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0)

폭풍의 바다와 싸우다(20)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이 있으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핵사태를 중재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초청을 하던, 평양에 가던, 특별히 대수로울 것이 없다. 다만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식으로 확인한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인식이 문제이다.

북이 핵을 개발하려 하는데 이를 말리려는 상황과, 북이 이미 핵무기를 만들어 갖고 있어 이를 철거시키려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핵무기 개발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데 그 자금의 대부분은 국민의 정부 시절 공식, 비공식으로 북에 흘러들어간 현금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에 대하여 이 부분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먼저 해야만 한다. 평양에 가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핵 문제와 관련하여 ‘북의 주장은 옳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북의 주장이 옳다? 말의 맥락을 살펴보면 그 북의 주장이라는 것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북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맞서서 자위를 위해 핵을 개발하고 있으며, 미국이 북의 체제를 보장하고 경제적 보상을 하면 북은 핵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비단 김대중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식에 젖어 있다. 며칠 전 TV토론을 밤늦도록 지켜보아도 토론자나 방청인이나 북은 자위를 위해 핵을 가지려하고, 따라서 일정한 보장과 보상을 얻으면 북이 핵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P1L@이것이 진실인가? 북은 미국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자위를 위해 부득이 핵을 개발해 왔는가? 따라서 미국이 북의 체제를 보장하고 적절한 보상을 하면 북은 핵을 완전히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금 이런 말까지 하고 있다.

“그렇지 않죠. 북한은 내놨어요. 북한은 핵 포기하겠다, 또 검증받겠다, 그런데 미국이 거기에 대해서 북한이 바라는 안전문제, 경제체제문제,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안 내놓은 거죠.” 북이 언제 핵 포기 의사를 밝혔다는 것인지 나의 귀를 의심케 한다. 미국이 북에 대하여 선(先) 핵 포기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은 이에 대하여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폐기하면 대화에 응할 수 있다는 의사만 피력 했을 뿐, 완전한 핵 포기의사를 표명한 일이 결코 없다.

이제 진실을 말해 보자.

북은 늦어도 80년대 후반부터 핵 야망을 키워왔다. 80년대 후반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념을 버리고 개방과 개혁에 나서는 시기였다. 88년부터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개혁에 나섰고, 89년에는 사회주의 동독이 무너졌다. 물론 중국은 78년 등소평의 지도 아래 성공적으로 개방과 개혁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제 북한은 기댈 곳이 없게 되었다. 그들도 다른 옛 사회주의 우방들과 같이 개방과 개혁에 나서든가, 아니면 고립을 자초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고립을 선택하고 만다. 나는 몇 차례 독일을 방문하면서 북한사절단이 통일 독일을 방문하여 동독의 붕괴와 통일 후의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해 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개방과 개혁이 동독과 같이 북 체제의 붕괴를 몰고 와 결국 대한민국에 흡수되고 말 것이라는 판단 하에 개방, 개혁을 단념하고 고립의 길로 나섰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고립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무력(武力)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재래식 무력은 돈이 많이 든다.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력으로는 대한민국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

이렇게 보면 그들의 선택은 명료하다. 가장 돈이 적게 들고 위협적인 공포의 무력이 곧 핵이다. 북의 핵 야망은 이렇게 싹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북이 개방과 개혁으로 그들의 노선을 선회하기 전에는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보자. 북은 1992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서 북이 계속 핵을 개발해 온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위 공동선언은 그들의 야망을 숨기기 위한 위장(僞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결과 터진 것이 1994 년의 핵 위기였다. 이 핵 위기가 제네바협정으로 극복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협정 또한 그들의 야망을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욱 증폭시켜 오늘의 위기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제네바협정의 이행을 위해 우리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경수로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북은 봉쇄된 플루토늄 방식을 피해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 야망을 실현시키려 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 상황에서 북은 최악의 선택으로 치달았다. 비핵화를 위한 모든 협정과 수단은 무력화 되었다. 그들은 핵 야망을 숨기려하지도 않고 드러내 놓고 이를 추구하였으며, 마침내 오늘 핵 보유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제 해결의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은 미국의 현존하는 위협 때문에 핵 개발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개방, 개혁을 외면하고 고립을 자초하다보니 선택한 무력수단이 핵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미국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북핵을 막기 위해 동원되고 있는 제한된 목적의 위협임을 알아야 한다.

북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간다면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어느 나라가 북을 무력으로 위협한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북이 자위(自衛)를 위해 핵무장을 하려 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 현직 대통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리(一 理)있다, 옳다며 북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의 체제를 보장하면 북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보는 견해는 허구이다. 우리 사회는 바로 이 허구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허공을 가르는 펀치가 스스로의 힘만 빼듯이, 오늘 북핵의 장(場)에서 우리나라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은 평양 핵 야망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보장하고 보상한다고 하여 북이 핵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북은 1994년 제네바협정에서도 핵의 과거 검증은 경수로 건설 이후로 미루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몰래 핵을 개발하다가 사태가 이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북은 핵 야망의 본질에는 접근을 불허한다. 그들에게는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북은 핵무장의 의지를 굽혀본 일도, 핵 포기 의사를 천명한 일이 전혀 없다. 그저 이런 저런 조건이 충족되면 대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대화의 전제로 말하는 미국의 적대시정책 폐기는 무엇인가. 주한미군 철수까지 포함하는 것인가. 체제를 보장하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종이 한 장을 믿고 핵을 포기하겠다는 뜻인가.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북과 미국만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인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핵을 버리는 조건으로 돈을 줄 수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북이 말하는 대화를 통해 무엇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지금 노 정권은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전제로 국민을 속이고 있다. 마치 어떻게 해서든 북이 6자회담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분주히 돌아다닌다. 북이 핵무기 보유라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민족의 안위를 위협하는데, 기껏 대한민국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는 북에게 6자회담에 참석하라고 애걸하는 모습이라니!

우리가 그들 핵 야망의 본질을 꿰뚫고 근본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한, 이 파멸적 상황을 돌파할 방도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노 정권은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 북의 핵 보유를 용납할 것인가, 불용할 것인가. 용납하지 않겠다면 이를 위해 어떤 희생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노 정권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진정으로 북의 핵 보유를 차단하겠다는 불퇴전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이 일방적으로 평양 핵의 인질이 될 수는 결코 없다. 북이 핵을 보유한다고 우리도 핵을 보유하여 이른바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그나마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핵을 갖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북의 핵을 철거시켜야 하며, 그 유일한 길은 그들의 핵 야망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다. 북은 지금도 핵 역량을 꾸준히 향상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핵 야망이 구체화 되면 될 수록 이를 좌절시키는 길은 멀어져 간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전략을 세우기 바란다. 진정으로 동맹과 협력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전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까지 우리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그들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북에 대해서도 우리의 입장과 의지를 분명히 전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북의 핵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평양 핵의 인질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힘과 의지를 오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북이 고립노선을 포기하고 개방, 개혁을 선택하면, 그리하여 그들 핵 야망을 버린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의 협력을 끌어내어 북을 돕겠다는 뜻을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해야 한다. 그들을 설득해 내라는 말이다. 그저 북에게 회담 테이블에 나와 달라고 사정하는 정도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지금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은 엄중한 정세를 맞이하고 있다. 본질을 꿰뚫어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민의 위대한 저력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2005. 2. 22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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