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50편,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 8편에서 만주족 출신 이지란(퉁두란)에 대해 썼다. 그는 만주족의 부족장이었던 천호장 벼슬을 물려받고, 고려에 귀화한 뒤 태조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 등 왜구 토벌에 앞장서다 위화도 회군을 함께 한 뒤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야사에서는 태조 이성계와 의형제 사이로 여러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즉위한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청해이씨라는 성을 하사받았으며, 그의 4아들들과 후손들도 조선시대 내내 명문가를 형성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처럼 함길도 출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임금이 된 후, 이지란을 비롯해 만주족 출신들이 조선에 귀화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때로는 한 부족이 집단적으로 귀화하기로 하고, 때로는 개별적인 가정이 귀화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들에 대해 적극 귀화 정책을 펼쳤으며, 이들을 향화인으로 불렀다. 

 조선 시대 때 귀화한 향화인은 대략 3부류가 있었다. 전기에는 주로 원나라 멸망과 명나라 설립 이후로 만주족과 몽골족이 대세를 이뤘다. 특히 명나라 설립과 조선에서의 함길로 출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따라, 조선전기에 넘어온 만주족출신들 이었다. 거기에 세종의 6진개척 등 국토 확장정책의 일환으로 만주족에 대한 적극적인 귀화정책을 펼쳐 조선 전기의 역사 사료에 보여지는 만주족 출신들이 많이 있다.

 그 후 조선 중기와 임진왜란 시기에 이르면 왜인들의 조선으로의 귀화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왜구로 약탈을 하러 넘어왔다가 항복을 한 뒤 머물러 살던 사람들이거나, 선진문물 수입을 통해 장사를 하려는 무역인, 그리고 고기잡이를 하던 왜인들이었다. 또 유구국(오키나와인)의 정정불안으로 조선에 까지 흘러들어온 난민들도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배를 제작하는 조선기술자로 활용하거나, 일정한 거처를 주고 생업에 종사하며 머물러 살도록 배려하였다. 

 그 다음 정묘,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명청교체기에 명나라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한인(한족)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배를 타고 표류해오거나 생업을 위해 어로에 나섰다가 충청도와 황해도 전라도 해안가에 정착한 어민들이 많았다. 또한 만주에 살던 한인(한족)들 중에서 청나라에 저항하다가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등지에서 할거하던 명나라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로 인해 청나라와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들 향화인들은 전국토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바닷가 어촌 등에 많이 살았는데, 전체 주민의 1.5%이상을 차지했다. 조선 전기의 인구가 450만명 정도라고 할 때, 약 7-8만 정도가 향화인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중국이나 만주와 잇닿은 함경도와 평안도에만 거주한 것이 아니라, 울산 등 남쪽지역까지 내려와 살았다. 또한 해안가뿐 아니라 내륙 깊숙히 들어와 살기도 했다. 

 이들과 조선시대 이주민이었던 백정과는 명확이 구분되었는데, 조선에서는 백정과 향화인, 조선인을 명확히 구분해서 관리하였다. 심지어 1600년대 울산지역의 호적을 조사하면 이들 향화인에 대해선 4-5대 이상 1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향화인"이라는 명칭으로 관리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두만강 회령시 정경

 먼저 조선 전기에 귀화한 만주족에 대해선 세종 등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정한 토지와 3 년치의 먹을 양식과 거주지를 주고,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짓고 먹고살도록 하였다. 또한 향화인들이 다시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자제를 한양에 불러 일정한 군사역할을 맡겼다.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주로 왕실 근위병(시위대, 경호대)에 배속시켜 근무시켰는데, 그로 인해 왕실 시위대에 들어오려는 만주족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의 예가 감단나무와 동청례이다. 

