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종교와 다문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번엔 한국과 이슬람 교류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은 중앙아시아나 중동지역이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처음 우리나라와 교류한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교의 문화권이 아니었다. 우리가 중동, 중앙 아시아 지역과 처음 교류한 것은 이슬람교가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퍼지기 전이었다.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 박물관 벽화에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때 동페르시아쪽의 소그디아 왕국 때의 일이다. 중국의 사서 "전당문"과 "북서"에 의하면 "소그디아 왕국은 강국(康國)이라 불리웠으며, 그 왕족은 온(溫)씨"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 장군이나 김춘추의 호위무사였던 "온군해"도 소그디아 출신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어쨌든 이때부터 고구려와 신라는 당나라 서쪽의 소그디아(동페르시아, 이란계) 왕국과 빈번한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 이후에는 당나라에서 동페르시아 지방을 점령하여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지방까지 영역을 넓혔기 때문에 이들과의 교역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당나라 중기 큰 혼란을 불어온 안, 사의 난의 안녹산도 소그디아 출신으로 나온다. 

이렇게 천산 산맥을 넘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던 동페르시아(소그디아 왕국 등) 지역과 빈번하게 교역했다는 것은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벽화가 증명하고 있다. 또한 지금도 전하는 이란의 옛 서사시 "쿠시나메"에는 "신라" 또는 "바실라"라는 국명이 수없이 나온다. 아니, 페르시아의 대서사시인 "쿠시나메의 절반 이상이 신라에서의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쿠시나메(쿠시를 쫓는 사람)"는 이슬람 아랍제국에 멸망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조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태자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멸망의 길에 들어서자, 황태자인 아브틴이 동쪽으로 가서 저항하지만, 역시 패하고 중국(당나라)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 아랍제국의 압박으로 아랍과의 관계악화를 두려워한 당나라가 아브틴에게 떠나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 피할 곳을 찾다가 신라까지 오게 된다. 신라의 왕 "타이후르(태종무열왕)"는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을 성대하게 맞이하고, 아브틴도 격구를 즐기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고(나당전쟁), 아브틴은 타이후르왕의 아들인 "가람(김법민, 문무왕)"과 힘을 합해 "곰단(공주인듯)"을 점령해 당나라를 물리친다. 그러자 타이후르 왕이 원하는 것을 묻게 되고, 이에 아브틴은 왕의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타이후르왕의 마지막 공주 "파라랑(32번째 공주)"과 결혼한 뒤, 본국을 되찾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다. 배를 타고 오는 중 파라랑 공주가 아들 "파리둔(또는 페레이둔)"을 낳는다. 

그러는 사이 배는 어느덧 페르시아에 도착하고, 아브틴 왕자는 아랍제국의 폭군 "자학(zahhak)"에게 붙들려 죽고 만다. 하지만, 파라랑의 아들 파리둔(또는 페레이둔)이 성장해 군사를 이끌고 아랍제국을 쳐서 물리친 후 페르시아 왕국을 재건한다. 그후 어머니 파라랑 공주와 페레이둔은 외가집인 신라로 가서 타이후르왕을 계승한 "가람왕자"와 재회하고 잔치를 연다.]

물론 역사에서 쿠시나메의 서사시처럼 페르시아제국은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종 역사적 사실들이 쿠시나메에 저술된 사실들과 너무도 많이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에 대해 서술한 것들도 당시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신라에 대해 자스민향이 온 나라를 감싸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은 나라.. 등 유토피아처럼 그리고 있다. 이것은 또 아랍의 사서에 "그곳에 가면 날씨가 따뜻하고 먹을 것이 풍족해 돌아올 줄 모른다"고 쓰여진 기록과도 일치한다. 

