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푸른 물결(6)

희망의 푸른 물결(6)
지난 2. 21은 나의 결혼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암울했던 젊은 시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입영(入營)을 3일 앞 둔 가운데 서둘러 올린 결혼식, 그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종로 5가 이화예식장에서 식을 올린 후 워커 힐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바로 그 호텔에서 나는 아내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저녁을 들며 지나 온 30 년을 되돌아보았다. 결혼 3년, 4년 후에 태어난 두 딸이 대견스럽게 내 옆에 앉아 아빠, 엄마를 즐겁게 해주려 애쓴다.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나는 두 딸에게 말했다. 이제 너희들도 아빠, 엄마 곁을 떠나 가정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구나. 지금부터 아빠, 엄마는 지나온 30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30년을 시작하려고 한다. 전혀 새로운 30년을 말이다. 그 30년이 끝나면 아빠, 엄마의 생(生)도 끝이 나겠지. 그러나 딸들아 걱정하지 말거라. 너희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 분들의 생명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살아 계시다. 아빠, 엄마의 생명도 영원히 너희들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거란다.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마을, 학교, 지역, 신앙, 군대, 직장, 국가, 인류 등 수 많은 공동체를 이루고, 허물며 그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가정이야말로 다른 공동체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이 곳에서만 생명이 잉태되고 생육(生育)된다. 오직 신의 섭리와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기에 몰린 것이 바로 가정이다. 경제파탄, 폭력, 이혼이 이 사랑의 공동체를 위협한다. 가정이 붕괴되면 그 파장은 어디에 미칠까. 말할 것도 없이 다른 모든 공동체의 생명력을 앗아가게 된다. 그 재앙에는 끝이 없다.

가정을 튼튼하게 하는 일, 가족의 가치를 고양(高揚)시키는 일이 바로 정치의 요체라 믿는다.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에 생명력이 넘치면 우리 사회 모든 공동체에 희망이 넘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가정으로 돌아가자. 사랑으로 충만케 하자. 생명의 가치를 세우자.

딸들아, 가위로 코털을 잘라주며 말했지
‘아빠, 여기에도 흰 털이 있어’

그래,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 시킨단다
30년 전, 아빠, 엄마 곁에 너희들이 있었니?
시간이 너희들을 우리 곁에 같다 놓았지

나는 힘이 들 때 너희들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하지
아빠 등에 누워 잠이 들던 너희들
새록새록 연록(軟綠)의 새 싹 같은 숨결
나에게 더 없는 힘을 불어 넣는단다

아,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을까
딸들아, 방법이 있을 거야
너희들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그 생명 내 등 위에 잠이 들면
나는 시간의 위대함을 찬미할거란다

딸들아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보렴
시공(時空)을 넘어 몰려오는 빛, 바로 사랑이란다

며칠 전 딸들이 나의 코털을 손질해주며 시간 속 나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나는 두려움이 없다. 순환하는 우주의 거대한 공간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명! 그 생명 사랑으로 이어지며 시간을 이긴다. 그 사랑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곳, 바로 가정이다.

2006. 3. 6

이 인 제

이인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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