했습니다.
용케 일반 기업에 안착하더라도 상당 폭의 연봉 감소와 노후 불안은 피할 수 없습니다. 2년 전 시중은행에서 퇴직한 김모 씨(53)는 지난해 일반 기업의 감사직으로 재취업했습니다. 그의 월 소득은 실수령액 기준 약 300만 원으로 은행지점장 시절의 3분의 1도 안 됩니다.
소득이 줄었지만 씀씀이까지 줄이진 못합니다. 비록 돈은 적게 벌어도 경조사나 동창회 등의 모임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소속됐던 커뮤니티에서 소외될 것이란 불안감이 작용했습니다. 김 씨는 “정작 은행에 다닐 때는 외모에 별 신경을 안 썼는데 요즘은 집을 나설 때마다 잘 다려진 옷을 입고 머리엔 왁스를 바른다”며 “‘직장에서 쫓겨나니까 사람이 후줄근해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소득이 줄어든 현실과 사회적 체면, 품위를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상충되는 현상은 많은 금융권 퇴직자들이 겪는 딜레마입니다.
-성공적인 명퇴는 어떻습니까.
=국내 대형 은행에 다니다 올해 1월 말 퇴직한 박모 씨(55)는 18년간 7군데의 은행 지점을 거치며 내내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했습니다. 박 씨는 지점장 시절 생명보험설계사를 비롯해 부동산투자상담사, 펀드투자상담사 등의 자격증을 땄습니다. 나이가 들어 수험서를 붙들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은퇴한 뒤에는 무조건 늦는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 물고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박 씨는 퇴직한 후 한 달 만에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박 씨의 화려한 ‘스펙’을 눈여겨본 헤드헌팅 업체에서 먼저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온 것입니다. 박 씨는 현재 한 보험사의 임원으로 금융상품 영업부서를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급여도 은행에서 일할 때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습니다. 박 씨는 “보통 6개월에서 8개월간 재취업하지 못하고 쉬는 사례도 많은데 미리 은퇴 준비를 해 둔 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스펙을 키웠던 게 주효했군요.
=네. 퇴직 이후의 성공 여부는 퇴직 이전의 준비가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미래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착실한 준비 과정을 거쳐 금융권에서 일한 전문성을 살리면서 경쟁력 있는 일자리를 찾은 사례도 많습니다.
올해 7월 구조조정으로 증권사에서 퇴직한 김모 씨(49)는 “(구조조정을 당한 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21년간 ‘증권맨’으로 일하며 지점장을 세 차례나 맡았을 정도로 인정받았던 그는 퇴직 전 업황이 나빠지면서 실적 부담에 시달렸습니다. 스트레스가 병을 키웠는지 설상가상으로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김 씨는 사직서를 내고 나와 고향인 광주에 작은 투자자문사를 차렸습니다. 오랫동안 증권맨으로 일하며 쌓아온 전문성이 빛을 발했습니다. 회사가 지난달 낸 순수익만 1300만 원. 증권사 부장 시절 받았던 연봉 1억여 원보다 오히려 벌이가 좋았습니다. 연금이 나오는 15년 뒤엔 제주도에서 아내와 노년을 보낼 생각입니다. 김 씨는 증권사에 다닐 때도 늘 은퇴 후를 준비했습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 국제공인회계사 자격증까지 땄습니다. 그는 “은퇴 후 깡통을 차지 않으려면 자기관리가 중요하다”며 “당장 눈앞의 실적에만 매달리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퇴직 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귀농 사례도 있다지요.
=네.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인생을 설계하는 퇴직자도 많습니다. 50대 중반에 퇴직을 한 뒤 일반 기업이나 금융회사에 재취업하면 길어야 3, 4년을 다닐 수 있는데 앞으로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국내 외국계 은행을 다니다 올 6월 말 희망퇴직한 김모 씨의 생각도 그랬습니다.
김 씨는 귀농을 선택했습니다. 아직 두 자녀가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어 퇴직금만으로는 노후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김 씨는 “큰 병에 안 걸리면 90세까지도 살 텐데 앞으로 30∼40년은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며 “연 3000만 원의 농가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귀농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지난해 강원도 횡성에 5000m² 규모의 밭을 사고 자그마한 집도 지었다. 주말농장 삼아 아내와 감자, 고구마, 깨 등 10여 가지 작물을 심는 등 예행연습도 했습니다. 김 씨는 밭일이 손에 익으면 밭을 늘려 더덕이나 도라지, 오가피 같은 약용작물 농사도 해볼 생각입니다.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실업자 직업훈련 과정에 등록해 조경 기술을 배우고 굴착기 운전 자격증을 딸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직접 전원주택을 짓고 귀농을 준비하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조경을 부업으로 해볼 계획입니다. 김 씨는 “회사 생활에 익숙한 퇴직자들이 단기간 일자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해봐야 2, 3년이고 그 이후에는 또 대책이 없다”며 “최소 30년을 내다보고 퇴직 후의 삶을 짜야 한다”라고 조언했습니다.
-당장의 눈앞보다는 멀리 봐야겠군요.
=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이형종 수석연구원은 “일단 어디에라도 들어가 월급을 받자는 마음으로 재취업한다고 해도 사실상 인공호흡으로 퇴직 시점을 2, 3년 늦추는 임시 방편에 불과할 뿐”이라며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퇴직 후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화려했던 과거를 잊고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조언도 많습니다. 보험사 지점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희망퇴직한 조모 씨(54)는 퇴직금을 받아 판촉물 업체를 차렸습니다. 수건과 행주, 김, 국수 등 보험회사 영업점이 고객들에게 주는 각종 사은품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조 씨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그래도 내가 지점장 출신이라는 생각에 폼 잡고 영업하러 다니다가 ‘건방지다’ ‘임직원처럼 행동한다’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충격을 받았다”며 “그때부터 철저한 ‘을(乙)이 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퇴직 후 전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인 것 같다. 혼자 일하지만 출퇴근 시간을 꼭 지키고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긴장감을 갖고 일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럴 수 있겠군요. 마지막 정리해주시죠.
송양민 가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고령자 일자리의 경우 보통 월 100만 원 안팎의 소득을 얻을 수 있는데, 과거의 연봉만 고집해서는 좀처럼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다”며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송 교수는 “퇴직 후에도 경제생활을 위해 많은 수입을 올려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사회적 기업이나 봉사활동 등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눈높이를 낮춰야겠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미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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