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남 기자의 중국이야기①

 

【뉴스캔】중국의 개혁개방이 올해로 30년째를 맞으며 각 언론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속속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고 그 과정과 성격은 어떠했나?


3회에 걸쳐 중국개혁개방 30년의 필연성과 과정, 향후의 전망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의 개혁개방,  필연적 역사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기 10여년전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큰 사회적 혼란을 맞게 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毛澤東)이 5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선진국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던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그 책임으로 실각한 후, 실패를 만회하고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으켰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60년대 초 후르시초프에 의해 스탈린의 지도이념을 부정하려던 ‘스탈린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중국이 이를 모방. 모택동이 자신의 지도이념을 부정하는 세력이 나올까 두려워했던 탓이라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 예측은 공교롭게도 정확했다. 10년 후 중국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지도자 등소평(鄧小平)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택동정부의 고민, 홍위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이들의 분노, ‘취직시켜달라!’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중국정부에게 가장 큰 고심을 안겨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혁명의 주체자가 되었던 홍위병(紅衛兵)들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학교는 수년간 휴학상태에 들어갔고, 학교를 나온 학생 홍위병들은 사회 곳곳에서 혼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4가지 낡은것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의 사찰, 명승고적, 서예작품등 문화재를 ‘봉건주의, 부르주아’로 간주. 파괴했으며, 이화원 만수산 꼭대기의 유리(琉璃)로 만든 천개의 불상도 당시 모두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심지어 부모와 선생님, 친지들 까지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다. 중국의 대 문호 노신화(盧新華)의 상흔(傷痕)을 보면 교장선생님이 었던 자신의 어머니가 혁명의 대상으로 지목당하자 주인공은 어머니를 비판하며,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며 어머니를 버리고 농촌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계속된 이들의 사회파괴는 모택동 자신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당 지도부는 혼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농촌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는 이들을 학교에 남겨둘 수도 없었고 일자리가 부족한 도시에 취직을 시켜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당지도부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노동자, 농민 병사 (勞農兵)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생활여건이 열악한 농촌으로 내려가게 된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이들의 불만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정부는 자식이 부모의 일자리를 계승하는 이른바 ‘대체취직(頂替)’을 내놓았지만 숙련된 노동자를 내보내고 신입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비효율적일뿐더러 고용문제 자체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청년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 다시 도시로 올라와 법을 어기면서 까지 인력거를 몰고, 음식을 팔며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갔다. 개인이 스스로 돈벌이를 하는 자영업은 명백히 불법이었으나 정부는 이를 눈감아 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채택하고 사영기업을 허용하기 이전. 이미 사회의 밑 바닥에서는 개혁의 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




모택동 정부의 대약진(大躍進)운동, ‘중화학 발전을 위해 먹던 숟가락 까지...’


집단농업구조 뿔난 농심(農心), ‘소강촌(小崗村) 주민, 내 살길은 내가...’


모택동정부는 사회주의 우월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50년대 중화학공업발전을 主로 하는 대약진운동을 실시하고 그 자원의 안정적 조달을 위해 농업을 집단화시킨다.


당시 농촌에서는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철을 공급하기 위해 집에 있는 숟가락, 냄비까지 모두 내놓아야 했으며, 집단화된 농지에서 일하며 그 이익을 정부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농업의 집단화는 농업생산량의 저하를 가져왔다. 일하지 않고 이익을 얻어가는 이른바‘무임승차’현상은 농민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농민의 사기저하는 다시 생산량의 저하를 가져왔다. 이러한 계속되는 악순환은 중국인민 3천만명을 굶어 죽게했다.




에드거 노스는 ‘중국의 붉은별’ 이라는 책을 통해 “그에게 무엇인가 비범한 면이 있다면 그곳은 곧 수백만의 중국인, 특히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신비스러울정도로 잘 종합해서 드러낸데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라 모택동에 대해 언급했지만 건국이전 농민을 가장 잘 이해했던 모택동은 건국이후 농민들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모택동 사망 후 중국의 이데올로기 통제가 점차 희미해져가자 농민들은 중국정부의 허가 없이 ‘집단화’를 버리고 ‘가정경영책임제’를 실험하기에 이른다.


그 주인공은 중국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소강촌 주민들.


이들은 발각되어 주모자가 감옥에 갈 경우 다른 사람들이 그 가족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각서까지 쓰며 이를 단행했다.


 


가정경영책임제는 집단경작방식에서 벗어나 가정단위로 농민들에게 토지경작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농민의 생산의욕을 불러일으켰으며, 농업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소강촌 농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이 제도는 이후 중국 농업혁명의 중추가 된다.


 


지금 이들의 각서는 중국농업개혁 최초의 역사적 문헌으로 북경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국의 신(神) ‘모택동’, 임표(林彪)에 무너지다.


천안문 사태, 공허함이 불러온 새로운 요구 ‘등소평’


70년대 중국인민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바로 임표의 모택동 암살미수사건.


임표는 1971년 모택동 암살을 시도하려다 사전에 발각. 실패했으며,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해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충격을 준것은 중국의 신(神)이었던 모택동에 대한 암살시도였기 때문이었지만, 그에 더해 임표가 중국공산당 9전대회(九全大會)에서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된 인물이며, 모택동이 생전에 가장 친밀한 전우라고 평했을 만큼 모택동사상을 절대화시킨 인물이기 때문.


모택동 사상을 절대화시킨 인물의 모택동 암살미수사건은 모택동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따른 그의 이데올로기도 흡인력을 잃어갔다.


 


모택동의 이데올로기가 흡인력을 잃어가자 부모와 처자까지 부정하며 문화대혁명에 참가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몸바친 10년의 허망함과 이후의 삶에 대한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1976년 4월 5일. 젊은이들과 인민들은 중국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공개적인 의사를 드러내게 된다.


천안문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인민들의 신망을 받았지만 모택동을 과(?)하게 추종하던 세력에 의해 불공정한 평가를 받아왔던 주은래(周恩來)의 추모의식이었다.


 


주은래는 모택동의 평생동지로 알려져 있지만, 모택동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가로챌 수 있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주은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후, 27년간 총리를 지내며 국민에게 가장 인간적인 지도자로 신망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주은래는 말년 그의 병상에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국가를 재난에 빠뜨렸다. 이것이 사회주의인가? 이것도 인민이 주인되는 사회라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며 인민을 위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모택동 추종자들은 주은래를 폄하하기 시작했으나, 인민들은 주은래와 주은래의 사상을 계승한 등소평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주은래 사망 후 추모행사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민의 마음은 이제 이데올로기보다는 내 배를 채워줄 경제 대통령, 모택동 노선으로 기득권을 유지해가던 세력과 신흥세력의 이익을 잘 조율해 더 이상의 사회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노련한 정치가를 원했다. 그가 바로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이끌었던 ‘등소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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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 추정남 기자 qtingn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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