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50]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8 -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이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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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50]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8 -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이지란
  • (정리)김미연 기자
  • 승인 2019.06.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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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경우 화산이나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은 많지 않지만, 외적의 침략은 수없이 받은 나라였다. 그것은 반도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대륙은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으로 이어지고 해양은 일본으로 연해 있다. 따라서 대륙과 해양에서 정치적 통합이 이뤄지면, 반도에서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 대륙에서 통합적 정치세력이 등장하면 반드시 한반도를 넘 보았다. 또한 일본에서 통일된 정치세력이 등장하면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한반도를 넘 보았다.   


 그러다보니 한반도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이주민 중에서 장수나 무장출신이 특히 많다. 김수로왕이나 석탈해도 한반도로 넘어온 무장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무신란을 일으킨 "이의민"도 경주에 자리를 잡은 정선이씨 이양혼의 자손으로 알려져있다. 그 외에 발해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조카로 알려진 대도수도 고려에 귀화하여 거란의 1차 2차 침략 때 안주와 평양에서 거란과 맞서 싸웠다. 

 특히 대도수의 안주 전투는 소수의 병력(1300명)으로 수많은 거란 군사(10만)와 맞서 싸워 승리함으로써 거란의 기세를 꺾은 쾌거였으며, 이로 인해 강동 6주를 얻은 서희의 담판을 가능케 했다. 또 원나라 공주를 호위하며 고려에 들어온 장순룡은 고려에 귀화한 뒤, 낭장과 첨의참리(정2품), 문하찬성사(정2품)에 오르기까지 했다. 장순룡은 이후에 왕실로부터 덕수현(개성시 개풍군)을 식읍으로 받아 덕수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렇게 무장 출신 귀화인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였던 이지란의 귀화 이후 중종 때까지 임금의 호위를 맡은 시위병사로 만주족 등 귀화 외국인들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요즘 광화문이나 덕수궁에서 왕실 근위병 교대를 할 때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곤 하는데, 그 역할을 주로 귀화 외국인들이 맡았던 것이다. 이 왕실 근위병은 만주족 등에서 꽤나 인기가 높아 시위꾼이 되기 위해 집단적으로 귀화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 남원 황산대척비


 <이지란>

 이지란은 지금의 북청에서 태어난 건주여진의 만주족 사람이다. 청해이씨 세보에서 그의 선조는 송나라의 충신 장수였던 악비로 알려져 있으나, 실증 여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송나라 악비의 자손이 남송지역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두만강 북청 근처에서 여진족 대대로 물려받는 천호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의문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지란은 여진족 천호 부족장이었던 아라부화의 아들로 천호벼슬을 물려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가 어려서부터 태조 이성계와 친분이 많았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정식 사료에서는 태조 이성계와의 개인적 친분에 대해 거론되지 않지만, 야사를 통해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연려실기술, 순오지, 이지란 신도비 등이다. 그 중 홍만중의 순오지에 따르면, 이지란이 어려서부터 태조 이성계와 친분이 많았던 것으로 나온다. 

 "이지란이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하루는 그를 죽이려고 그가 뒷간에 들어간 사이 뒤에서 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연거푸 화살을 날린 후, 이성계가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다가갔더니, 이성계가 뒷간에서 화살을 움켜쥔 채 나오고 있었다. 이를 본 이지란이 이성계의 무공을 못당하겠다고 생각하고 엎드렸는데, 이성계는 오히려 이지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또 이런 일화도 전하고 있다. "하루는 태조가 공과 함께 노는데, 앞에서 물동이를 이고가는 처자가 있었다. 이에 이성계가 쇠구슬을 던저 물동이에 구멍을 내었는데, 물이 쏟아지기도 전에 공이 진흙을 뭉쳐 던져서 물새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일화들은 후에 각색된 것으로 판단되나,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난 부족장의 아들 이지란이 같은 만주지역에서 만호장 집안의 이성계 가문을 모를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도 고려에 귀화한 뒤 줄곧 이성계와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본명은 쿠룬투란 티무르(그래서 본명을 퉁두란이라고도 한다)이고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공민왕 때 휘하 군사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였다. 이때부터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는데, 그 중 가장 큰 전투가 500척 선박을 이끌고 침입한 왜구를 무찌른 황산대첩이다. 

 당시 왜구를 이끌고 있던 것은 소년 장수 아지발도였는데, 조그만 몸을 갑옷으로 완전히 감싸 화살을 맞출 수 있는 빈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이성계가 먼저 화살로 아지발도 투구를 맞추어 투구를 떨어뜨리자 연이어 이지란이 화살로 아지발도의 머리를 쏘아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성계와 이지란이 힘을 합쳐 왜구를 무찌른 것이 황산대첩이다. 

