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권력자에 맞선 두 사람, 유승민에게 당대 최고정치인 등극한 이해찬 의원이 롤 모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거취 파동이 청와대와 친박계가 정한 데드라인 6일이 지나면서 결국 8일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 사퇴권고 결의안'을 내는 형식으로 강제 사퇴시키는 수순이 준비되고 있다.

당내 안팎에서 강제사퇴가 아니라 '명예사퇴'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아 청와대와 친박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회법 재의일인 6일까지 시간을 주기로 했으나 6일 이후에도 유 원내대표가 끝내 자진사퇴, 명예사퇴를 거부하고 '의총 의견을 따르겠다'고 버티면서 결국 김무성 대표 등 최고위원들이 찾아낸 고육책이다.

이번 국회법 개정안 파동으로 시작된 이번 유승민파동의 득실을 따져보면 당연히 유승민 원내대표가 포인트를 많이 얻었다. 하루아침에 여권 차기 대권주자 서열 3위에 올라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청와대의 압력에 굳건히 버티면서 당내 '항박'(박 대통령에 저항하는 의원)진영의 대표급으로 부상했다.

지역구인 대구 지역 여론이 아직은 정리가 안됐지만 대구출향인들에 따르면 유승민은 차기 대구. 경북(TK) 대표정치인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는 평가다.

이래저래 이번 파동을 통해 유승민 원내대표는 일개 배박(박 대통령을 배신한) 재선의원에서 일약 전국 정치지도자 반열에 오른 정치 신데렐라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6일 전까지 평가다. 안팎에서 데드라인으로 생각했던 6일이 지나고 연이어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사퇴불가 입장을 고수하면서 유 원내대표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대(유승민 원내대표의 약칭)가 오버하는데...."  "너무 나가면 다치는데……." "이 정도 했으면 된 것 아냐. 꼭 당을 이렇게 만들어야 돼" "정말 유대가 차기 대권까지 보는 거야"

그동안 유대의 뚝심행보에 대해 지지했던 당 안팎의 인사들이 하나 둘씩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유대의 지지여론이지 지지세력, 즉 조직적이거나 로열티(충성도)있는 지지세가 아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유대를 지지하는 일반 여론과 당내 의원들의 심중에는 이번 기회에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를 확실히 손을 보겠다는 '거사'의 의지보다는 단지 이번 기획에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독주'에 확실히 제동을 걸겠다는, 그래서 차기 공천 과정에서 청와대와 친박계가 전횡하지 못하도록 막아야한다는 견제 심리가 더 강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대를 통해 비박계 의원과 친여. 비박 여론의 대리전을 치렀다고 봐야 한다. 그럼 유대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

유대를 처음 만난 것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특보로 있을 때다. 그 때 비교적 얘기가 통하는 사이였는데 대화를 마치고 나오면 드는 생각이 '꼭 이해찬(의원)이네'이었다.

끊고 맺음이 분명한 것도 그렇고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아니다싶으면 바로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먼산을 바라보는 제스추어, 당시로는 매우 특이하게 기자들과 논박하거나 기자얼굴이 벌개질정도로 뭉개는 공격적 스타일이 너무 흡사했다.

▲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이해찬 의원

매일 출입하는 기자들도 이해찬 의원실이나 정책위의장실에 갈 때는 한두 번 더 생각하고 가야할 정도였다. 기자들 혼내는 스타일은 임채정 전 의원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임 전 의원은 기자들이 무안해하면 빙그레 웃으면서 달래주었으나 이해찬 의원은 얼굴에 노기가 사라지지 않아 의원실에 나올 때는 등짝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유대 역시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순탄치 않은 정치 역정을 보낸 것도 이해찬 의원과 비슷하다.

유대가 이회창 총재 특보, 경제교사로 정치권에 입문했을 때만해도 유승민 특보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시 유승민 특보, 후에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아 사실상 대선기획을 총괄하면서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낙선한 이후 잠시 쉬다가 2004년 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 의회에 진출했고 2005년 박근혜 당시 대표의 삼고초려를 거쳐 비서실장을 맡게 되고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선거대책위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최선봉에 서면서 원조친박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이 갈라서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2007년 경선실패 원인과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유대가 당시 차기 대선승리를 위해 주변인사 정리 등 박근혜 후보가 버려야 할 몇 가지를 지적했는데 이를 박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 관계는 회복되지 않은 채 2011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들어서자 유대는 박 비대위원장의 행보를 공개 비판하고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도 반대하면서 확실한 '친박 핵심'에서 확실한 '배박'으로 낙인찍혔다.

