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이야기를 하면서 곧 잘 등장하는 인물이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설화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후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김해 가락국에 도착하였고, 수로왕은 이를 미리알고 기다려 왕비로 맞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 아유타국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하나는 인도의 아요디야 왕국이라는 설이 있고, 두번째는 아요디야 왕국의 식민지였던 타이 메남강 근처의 아유티야 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소수 설로 일본이라는 이야기도 돈다. 

허황옥의 도래와 관련해서는 여러가지 윤색과정을 거친 것 같다. 그 윤색과정에 등장하는 것이 '수로왕의 꿈'이고, 관련 근거로 '잉어 문양'과 '파사석탑', 그리고 허황옥이라는 이름과 관련한 것들이다. 

즉, 김수로왕 시대는 서기 1세기 전후로 한반도에서는 아직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런데, 허황옥의 이름을 특정해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삼국유사에서 윤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말해 '허씨'라는 성도, '황제'와 연관된 '황옥'이라는 이름도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불교와 연관성도 무리한 윤색이 이뤄진 것 같다.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백제에서는 침류왕 등 4-5세기 즈음이다. 

신라는 그보다 늦은 눌지왕 즈음이었지만, 초기엔 거부되다가 6세기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공식화되었다.

그런데, 가야에서 그보다 일찍인 1세기 전후라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 더구나 허황옥의 유래와 연관된 '잉어문양'과 '파사석탑' 등은 불교와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리하게 덧칠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허황옥의 출신지인 인도의 '아유타국'도 불교와 연관성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윤색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허황옥의 전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가계뿐 아니라, 그 부인쪽의 가계도 가야 지방으로 이주한 이주민이라는 것이다. 즉, 이주민인 김수로왕이 토착세력과 결합하지 않고, 또 다른 이주민 집단과 혼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가야지방의 토착세력이 그다지 강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경주지방으로 이주한 김알지 세력은 토착세력인 박씨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석씨집안과 경쟁하였던 반면, 김해지방으로 이주한 김수로왕 세력은 토착세력과 연대하기보다는 토착세력을 밀어내면서, 이주민 집단끼리 연대하여 지배층을 형성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과는 달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상부한 한국의 문화재가 된 처용설화는 전해오는 내용은 빈약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은 분명한 역사적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이다. 

처용설화는 울산지역에 처용이라는 이주민(페르시아 또는 아랍 지역 이주민)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외간남자와 함께 자고 있었는데, 이를 본 처용이 화를 내지 않고 '신세한탄()' 또는 '용서'를 하였다는 줄거리이다. 그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처용무'이다. 

이때의 시대상황은 통일신라 말기 '헌강왕'때로 사료된다. 지금도 헌강왕릉 앞에는 페르시아 계통의 호위무사가 서 있다. 즉, 헌강왕시대 아랍 또는 페르시아쪽 상인이나 이주민들이 한반도에 많이 건너왔고, 심지어 왕의 호위무사 역할도 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통일신라 헌강왕 시대는 당나라 말기 현종시대이다. 당나라 현종은 중국에 전래된 동방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에 심취하여 국교로 삼으려 했었다. 하지만, 불교와의 갈등을 우려한 관료들의 반대로 국교로 삼지는 못하고 6백개 현에 일정한 봉토를 주고 기독교 예배당을 세우도록 했다.

그런데, 이 예배당의 성직자들의 부패가 심해 토착민과 갈등이 심해졌다. 그래서 일어난 민란이 '황소의 난'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황소의 난은 이주민과 이교도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토착민의 폭동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황소의 난에 주요 공격대상이 동방 기독교 성당이었고, 아랍 이주민들이었다. 역사에 의하면 이때 학살당한 이주민들이 10만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 잔인했던 공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내 신라방 옆에 있던 아랍 이주민 집단거주지는 쑥대밭이 되었고, 그로부터 도망친 아랍 상인과 이주민들이 대거 신라로 넘어왔다.

그 영향으로 신라 불국사 근처 기와문양이나 일부 문양을 보면 십자가 형상을 한 불상이나 문양이 많다. 발해에서는 십자가 목걸이를 건 불상도 발굴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당시 당나라의 기독교 예배당에서는 머리깍은 성직자가 목탁을 두들기며 성경을 읽고 예배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동방기독교와 불교가 함께 공존했던 것이다. 

또한 이 즈음에서 아랍의 이슬람교도 신라쪽으로 전해진 것 같다. 그렇게 전해진 이슬람교는 아랍과 교역이 많았던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세종 때까지 독자적인 '교회(예배당)'을 짓고, 정기적인 예배를 보았다는 것이 역사적 사료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문화적 형태는 기독교와 불교, 심지어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 불교의 상징인 불상이 결합된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 국운을 결정적으로 기울게 만든 황소의 난을 보면, '이주민과 토착민의 갈등'은 이해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전에 예방하지 못하면, 엄청난 사태가 유발되고, 결국엔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 공존과 함께 사회통합적 다문화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