 이성계와 이지란이 힘을 합쳐 함께한 것은 황산 대첩만이 아니다. 황산대첩의 5년 후인 1385년에는 함주에서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쳐 선력좌명공신이 되었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또 명나라 정벌을 위해 만주로 출정한 이성계가 위화도에 머물 때, 압록강물이 불어났다. 이때 회군을 망설이던 이성계를 설득하여 회군케 한 것도 이지란이었다. 또 같은 해 서해에서 왜구를 무찔러 판도평의사사와 지문하부사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고려에 귀화한 이지란은 항상 이성계와 함께 하였다. 그래서 조선을 개국한 이씨 왕조 선계를 노래한 용비어천가에서는이지란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말이다. 
 "두란의 말 달리고 활쏘는 솜씨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가 있지만, 싸움에 임하여 적군을 물리치는데는 두란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용비어천가)" 이렇듯 이씨 가계를 칭송하기 위해 제작한 용비어천가에서 가계가 아닌 사람을 칭송한 것은 이지란 밖에 없을 정도로 태조 이성계에게 있어 이지란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두번째 비인 신덕왕후의 오라버니 딸을 자신보다 4살 많은 이지란에게 시집보낸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와는 처조카사위가 되는 셈이다. 또한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도 아버지를 따라 이성계 휘하 낭장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런 이지란이었지만,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를 함께 제거하자는 제안에 대해 "충신을 죽이면 안된다"며 한사코 거절하였다. 또한 1차 2차에 걸친 왕자의 난 때, 양측에서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태종의 입장에서는 이지란이 자신과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했었는지, 그를 연거푸 공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위화도 회군 때 함께 한 것으로 회군 일등공신에 올려졌고, 조선 개국후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 청해군에 봉해지고 참찬문하부사에 임명된다. 또, 1차 왕자의 난 때는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익대좌명공신 3등에 봉해진다. 

 만약, 1차 2차 왕자의 난에 그가 가담했다면, 그의 위치로 볼 때 2등공신이나 3등공신에 봉해질리 없었을텐데, 2등과 3등에 봉해진 것은 그가 왕자의 난 때 어느한쪽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는 조선 개국 후 경상절도사가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고향을 돌보았다. 그의 건의로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인과 만주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는 태종 즉위 후 곧바로 사직을 고하고 고향인 북청으로 낙향하고 승려가 되었다. 그는 사직하기를 청하며, "신이 성주를 만나 장수가 되어 남으로 치고 북으로 칠 때에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철권 공신등록의 총애가 비록 극진하나, 지옥의 화가 두려우니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죽은 뒤에 보복을 면하기만 삼가 바랍니다"라고 썼다. 그후 그는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승려의 법명은 그가 자로 쓰던 "식형"이었다. 

 그렇게 태종 즉위 후 고향에 은거하던 그는 태종 2년에 운명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4아들과 자손들도 조선에서 큰 벼슬을 하며 명문가를 형성했다. 첫째 아들인 이화상은 원종공신보국승록대부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이화영은 아버지와 함께 출전하여 왜구를 무찔러 상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태종 2년 아버지가 죽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조사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복귀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태종 때 도총재가 되고 지의정부사가 되고, 의정부 참찬에 올랐다.

 현재 이지란을 시조로 하는 청해이씨는 국내에 1만 4천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조사되지 않는 북쪽의 인구까지 더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의 성이 이지란의 본래 성인 "동"과 같고, 건주여진 출신이었기 때문에 청 태조 누루하치가 이지란과 같은 종형제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즉, 이지란이 누루하치의 방계조상이 되는 셈이다. 

<계속...>

 PS : 진포대첩과 황산대첩

 고려말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거세졌다. 단순히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전쟁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왜군 소년장수 아지발도에 의한 침략이다. 당시 왜구 함선 수는 500여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화포로 왜선 500여척의 함선이 불태워졌다(진포대첩).
 
 그로인해 왜구들은 육지로 상륙하게 되었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금산, 옥천, 영동, 무주, 진안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왜구토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성계와 이지란의 군대와 왜구가 남원의 황산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 왜구의 소년 장수인 아지발도는 온몸은 물론 얼굴마저 투구로 감싸, 어떠한 화살도 뚫을 수 없었다. 

 이에 이성계가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춤으로써 투구가 땅에 떨어졌고, 이어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얼굴을 맞추었다. 그렇게 해서 아지발도를 처리하자, 장수를 잃은 왜군은 크게 패하고, 지리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황산대첩). 이때 아지발도가 말에서 떨어져 피가 묻은 바위를 피바위라고 한다. 또한 황산대첩으로 이성계의 권력이 공고해짐으로써 조선 건국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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