 먼저 김단나무에 대한 기록을 보자. 
 "회령 성저의 알타리 중추 김단나무의 처자 및 족류 20여인이 혜산진의 변경을 넘어 탑동에 와서 둔치고 있으면서 그대로 살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혜산은 적로의 요해처로서 군민이 단약하고 지킬만한 장성(長城)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여러 논의를 거쳐, 그들을 강원도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당시 김단나무는 건주위 소속으로 나이가 70이고 그 아내 또한 늙었으며, 자녀 네 사람이 있느데, 모두 미약하여 큰 놈이 겨우 15세였다."

 또 이런 기록도 보인다. 
 "이때 국가에서 그들에게 가사(집), 전지(전답), 농우(소), 농기 및 곡식 종자를 주어서 농사지어 먹을 수 있게 하고, 또 2년 기한으로 구량(식량)을 주었으나, 스스로 직접 농사지을 줄 몰라 생활이 매우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매부 태호시내와 조카 동청례의 집에 가서 거주하여 살게 해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얻었다.(문화원형백과, 2005. 한국콘텐츠 진흥원)"  

 이렇듯 압록강과 두만강 밖에 거주하던 여진 종족은 좋은 말이 새끼를 낳으면 상납하였고, 농사를 짓다 흉년이 들면 곡식을 빌리러 오기도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여진족들은 정착 생활을 하였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파저 강에서 온 김자환은 귀화한 지 2년이나 되었는데도 생활이 어려우니 무재(무술재주)로 공을 세운바를 칭찬하여 상을 넉넉히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 옷, 안장얹는 말, 노비를 하사하였다. 

 세종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는 조선에 넘어오는 여진족과 또 조선과 충돌하는 여진족들을 달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진족 추장의 자제 중에서 신체가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자들은 볼모격으로 한양에 보내기로 협약을 체결하고, 여진족 추장 자제가 오면 임금의 곁에서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근무시켰다(요즘 광화문과 덕수궁에서 왕실 근위병 임무교대 퍼포먼스가 있는데, 만주족 출신들 중에서 여기에 배속된 것이다).

 여진족들도 자신의 자식들이 문명국인 조선의 왕실 수비대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흡족해 했고, 여진족 청년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수많은 여진족들이 조선으로 넘어왔는데, 이로인해 조정에서는 여진족에 대한 출입국 심사를 강화하기 까지 하였다. 즉 "특기와 학문이 있는 자는 입국을 시키되, 자질이 없고 불량한 자나 범죄자는 되돌려 보냈던 것"이다. 

 또 조정에서는 향화인과 내국인 처녀의 결혼을 적극 주선하여 그들이 정착하고 조선에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3년까지 양식을 공급하고 토지세는 3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국가에 대한 노역은 10년간 면제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화한 외국인들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성종 즉위년에만 김상미, 동청주, 낭삼파, 태오시내 등의 이름의 만주족이 벼슬을 받았다.  

 여기에서 김단나무의 매부가 태호시내이고, 태호시내의 조카가 동청례로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청례는 만주족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뒤,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왕실 근위대(시위)가 되어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연산군 때에는 만주지역에 2차에 걸쳐 파견되어 만주족이 조선에 침입하여 잡아간 포로를 생환시키고, 만주족과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 형성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후 왕실 경호대장(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의 직위까지 오른 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만주족에서 귀화한 향화인이라고 해서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어 불만을 토로하다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입각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성균관과 훈련원을 설치하여 문무의 선비를 대우하여 장수와 재상이 이로 말미암아 배출되었다. 병조에서 향화인 동청례를 습독관에 임명하였다. 동청례는 향화인으로서 무재가 있었고, 특히 기사와 격구를 잘하였다. 그는 성종이 모화관에 나아가서 군사를 사열할 때 무신들의 모구와 삼갑사 시험결과 활과 화살을 하사받기도 하였고, 짐승을 잘 쏘아 잡은 공로로 아마(어린말) 1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동청례가 비록 과명을 차지하였으나, 그 아비 동소로가무에 대한 평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동청례의 직책 수행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래서 다른 관직으로 제수되기도 하였다. 또 그가 휴가를 받아 장차 고향인 회령에 가서 성묘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형 동아망합이 건주위에 있기 때문에 서로 통해서 국가의 기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다하여 허락치 않았다. 하지만, 동청례는 훈련원 습독관으로 재직할 때, 북방의 일에 대해 조목별로 아뢰기도 하였다.(문화원형백과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또 연산군 조에는 이런 기록도 보인다. 
 "동청례의 건주삼위 파견은 압록강 유역의 위원이 침입을 받은 것을 계기로 포로를 쇄환시키고 교섭을 통해 여진인의 침입을 금지시키며 향후 정벌에 대비하여 건주삼위 지역에 대한 도로와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동청례의 1차 파견은 연산군 2년에 실시되었고, 약 12~13일 정도가 걸리었다. 동청례는 '삼위경차관'이란 이름으로 건주위를 직접 방문하여 추장 달한과 좌우위에서 조낸 살감들에게 위원 침입시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을 쇄환하고 침입을 금지하라는 교지를 반포하였다."

