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난무해 진짜가 뭔지도 헷갈리는 이 시대ㅡ진짜배기 전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올해 2011년은 공격하는 상대방의 손목을 먼저 제압해 역공격한다는 ‘절권도’의 창시자이며 아직까지도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부르스 리’, ‘이소룡’의 첫 주연작이자 히트작 <당산대형>이 상영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이소룡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한 이소룡은 유명한 경극배우인 아버지 ‘이해천’과 독일혼혈인 어머니 ‘그레이스’사이에서 1940년 11월 27일 태어났다.
경극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나이에 아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성장기에는 무술만을 연마하며 지내다 1964년 24세의 나이에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무술가 ‘윌리엄 도지어’의 눈에 띄어 조연으로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역할을 맡지 못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골든 하베스트>사의 <당산대형>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약 아시아의 최고 스타가 된다.

▲ 이소룡 주연의 ´당산대형´ 영화 포스터

그 후, 이소룡 특유의 강인함과 치밀하게 짜인 연기로 보는 재미를 선사하며 <정무문>, <맹룡과강>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스타가 되는데 1973년 출연한 <골든 하베스트>와 <워너 브라더스>의 최초 공동 제작 작품 <용쟁호투>의 개봉3주 전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망하고 만다.

▲ 좌측부터 ´맹룡과강´과´정무문´ 영화 포스터

그의 나이 겨우 32살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유작이 될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을 <사망유희>를 찍던 중이었다.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동료 영화배우인 대만여배우 ‘베티 팅페이’의 집에서 사망하는데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진통제 복용이 원인이 된 ‘뇌부종에 의한 과실사’라고 알쏭달쏭하게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이소룡의 사망원인은 현재도 끝나지 않은 논란이다.

어떤 경우에는 출생이나 활동만큼 죽음이 더 유명한 사람도 있는데 이소룡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말할 때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이소룡 가문의 저주’이다.

그의 가문은 아버지 이해천은 64살, 이소룡 자신은 32살, 그의 아들 브랜든 리는 28살에 차례로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이소룡 할아버지 묘 자리 때문이라는 것.

1929년 할아버지의 묘를 쓸 당시 풍수신동으로 유명했던 한 소년이 사망하면서 “누구라도 자신의 묘 옆에 묻힐 경우 집안을 풍지 박산 내겠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이소룡의 할아버지 묘를 쓰고 그러한 이유로 대를 이은 요절이라는 비극이 생겨났다는 다소 픽션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비극은 1993년 당시 28살이던 아들 브렌던 리의 죽음일 것이다.
▲ 브랜든 리가 출연한 영화´크로우´

브랜든 리 역시 아버지의 재능과 끼를 그대로 물려받아 개성강한 배우로 자리잡으며 영화 <리틀 도쿄>, <래피드 화이어>등에 출연했고 유작이 된 영화<크로우>를 촬영하다가 촬영 도중 소품으로 사용된 총에 실탄이 들어있는 어이없는 사고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이소룡가문의 저주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 비극적인 부자는 미국 시애틀의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장되어있다.

▲ 시애틀에 있는 이소룡 부자의 묘지

혼자서 자신의 몸과 쌍절곤만으로 수 많은 악당들을, 마치 춤추듯 흐느적거리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 쓰러트렸던 그를, 3~40대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1~20대들에게는 이소룡이 다소 희화화 되며 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알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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