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소리

침묵의 소리
폭풍의 바다와 싸우다(35)

침묵의 소리

DJ 정권 시절 국정원이 1,800 명을 상시 도청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다. 나의 이름도 거명이 된다. 당시 나는 그들이 나를 도청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도청 테이프가 제일 많지 않을까 짐작이 간다. 그렇지만 나뿐만 아니라 무려 2천명 가까운 사람에 대하여 무차별 불법 도청을 했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유난히 인권을 내세운 정권이, 또 권위주의 냄새가 난다며 오직 국민에 봉사한다는 명분으로 이름까지 ‘국가정보원’이라고 바꿔가며 시작한 정권이, 그 초대 책임자부터 끝날 때 책임자까지 쉬지 않고 불법 도청을 자행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구속 여부를 놓고 정치권의 볼썽사나운 추태만 보일 뿐, 참다운 고백과 회개는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장이 누구인가. 오직 대통령에만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 긴 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무차별로 도청한 사실을 국정원장도 몰랐다 하고, 대통령도 몰랐다고 한다. 이런 파렴치가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참모들의 부정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보다, 참모들과의 비밀녹음테이프 존재에 관한 거짓말이 더 큰 문제가 되어 결국 대통령 직을 사임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든, 국정원장이든, 지금이라도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는 것이 더 이상 역사에 죄를 짓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최근 우리 사회의 정세변화에는 놀라운 사실이 감지된다. 어마어마한 충격적 사건이 터져도 이내 침묵으로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이 도청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전면적인 불법도청을 자행했다면 지금쯤 국회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폭발적인 대응이 뒤따라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 없다. 사회 전체가 점점 힘이 빠지면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는다.

강정구 교수라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대해 참으로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경찰과 검찰이 일치하여 그를 구속해야 한다고 하니까, 노 정권이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을 악용하여 그의 구속을 봉쇄하고 나섰다.

이는 참으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야당 대표가 한바탕 소리를 지른 후 정치권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여론도 잠시 와글와글 하다가 이내 잠잠해져 버렸다. 다시 침묵 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민생(民生)으로 가 보자.

자살률, 이혼율, 출산율이 어느 사이인가 OECD 나라 중 최악이라고 한다. 1년에 15,000 명이 자살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통사고 사망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실업률 또한 최악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희망인 젊은이들의 실업률은 10%를 넘고 있는데, 실제로 자기 희망에 맞는 일자리를 갖고 있는 젊은이는 2~3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자살률, 이혼율, 출산율, 실업률은 곧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국민의 삶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말해 준다. 노 정권은 이를 외면하고 모든 상황이 호전될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 그러면서 내 세우는 지표가 주가지수, 경상수지 그리고 외환보유고이다.

그러나 이 지수는 몇 몇 대기업의 경쟁력, 해외자본의 국내 자본시장 진출이 가져온 과도적 현상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자본이 더 이상 국내시장에서 이익을 취할 기회가 없어져 떠나기라도 한다면, 이 지수 또한 최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동안 해외자본이 우리의 국부(國富)를 얼마나 잠식했는가. 나는 물론 자본시장의 개방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엉겁결에 당한 외환위기로 인하여 우리 5대 은행 가운데 4개가 외국자본의 손에 넘어갔고, 한국의 대표기업들의 지분 60% 이상을 외국인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 밖에 우리의 부(富)가 정상적인 자본거래가 아니라 우리의 궁박한 상태를 악용당한 때문에 외국 자본에 넘어간 사례와 규모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도 그 추세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가장 큰 절망에 빠져있는 우리 국민들은 의외로 말이 없다.

엊그제 만난 내가 존경하는 한 중소기업인이 나에게 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내년 말 쯤 우리 중소기업의 60%가 문을 닫게 됩니다. 이 의원님, 이것은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 때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또 상가(喪家)에서 만난 시민이 말한다. “의원님, 왜 요즘 이렇게 살기가 힘듭니까?” 한 젊은 농민도 조용히 말한다. “농민들이 못살게 돼서 시위를 하는데, 어떻게 그 아들과 같은 전경을 시켜 농민의 눈을 실명(失明)시킬 수 있나요? 어찌하다 이런 나라가 되었습니까?”

나는 이렇게 시민들로부터 질책어린 말씀을 듣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낀다. 더 강력하게 호통을 치고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절규할 힘조차 잃고 있다.

나는 그래서 오늘 우리 국민의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렇다. 나는 국민들의 침묵을 두려워한다. 저 깊어가는 절망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희망의 출구를 열 수 있을까.

내 방에는 5,000만 광년(光年) 떨어진 거리에 있는 ‘솜브레로’ 은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는 물론 저 솜브레로 은하도 하나의 블랙홀의 폭발로부터 생성됐다고 한다.

수 천 억 개의 별을 모두 하나의 점으로 빨아들인, 그래서 무한의 질량을 함축하고 빛까지 새어나가지 못하는 특이점(特異点)을 상상하게 된다. 오늘 우리 국민들로부터 사라진 희망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것들을 모두 빨아들인 블랙홀은 어디에 존재할까.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폭발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 우리 국민의 침묵으로부터 더 큰 소리를 듣고 있다. 절망을 거두어 희망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소리를 듣는다. 대폭발을 통해 한 순간 절망의 어두움을 날려버리고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채울 무서운 힘이 응축되는 소리를 듣는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폭발의 운명적 순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05. 11. 19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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