 1차 파견은 눈이 많이 쌓여 급히 돌아왔지만, 이후 2차 파견이 이뤄졌다. 
 "만포에서 봄에 만나는 것이 이뤄지지 않자, 추장들은 서계를 보내 동청례의 재파견을 요청하게 되었고, 조정에서 논의한 끝에 다시 파견하게 되었다. 이에 1497년에 20일동안 건주삼위를 방문하였다. 도중에 여진인이 설치한 방어시설을 보게 되었고, 위원에 침입한 '김산적하'의 위협과 방해도 있었다. 그러나 건주위 '달한(달칸)'과 좌위 토로, 우위 포화토 등 건주삼위 추장들을 직접 대면하고 조선의 서계를 반포할 수 있었다."  

 이에 "삼위 추장들은 선온 및 물품을 받고 잔치를 벌여 동청례를 환영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대한 침입 금지를 약속하였고, 특히 달한(달칸)은 동청례가 회정할 때 도로를 소상히 알고 가도록 하였다. 소정의 목적을 이룬 동청례는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3명을 돌려받고, 200여명의 여진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돌아왔다." 이러한 동청례에 대한 기록들은 조선의 대 여진정책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가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 여진 정책에서 조선에 귀화한 만주족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된 동청례를 만주족 출신이라는 미명으로 논공행상에서 제외시켜버렸다. 이에 동청례 등이 잇달아 불만의 제기하자, 공신 박원종 등이 고발한 "신복의 사건"의 공모자로 함께 잡아들여 국문한 후 처형하였고, 그의 가솔들은 관, 사노비로 처분하였다. 이것은 반정공신들간의 논공다툼에 이주민이었던 동청례 등이 부당한 대우와 처벌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조정에서는 이렇게 동청례를 처벌을 해놓고는 만주족의 반발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대한 중종 5년의 기록을 보자. 
 "청례의 일을 야인이 어찌 알겠는가? 필시 그 형제가 누설했을 것이다"고 했다. 이에 "송징의 말이 그와 같았고,  평안도 절도사 이윤검의 장계도 왔으니, 그들이 도둑질을 꾀한다는 것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며, 삼공에게 의논케 하라고 하였다. 이에 김수동이 의논드리기를 "청례는 귀화한 사람 중에서 가장 벼슬이 높았고, 저땅에 갔다고 온 뒤로는 그 땅의 사람들이 그의 사람 됨됨이를 다 알고 있으며, 성 밑의 야인들은 조선인민과 교통하는 자로 자질구레한 일도 다 압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송징의 서계에 "조공야인의 보복" 운운하는 말이 있고, 변보도 왔으니, 박살탑목의 진고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올려 동청례에  대한 처형에 대해 만주족의 반발과 침입을 우려하는 장계가 계속 올라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러한 만주족의 반발에 맞서 방비를 철저히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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