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21세기 다문화 국가의 발전모델을 거론하며, 반드시 거론되는 나라들이 있다. 바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호주), 그리고 뉴우질랜드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영연방의 일원으로 되어 있지만, 서서히 자치권 확대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선진 다문화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 캐나다
 
그 중 캐나다의 형성과 발전은 미국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미국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먼저 정착했고, 14세기 전후에는 덴마크의 바이킹이 탐험과 주거지를 갖고 정착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유럽이민이 유입된 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의 일이다. 

그 이후 미국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 이주민들이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캐나다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까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을 건널 때, 원주민인 "이로쿼이 족이 카나다"라고 하는 말을 본따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로쿼이 말로 "카나다는 부락 또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 후 프랑스는 퀘백주와 몬트리올을 만들고, 프랑스 식민지를 세웠다. 영국이 캐나다에 진출한 것은 이보다 늦은 시기로 미국에서 뉴잉글랜드를 개척할 시점이었다. 

이렇게 미국과 캐나다 등 아메리카의 식민지 쟁탈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캐나다의 퀘백주를 영국이 점령함으로써 프랑스의 권한이 쇠퇴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고 중재를 이끌어내어 미국에서 영국을 패퇴시켰다. 

영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캐나다의 퀘벡 등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캐나다 연방을 성립시키고 부분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회유책을 쓰게 되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걷게 되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미국의 확장정책이 가속화되었는데, 이때 미국이 캐나다 퀘백주 등을 침공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캐나다 자치연맹을 지원하며 미국의 확장을 저지하려 했다. 이 전쟁을 통해 캐나다의 자치연맹이 점차 국가적 틀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로 개척된 퀘백주 등은 계속적으로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였고, 급기야 1970년대 들어와서는 퀘백 해방전선이라는 무장투쟁 조직까지 나오고, 1980년에는 분리독립투표까지 진행된다. 퀘백주의 분리독립 주민투표는 가까스로 부결되었지만, 퀘백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은 캐나다를 다문화국가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1970년대 들어와 세계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발전에 자극받은 캐나다는 한편으로 퀘백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때 개발된 것이 "다문화주의"였다. 다시말해 문화적 차이를 내세워 연방과 1:1로 자치권과 국가 구성을 하자는 퀘백 분리주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다문화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결과 캐나다에는 퀘백주 외에도 이누이트 등 200여개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회문화적 공동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들의 독자적 문화를 간직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다문화주의 기본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캐나다 연방 정부가 이러한 결과를 발표하고, 법을 제정한 것은 두가지 의도이다. 하나는 퀘백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문화적 차이는 당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분리주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 국토개발을 위해 더 많은 비유럽권(아시아권) 이주민을 받아들이기 위한 법적 토대를 구축해놓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캐나다는 1970년대에 들어서 이민국가에서 본격적인 다문화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캐나다는 아시아권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우수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국토개발에 박차를 가해 G7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이민을 받아들이며 캐나다에서 처음 시행한 것이 "이민 점수제 "였다. 즉, 영어능력, 기술 숙련, 보유자금 등 여러항목을 가지고 이민희망자들을 평가해서 받아들이는 시스템이 "이민 점수제"인데,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이뤄지며 호주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각국에서 도입되고 있다.

2.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라고 알려진 호주는 1980년대 이후 뉴우질랜드와 함께 선진적인 다문화국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그 이전엔 미국처럼 참혹한 이민과 원주민 학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호주 총리가 원주민 학살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공개적인 사죄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캐나다처럼 호주에 이민이 본격화된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즉, 미국의 독립으로 죄수의 유배지를 잃은 영국은 새로운 유배지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호주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유럽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호주로 유배시킨 죄수에 대해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영국내 거주하게 할 수 없을 정도의 흉악범들이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영국이 침략한 아일랜드의 저항민족주의자 등 정치범들이었다는 설이다.
아무래도 이 둘이 모두 호주로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견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그래서 처음 이름도 뉴홀랜드였다. 하지만, 이를 발견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보고는 시원치 않았다. 이어 영국 해적 윌리엄 댐피어도 쓸모없는 땅으로 보고했다. 그 이후 제임스 쿡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이 탐험되고 새로운 대륙으로 명명되고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개척이 이뤄지기 이전에 뉴우질랜드의 마오리족과 같이 호주의 원주민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대략 7만년 전이나 3만 5천년 전에 호주로 이주한 고 아시아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때는 지구가 빙하기로 호주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대륙과 연륙된 육지로 되어 있어서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가 동남아시아를 거쳐 폴리네시아와 호주로 이주해 올 수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처음엔 35만명으로 추산되었으나, 그 이후 실제 조사결과 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식민지 개척이 가시화 되면서, 특히 호주 금광이 개발되고 양모산업이 발전하면서 이들 원주민은 미국과 같이 참혹한 학살과정을 밟게 되었다. 현재 호주에는 원주민이 아예 없다고 할 정도로 100만명에 이르는 원주민은 그 흔적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는 뉴우질랜드에 마오리족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많이 비교되고 있다. 

호주에서도 영국의 조세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1854년 유레카 봉기라고 하는 광산 노동자들의 유혈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자치권을 확보하는 식민지가 되고, 빅토리아 주, 퀸즐랜드 등의 자치주들이 생겨나고 연방이 구성되었다. 그 후 1차 2차 세계대전에 호주-뉴우질랜드 연합군단이 편성되어 참전하였으며, 시드니까지 침략해 들어온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군대편성과 참전은 호주의 국가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2차 대전후 형식적으로는 영연방에 남아있지만, 실질적인 독립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 후 아시아계 이주민을 거부하는 "백호주의"를 지속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캐나다의 "다문화주의 기본법"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다문화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아시아권의 우수한 이민자들이 국토개발과 경제개발에 동참함으로써 선진 다문화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호주는 1976년 캐나다를 본따 백호주의를 포기하면서 "이민 점수제"를 적극 시행하였다. 또한 캐나다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통한 다문화 수용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다문화 방송국을 만들어 70여개 채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다. 심지어 미국보다도 앞서 초등학교부터 "이중언어 교육"을 본격화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호주는 초등학교부터 이중언어교육이 시행되고 있으며, 다문화주의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캐나다와 호주는 백인 중심의 이민국가에서 다문화국가로 전환하여 성공한 나라들이다. 그렇게 발전하게 된 바탕에는 "드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이 존재한다. 즉, 이민을 통해 드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여 선진 다문화국가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주민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이민점수제를 통해 우수인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계속...>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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