2012년 대선 전후, 두문 분출하던 유대는 원내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2월 첫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지적하는 등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부터 '청와대 얼라들' '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 도입 공론화' '정윤회 문건파동 배후의혹' 등 청와대와 갈등이 심화회기 시작해 청와대가 반대했던 국회법 개정안을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함께 통과시킴에 따라 회복불능이 되었고 급기야 박 대통령이 '유승민 퇴진'이라는 정치적 승부수까지 던지는 최악의 상황에 치닫은 것이다.

최고 권력자에게 총애와 신뢰를 받다가 갈라서고 다시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는 이해찬 의원도 만만치 않은 정치역정을 겪었다.

지금은 국무총리와 당 대표, 정치인으로서는 최고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해찬 의원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주류측과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탈당과 불출마를 서슴치않아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다.

첫 번째 탈당은 당대 최고의 절대권력을 자랑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마찰로 시작됐다. 1990년 5월 당시에 야권통합이 핫이슈였다.

1990년 3당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에 맞서기 위해  야권세력을 결집, 통합할 필요성을 느낀 야권은 당시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고 남은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 일부 의원들로 구성된 소위 '꼬마민주당'과 김대중 총재가 주도하는 평민당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야권통합이 지지부진하자 당시 초선이었던 평민당소속 이해찬 의원 등은 소극적인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에 맞서 통합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당연히 이해찬 의원은 당시 평민당 주류였던 동교동계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고 항명, 이적, 해당 행위자로 낙인찍혔다. 당시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는 김대중 총재의 권위에 도전하는 명백한 분파주의로 간주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6월1일 이해찬 의원은 당시 광역의회후보 공천과정에서 '공천헌금'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비난하고 탈당했다. 이후 복당해 14대 국회의원이 되지만 'DJ굴욕독대'설이 나올 정도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이해찬 의원이 다시 탈당한 것은 2008년 1월이다. 정동영 대선후보가 낙선한 후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 체제가 출범하자 탈당하고 아예 2월 18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2011년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야권 통합 추진 모임인 ‘혁신과 통합’을 주도, 지금까지 친노계 최고 고문단의 일원인 명실상부한 실세다.

결국 이해찬 의원은 김대중 총재와의 갈등으로 탈당했다가 다시 복당해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DJ대통령을 만들고 이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정권재창출을 성공시켰으며 2011년에는 손학규 대표체제에 맞서 탈당해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만 해도 '비서실장'에 불과했던 문재인 이사장을 당 대표와 대선후보로 등극시킨 당대 최고의 기획.정책전문가, 최고의 킹 메이커로 성공했다.

이해찬 의원은 인생이나 정치 모두 9부능선을 넘은 반면 유승민 의원은 이제 6부 능선을 넘었다고 봐야 한다. 이해찬 의원이 갈등과 탈당, 두 번의 대통령만들기, 제1야당 실세로 자리잡았지만 이제 유승민 의원은 갈등과 분열을 지난 '정치인 유승민'의 자기 정치를 막 시작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유승민 의원이 이해찬 의원처럼 정치적으로 성장, 대권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까.

명예사퇴를 거부하고 의원총회의 '결의'까지 끌고 간 유승민 의원.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6일을 기점으로 befor와 after는 너무 다르다. 달라지고 있다.

이해찬 의원이 91년 탈당하고 다시 복당해 14대 총선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야권 인재부족이라는 절대적 한계도 작용했지만 동교동계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받아들인 김대중 당시 총재의 '배려와 신뢰'가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두 사람의 합심이 촉매제가 된 것은 비록 이견은 있었지만 당시 이해찬 의원과 김대중 총재와는 야당의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차기 대권창출'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유승민 의원에게는 과연 보스의 '아량과 배려'을 기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차기 대권창출은 아니더라도 낮은 단계의 정치적 공감대라도 있을 수 있을까.

혹시 두 사람의 정면충돌 진짜 이유가 향후 정치적 목적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유승민 의원이 의원총회 결의 즉 의원들의 '의지'를 굳이 확인하겠다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앞으로 유승민 의원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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