어찌되었든 중동과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국가로 바뀌기 이전에 고구려 신라와는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다 페르시아가 아랍에게 멸망당한 뒤,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출신 고선지를 장군으로 봉해 결전을 치르다 패한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은 아랍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후 소그디아 출신의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고, 이를 위구르 제국에서 제압한 뒤부터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은 거의 막히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그디아쪽에서 밀려온 유민과 동방기독교도가 당나라에서 발흥하고, 또 당나라 내에 신라방이나 파사방(페르시아방)과 같은 이주민 집결지가 존재했고, 이들이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대거 몰려들었던 사실을 볼때 통일신라 후반기에 또다시 페르시아나 아랍상인들과의 교역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즈음에 나온 설화가 처용설화이고, 또 원성왕릉과 괘릉에 아랍무사상이 존재하고 있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위와 같은 것들은 유물을 통해서본 추정이며, 이슬람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 초기 현종 때이다. "현종 15년 열라자(al laza) 등 100여명, 다음 해 하산라자(hassan laza) 등 100여명, 정종 6년 11월  보나합(barakah) 등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어 "9월에 Tashi(대식국)라는 이방국에서 하산, 라자와 수백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 초 중기에 대식국으로 불리던 아랍제국의 명칭은 몽골 원나라의 고려 지배 이후에는 "회회(回回)"로 불리웠다. 특히 원나라의 고려 지배 이후에는 회회족으로 불린 위구르족과 아랍의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어왔다. 그 당시 고려가요 "쌍화점"과 벽란도의 아랍상인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많이 알려져있고, 노국대장공주 등 원나라 공주의 호위무사로 들어와 고려에서 벼슬에 살며 정착한 "장순룡(덕수장씨 시조)"이 있고, 원나라 벼슬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고려로 귀화하고 경주설씨의 시조가 된 "설장수" 등의 인물들이 보인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 공동체를 형성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존재하였으며 "도르(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였다. 또 무슬림 지도자들은 때때로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코란 암송이나 아랍식 두아(조찬기도회, Dua)기도 와 같은 종교의식을 행하였다. 이러한 국가 종교의식에 대한 이슬람의 참여는 조선 초기 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외 이슬람과의 교역과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여러곳에 보인다. 조선에서는 사역원의 외국어시험 중에 위구르어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교습되었고, 이슬람력(히즈라)이 도입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세종이 농업 발전을 위해 역법을 정비하고자 하면서, "본래 중국의 역법은 낡고 오차가 많아 우리 실정에 맞지 않으니, 회회역법(이슬람역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력법을 완성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태종 때 권근에 의해 동양 최초로 제작된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도 이슬람과의 교역의 영향으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태종과 세종 초기까지 개방적인 자세로 국가의 송축행사에 이슬람교의 사문(성직자)의 기도를 받고, 도로(장로급)에게 쌀 등을 하사하고, 결혼해서 살도록 집을 장만해주고, 또 회회생불이 3개월간 전국을 순회할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하던 조치들과 달리, 세종 9년에 들어와 이슬람의 대례회 참석을 금하는 한편, "회회교도들의 옷차람 등이 일반 사람과 달라 함께 혼인하기를 부끄럽게 여긴다며 옷차림 등을 보통사람들과 같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한 후 이슬람 관련 기록은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 상인들은 대외 교역에 종사했는데, 명나라에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던 영락제의 정화원정대(이때 원정대의 수장을 맡았던 정화도 이슬람상인 출신이었다) 이후, 등장한 홍희재의 대외 사무역금지 조치가 조선에 까지 영향을 주어 교류가 단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부터 포르투칼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임진왜란 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박연) 일행이 표류해 들어오던 때까지 200년을 조선은 외부와 단절되고 이질적 문화를 배척한 채 성리학 세계관 속에 빠져 살았던 셈이다.

특히 이슬람과의 교류는 더욱 더 멀어졌다. 왜냐하면, 명나라 이후 등장한 청나라에서도 위구르의 반란 등에 대한 우려로 이슬람세력을 철저하게 박해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을 거쳐 동양에 진출한 서양 세력도 이슬람과는 거리가 먼 카톨릭이나 기독교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만주경영을 위해 위주시킨 조선인들이 무슬림에 빠져든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20년대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후 터키계 이슬람인들이 볼셰비키 정권의 박해를 피해 한반도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뒤 서울시내에 민족학교와 이슬람 사원을 건립하고, 홍제동 근처에 이슬람 묘지를 확보하였지만,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터키가 연합군의 이름으로 1개 여단이 참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후방에 앙카라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를 교육시키고, 인도적인 대민봉사로 한국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후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이슬람 문화에 대한 교육 등이 활발히 이뤄졌고,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가 만들어지고,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의 서울과 이란의 테헤란에 서울과 테헤란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0년대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이슬람 식품과 식당(할랄식품) 등 이슬람 문화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외국인 노동자를 제외한 한국인 이슬람교인 수는 5개 사원과 6개 지회에 4만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속..>

ps : 정화원정대 
정화원정대는 초기 반란으로 황제에 오른 영락제가 사라진 황제 건문제를 찾기 위해 조직했으나, 이후 명나라의 위상을 만방에 알리고, 중국 화교의 해외 진출과 이들의 사기를 진작코자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지를 순방하였다. 이는 콜롬부스의 항해보다 100년이 앞선 것이었다. 규모도 콜롬부스의 함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총 3만명의 원정군에 30척의 대형 함선, 그리고 300척이 넘는 정크선과 이를 보좌하는 350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대함대였다. 

김성회 칼럼니스트는 레인보우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입니다. 김성회 대표는 연세대 민족자주수호투쟁위원장, 제2건국위원회 전문위원과 이인제 국회의원 보좌관, 반기문 팬클럽 '반딧불이' 회장,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성회 대표는 일찍이 다문화 시민운동을  시작해 국내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각종 다문화관련 행사와 방송출연, 전문패널 등의 활동을 통해 올바른 다문화 정책수립 및 문화 형성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