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부담스런 이들을 위해 탄생시킨 '베지밀'

 정식품 창업주 고(故) 정재원 명예회장 [사진=정식품]
 정식품 창업주 고(故) 정재원 명예회장 [사진=정식품]

옛날이야기다. 옛날에 의대(?)안 등사(복사)가게에서 등사를 해주던 소년 급사가 있었다. 소년이 자주 등사하던 문서는 의대 교재였다. 등사를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소년은 그 문서를 외웠고 시험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17살 때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등사가게 사장과 그 학교의 도움으로 19살에 전 과목에 합격을 하고 소아과 의사가 됐다. 그때가 1937년이다.  

이후 그는 명동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중 백일도 안된 아이들이 우유를 먹지도 못하고 녹색 변만 나오다 사망하는 것을 보았다. 뼈만 앙상하고 배만 뽈록하게 나온 아기. 그렇게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만 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해방이 되고 그리고 회현동에서 개업의가 되었다. 다행이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때 아기들이 죽어갔던 그 병은 고칠 수 없었다. 

만으로 43세 되던 해, 여섯 남매를 두고 혼자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그 시절 죽어간 아이들의 원인과 해법을 찾아 보았다.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했다. 영국에서는 찾지 못하고 센프란시스코로 건너갔을 때 소아과 교재에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lactose intolerance)’을 찾아낸다. 

즉, 한국인 중 상당수가 우유를 소화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게 그걸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유대용으로 어릴 적 어머님이 해 주시던 콩죽을 떠올리고, 단백질이 풍부한 콩으로 우유를 만들었다.

그 우유를 먹은 아이들은 죽지 않았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내니 명의로 소문이 났고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콩우유의 수요를 댈 수 없어서, ‘베지밀’을 만드는 ‘정식품’을 1973년에 창업한다. 이 때 그 소년의 나이는 56세였다.

이 이야기는 ‘베지밀’로 불리우는 두유의 창시자 ‘정재원 의사’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필자를 포함해서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다행히 ‘유당불내증’은 없어서 살아 남긴 했지만 지금도 유제품이 들어간 음식은 잘 소화하지 못한다. 하다 못해 ‘라떼’만 마셔도 화장실에 가야 한다. 

이게 대물림이 되는 것인지 딸아이도 비슷하다. 우유를 마시긴 하지만 부담이 있는 듯싶다. 몸이 아플 때, 평소에는 잘 먹는 두유를 찾는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콩으로 만든 우유,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 우유. 환경 파괴로 소가 줄어도 만들 수 있는 우유, 쌓아 두고 마셔도 부담 없는 식물성 단백질… 

이 같은 탄생 스토리를 가진 '베지밀’. 한국의 명품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지 않을까?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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